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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을 지금 누가 침해하는데 학생 인권조례 탓을 하나?

요즘 학교와 관련해서 조중동이 대서특필하는 사안은 주로 둘이다.

하나는 주로 "어느어느 학교에서 학생 혹은 학부모한테 교사가 두드려 맞았다. 아 땅에 떨어진 교권이여! 학생 인권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교권이 무너져서야!"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기사가 10개든 20개든 다 똑 같다.

또 하나는 편향 타령이다. 교사가 편향된 수업을 한다, 교과서가 편향되었다. 교사 고발해라, 교과서 갈아 치워라!

그런데 이 두 주장을 같이 한다는 것은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고서야 하기 힘든 일이다. 교사의 학생에 대한 통제력은 권위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물리적인 우위,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사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 뭉개고 한탄 사상검증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교권이 침해되었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언제든지 수업 녹음해서 빨갱이 사냥의 대상으로 만들수 있는 대상이 교사인데 누가 그 교사를 존중하겠는가?
(다음 기사 참조)

설사 저들이 원하는 대로 체벌이 허용되었다고 치자. 그럼 체벌을 받은 학생은 반성을 하는 대신 그 교사에게 앙심을 품고 그 교사의 수업을 녹음할 것이다. 그 다음 그 녹음 내용을 적절히 짜집고 편집해서 빨갱이 수업을 만든 다음 인터넷에 돌리고, 조중동에 찌르는 것이다. 혹은 그 녹취물을 빌미로 교사를 협박해서 하루에 한번씩 교사 따귀를 때려도 될지 모르겠다. 혹은 그 녹취물을 들고 학부모가 학교에 쳐들어와서 교장에게 빨갱이 짤라라 악악 거린 다음 그 교사 따귀를 때려도 될지 모르겠다.

권위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그것은 믿음에서 생긴다. 교사 개인을 믿고, 또 그 교사들의 조직을 믿고, 커뮤니티를 믿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같은 독재국가가 아닌 다음에야 학교는 이 믿음의 바탕에서 운영된다. 학교에는 출퇴근부가 없다. 하지만 제멋대로 지각과 땡땡이를 치는 교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학교에서는 설사 형식적이라 할지라도 교사들의 각종 위원회들이 있다. 상명하복의 다른 공무원들과는 상당히 다른 조직운영 방식이 통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일반직 공무원들 혹은 대기업 사원들의 직장생활을 경험하면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이때 이런 교사들의 처우에 대해 "당연하다"라고 여기는 사회와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사회는 교사의 권위가 다르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느끼는 사회였고, 어느 정권이든 교사 처우를 개선한다는 정책을 내면 다 환영받았다. 한국을 소개하는 서양인들의 책인 론리 플래닛 한국 편에서도 한국에는 교사를 존경하는 문화가 있으며 그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라고 써 있을 정도다. 걸핏하면 한국 교육을 부러워하는 오바마도 아마 이런 판타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학생들은 교사에게 처맞거나 벌을 받을 가능성 때문에 교사를 두려워하고 복종한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사에 대한 존경심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맞거나 벌을 받아도 대들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억울하게 맞거나 벌을 받아도 "선생님도 사람이니까..." 혹은 "이 선생님이 좀 오해가 있는거지...." 이러면서 말이다. 그러니 체벌은 교사 권위의 원천이 아니라 교사가 권위가 있기에 용인되었던 것이다. 학생인권과 교권을 서로 제로섬으로 보는 관점은 그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다음은 교사의 정치중립성, 편향성 하여간 그 주제로 넘어가자. 나는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교사는 없다고 본다. 교사들도 당연히 선거에 나가서 누군가에게 투표 할 것이 아닌가? 그때 그 투표 기준에 좌든 우든 어떤 이념적 성향이 영향을 줄 것이 아닌가? 그러니 교사도 당연히 좌든 우든 편향될 권리가 있다. 나는 대놓고 말한다. 나는 좌파라고. 그렇다면 교육의 정치중립성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그것은 첫째, 학교가 좌파든 우파든 자유로운 공간이 될때 저절로 확보된다. 어떤 교사는 좌편향일 수 있고, 어떤 교사는 우편향일수 있고, 또 다른 교사는 중도파일수도 있다. 어차피 학생은 다양한 교사를 만나게 되며, 그 교사들 마다 다양한 정치편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정치편향을 가진 교사들과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것이 바로 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정치중립성이다. 교사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성향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단, 이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며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고서 해야 한다.
법으로, 교과서로, 심지어는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몰래 녹취로 좌편향의 교사들만 따로 찍어서 감시하는 학교라면 이건 교육의 정치중립성을 포기한 것이다. 더군다나 교육의 정치중립성의 보루가 되어야 할 교과부에서 일부 편향된 우익단체들의 요구에 덩달아서 신고센터를 운영하겠다는 파쇼적 발상을 보이는 나라에서 정치중립성은 사라지고, 단지 현 정권에 대한 편향된 충성만 남을 것이다. 이게 민주국가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나?

둘째, 학생들의 반론권이 보장될때 교육의 정치중립성이 지켜진다. 어떤 교사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을때, 여기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을 말할 권리가 학생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폭력이다. 나는 좌파든 우파든 이런 식의 교사는 경멸한다. 하지만 학생이 자유로이 반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교사들은, 특히 어떤 쪽이든 견해가 있어야만 수업이 가능한 사회, 정치, 윤리 교과의 교사들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것이 바람직하다. 또 만약 현재 언론과 방송이 특정 편향의 견해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면, 그 반대되는 견해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정치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교사의 의무다. 물론 학생들의 반론이 보장된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서 당장 모순이 생긴다. 학생들이 교사에게 반론을 제기한다? 이게 학생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사가 학생의 신체를 철썩철썩 때릴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가능할까? 결국 편향되지 않은 학교는 학생들의 인권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학교에서나 가능하다. 만약 학교인권조례가 지켜지지 않고, 거기에다가 교사들의 언행이 감시받으며 "사상검증"이라는 파시스트들이나 할 수 있는 말들이 거리낌없이 횡횡하는 분위기라면, 학교는 완전히 우편향된 교육만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왼쪽을 기웃거리는 학생들은 싸대기를 맞거나 무자비한 기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여겨지는 교사들을 지목해서 학생들로 하여금 이지메를 가하게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권침해를 운운하는 것은 코메디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비전문가들을 동원해서 교과서도 멋대로 뜯어 고치고, 모든 역사교사들이 입을 모아서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들은척도 안하면서 교과서 기상천외한 집필기준을 밀어부치는 반교권적인 교과부, 심지어 안철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교과서를 다시 쓰라는 명령을 내릴 태세까지 보여주는 교과부가 학생들을 패지 못하게 하니 교권이 침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코메디다.

이렇게 교권을 떡을 만들어 놓고서 체벌을 허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체벌 섯불리 했다가 학생들한테 다굴 당하는 교사일 것이다. 장담하건데 그렇게 다굴 당하는 교사는 주로 우편향 교사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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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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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