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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는 국익의 상승 손상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어제 한미 FTA비준안이 날치기 통과되었습니다. 시민들이 전교조 같은 진보적(?)인 교육단체에게 바라는 것은 촛불 숫자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가르침이겠죠. 그런데 전교조는 아직까지 성명서도 논평도 한 장 나가지 못하고 있네요. 그래서 전직 전교조 부대변인인 제가 대신 합니다. 정봉주 전 의원, 김용민 전 교수... 요즘은 전직이 현직을 능가하는게 대세인가 봅니다.

(이하 논평)

11월 22일 오후, 한미 FTA 비준안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을사늑약, 한일협정 이후 외국과의 조약으로는 역대 세번째 날치기다. 그나마 앞의 두번은 일본 제국군대와 계엄령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물리적 압박이나 있었지만, 이번은 이른대 자유롭고 민주적인 대한민국 하에서는 최초의 날치기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기다렸다는듯이 신문과 방송에서는 앞으로 국운이 훨쩍 피어날 것이라며 축포를 날리고, 가담한 의원들은 마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양 거들먹 거린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절규하고, 경찰은 그들을 향해 물포를 날리다. 하지만 교육자 입장에서 흥분하거나 감정적 대응하는 것은 금물이기에 나는 차분히 그 의미와 득실을 따져보기로 한다.

나는 자유무역과 개방을 지지한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민족주의자에게는 국익을 지키는 보호무역이 멋져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보호무역은 결국 국가가 자국 자본가들의 독과점을 보장해주는 일에 불과하다. 그 피해는 국내 기업의 제품을 더 좋고 저렴한 외국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곱절의 값을 주고 구입해야 할 이 땅의 민중들이다. 따라서 나는  FTA를 하면 국익이 손상되고, 나라가 망하고 하는 등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어찌 보면 기분나쁠 수 있지만 ISD같은 조항을 나라 팔아먹은 독소조항으로 보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서로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이 최대한 지켜지도록 어떤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식이라면 WTO도 국제사법재판소도 다 주권 침해로 거부해야 한다(하긴 이 정부는 국제연합 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주권침해로 간주하기도 했다.). 오히려 ISD에 자꾸 집중하면 공연히 민족감정만 자극되어 한미 FTA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만 한다.  어쨌든 정리하면 FTA, 자유무역이 대세인 것은 사실이며, 개별국가의 주권을 제약하는 국제적인 약속이행 장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자유무역 일반,  FTA 일반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의 한미 FTA는 이런 일반론을 벗어나는 보다 밀접한 삶과 정치의 문제가 들어있다.

먼저 이번에 큰 일했다고 하는 FTA찬성파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이들은 이로써 대한민국의 경제영토가 넓어져서 국익을 크게 신장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대파들 역시 국익 손상을 들어 반대하고 있는 목소리가 높으니 찬성과 반대 모두 국익을 내걸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실은 나라에 이익을 준다 만다 하는 논란 자체가 FTA본래의 의미와 무관한 것이다. 어쨌든 날치기까지 감행한 것을 보면 이걸 당장 안하면 뭔가 큰 손실이라도 날 것 같으니 그쪽 논리를 좀 들어보자. 이들의 주장은 크게 셋이다.

1) 개방 하지 않으면 북한이나 미안마 처럼 고립되어 우리 모두 거지꼴을 못 면할 것이다. 2)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맹렬히 추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경제 체질을 선진화(미국화)해야 한다. 3) 한미fta는 우리가 미국에게 열어주는 만큼 미국이 열어주기 때문에 윈윈이며 우리 경제의 구조개선의 원동력이 된다.

결국 개방만이 살길이란 주장인데, 그럼 대체 무엇을 개방, 무엇을 폐쇄라고 하는가부터 따져보자. 그것은 국내 기업과 동종의 재화와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들어올때 (수입될때) 그것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행위는 크게 수입품에 직접적으로 세금을 때려서 가격을 올릴수 밖에 없게 만들거나 유통을 은근히 짜증나게 만들어 거래비용을 높여 가격을 올리게 만드는 행위가 있다. 전자를 관세장벽, 후자를 비관세장벽이라고 한다.

물론 북한이나 미안마가 고립폐쇄경제를 유지하면서 완전히 몰락해 버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과 한미fta를 연결시키는 것은 오버다. 한국 경제는 이미 상당히 개방화된 경제다. 얼마나 개방되었는지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국제 핫머니들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돈놀이하고 먹튀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장난질을 알면서도 문을 닫지 않는것은 그런 놀돈을 막으면 건전한 투자도 막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개방의 이득을 보고 있는 셈이다.
또 더 간단히 시장에 한번 가 보라. 수입품이 국산보다 터무니 없이 비싼지, 그리고 수입품을 구매하기 위해 뭔가 귀찮고 짜증나는 절차나 없는지 등등을 따져보자. 애플이나 htc제품을 지금 삼성이나 엘지 제품보다 오히려 더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 물론 아무 차별없이 같은 매대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미 우리 식탁에는 "우리 농산물을 먹읍시다"라는 호소가 들릴 정도로 외산 농산물이 가득하다. 물론 차별없이 판매되어 국내산 행세를 감쪽같이 해도 될 정도다. 한국 경제는 이미 충분히 개방되어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소국개방경제" 모델을 적용한다.

그럼 이제 우리 입장이 아니라 미국 입장에서 보자. 미국은 지금 십수년에 걸쳐 무지막지한 경상수지 적자를 누적해왔다. 그리고 그 적자의 대부분은 한중일 삼국에게 졌다. 세계경제 전체 차원에서 이런 불균형은 해소되어야 한다. 지금 유럽 여러 나라들이 독일을 홀겨보고 있는 것도 바로 그 까닭이며, 할 수 없이 독일은 1000억 유로를 게워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금 동아시아의 대미 누적 흑자는 상상 이상이다. 그 결과 중국이 3조달러, 일본이 1조달러, 대만이 4천억, 한국, 싱가포르, 홍콩이 거의 3천억 달러씩을 남겨서 비축하고 있다. 미국보다 동아시아에 달러가 더 많을 지경이다. 미국이 게워 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며, 국제 경제 균형을 위해서도 이런 불균형은 해소되어야 한다.

이런 불균형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면서 경상수지 흑자를 통한 GDP상승을 꾀했기 때문이다. 무역수지란 것은 누군가가 흑자면 누군가는 적자일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흑자의 공통된 적자 상대는 미국이다. 이젠 미국이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라?" 할 타이밍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지금 FTA찬성론자들은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니 FTA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다. 지금 한미 FTA의 주제는 한 마디로 미국이 "너희들 그 동안 수출로 먹고 살았으니, 이제 나도 수출로 좀 먹어 보자"다. 그러니 이 FTA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 유리하도록 진행될 수 밖에 없고, 미국 입장에선 그게 공정한 것이며, 사실 객관적으로도 그게 공정하다.

그러니 책임 있는 정부라면  "이로써 수출길이 열렸다"라고 뻥을 칠 것이 아니라(미국은 애초에 수입문을 높이 세운 나라도 아니어서 더 열만한 수출길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상대국도 아니다), 이제 "수출만이 살 길" 경제 모델이 한계에 이르렀으니 새로운 경제 성장 모델을 찾아야 함을 역설해야 한다.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패러다임의 끝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균형을 해소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문제다.  미국이 강제로 달러를 뺏아갈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미국의 수출이 증가하고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을 통해 자연스럽게 맞춰져야 할 일이다. 물론 남유럽, 동유럽 처럼 독일, 프랑스로부터 원조 형식의 돈을 받아서 균형을 맞출수도 있겠지만, 미국이 그걸 받아들일 리는 없으니...

문제는 미국이 동아시아 시장에 내다팔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산 제조품들은 한국산, 타이완산과 가격이 같거나 좀 싸도 안 팔릴 것이다. 한 마디로 구리니까. 현대차와 포드차가 같은 가격으로 나왔을때 누가 굳이 포드차를 사겠는가? 또 애플, 델, HP같은 첨단 정밀 제품들은 이미 대만이나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한미 FTA를 하건 말건 상관이 없다. 그러니 미국에서 직접 내다 팔 수 있는 상품들, 그리고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품들인 투자금융, 곡물, 육류, 의료, 바이오, 의약, 영화, 음악, 지적재산권 분야의 개방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료, 보건 분야는 우리나라에서 상품이 아니라 공공서비스로 되어 있고, 농업 분야는 정치적인 특수성이 적용되는 분야이며, 투자금융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국가의 제제가 필요하다고 인정되고 있는 분야다. 미국은 결사적으로 열어야 하지만, 그 분야가 우리나라에는 절대로 열수 없는 공공서비스인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열어젖힐 분야는 이 분야들 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가 공공서비스로 의료, 보건, 대중교통, 발전, 수도 등을 운영하고, 거시경제 건전성을 위해 투자금융을 규제하는 것을 "무역외 장벽"으로 간주하며 이를 해소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이 우위를 가지고 있는 특허, 엔터테인먼트 등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강화하여 일종의 지대소득을 올려서 달러를 회수해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결국 한미 FTA는 무역협정이라고 이름은 되어 있으되, 우리나라의 정책, 법률까지 무역외 장벽으로 몰아붙여 그 개정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다. 즉, 정치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는 그 동안 많이 먹었다. 그러니 이 불균형을 해소하여 미국에게 달러가 흘러들어가게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80년대때 일본 나카소네 총리가 국민들에게 "제발 미국 제품들 좀 구매해 달라"며 눈물로 호소한 것은 미국을 위한 매국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애국적 행위였다. 문제는 이게 흘러들어가는 방식과 속도다. 바로 여기에 한미 FTA의 쟁점이 있는 것이다.
그 속도와 방식은 그 동안의 수출주도 모형에 의존한 한국경제가 연착륙해서 무역수지 불균형을 이용하지 않은 건전한 경제성장 패러다임을 준비할 만한 여유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이 개방을 요구하는 공공서비스를 국민들의 삶의 질을 위해 정부가 최대한 버텨 주어야 한다. 이건 정치적인 문제다.
물론 받아가야 할 미국 입장에서는 당장 폭포수처럼 자기들에게 달러가 회수되기를 바라겠지만 말이다. 미국이 폭포수로 받아가면 한국은 엄청난 침식작용에 시달리겠지만, 미국이 그걸 고려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도 지금 제 코가 석자다.

그런데 도리어 미국에게 폭포수가 되는 상황을 마치 한국에게 큰 이익이라도 되는양 거꾸로 선전하면서 폭포수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해 주고 싶어서 앞장서는 한국 정치가, 한국 정부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국익을 위해 개방하면 안된다는 주장이 시대착오적이라면 더 넓은 수출길을 위해 한미FTA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제 체질을 미국화(선진화)해서 중국을 따돌린다는 주장은 지금 미국 경제체질을 조금이라도 관심깊게 들여다 보면 무지한 것인지 뻔뻔한 것인지 구별이 안되는 주장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부가 한미 FTA로 인해 달라지게 될 국민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고민해 보았는지, 캐어 물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국익이 아니다. 국민들의 삶이 요동치느냐 마느냐이다. 장기적으로 아무리 엄청난 이익이 보장된다 할지라도 당장 10년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질 가능성이 있다면 그 이익은 유보되어야 한다.  하물며 한미 FTA는 그동안의 경제성장 패러다임과 공공서비스, 공공정책 전반에 대한 손질을 요구하는 사실상 개헌에 가까운 조약이다. 이걸 공론도 없이 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막연하게 수출해야 먹고살지 식의 억견에 의존하여 통과시키는 국회는 도저히 민의의 전당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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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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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