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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을 보내며, 2012년 교육혁신의 결실을 꿈꾸며

2011년은 저에게 정말 역동적인 한 해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역동이 결국 곽노현 교육감으로부터 시작하여 곽노현 교육감으로 마무리 되는 것 같습니다. 본래 저는 2008년 전교조 부대변인직 사임과 함께 진보진영의 공식적인 조직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로 저술과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작업이 브레이크가 걸렸는데, 언제나 저술과 연구를 함께하는 절친이 곽교육감에게 차출되어 교육청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레 서울시 교육청에서 오가는 일들을 들어 알게 되었고, 기대와 달리 계속 삐걱거리고 있는 진보교육감의 행보에 몹시 불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곽교육감의 정책을 비판하고 방향전환을 권고하는 글을 블로그에 게시한 뒤 교육감의 트윗으로 날렸고, 그때부터 저의 운명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곽노현 교육감의 부름을 받았고, 말로 하는 비판이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니 그 말에 책임을 지라는 요청과 함께 이런 저런 사업에 TF로 위촉되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원업무정상화" 사업이 핵심적인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곽교육감의 혁신사업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육감은 교육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교사가 진보적이고 어떤 교사가 기회주의자며, 보수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결국 장학사들이 구성한 TF에게 일을 맡길수 밖에 없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교육자들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기 때문에 절대 곽감이 원하는 정책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이 와중에 역시 교사 출신이 아니라 시민활동가 출신인 정책보좌관들은 학교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들을 언론에 터뜨리고, 결국 조중동의 빈축을 사는 상황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교조가 장학사가 추천하는 교육계 인사에 맟설수 있는 인사들을 제공하지 않으면 곽감의 개혁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곽감이 방향을 잡더라도 전교조가 그 추진력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3년만에 전교조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 분들 역시 교육혁신의 희망을 구현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여전히 동지였기에 3년간 정말 문자한번 안 보냈던 괘씸한 후배지만 도리어 힘을 보태준것을 고마워하며 따스히 맞아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5월부터 서울시교육청과 전교조서울지부를 오가는 정신없는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원업무정상화를 중심으로 한 학교체제 혁신안을 다듬어 나갔고, 학교장평가, 교원평가 등도 교과부의 압박이 있지만, 적어도 교육감 재량권 한계 내에서 최대한 지킬것을 지킬 방안을 같이 고민했습니다. 오세훈의 뻘짓에 맟서서 어떻게 무상급식을 지킬것인가도 같이 고민했고, 그 밖에도 수많은 교육혁신, 교육현안에 대해 함께 고민했습니다. 처음 만났을때는 답답함과 불안함이 느껴졌던 곽감에게서 이제는 자신감과 확신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실히 가시화 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교육이 진보의 큰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정말 절묘한 타이밍으로 곽감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진보진영에서는 곽감을 도마뱀 꼬리처럼 자르고 가려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저는 곽감이 법에 의해 구속되는 것 보다 도덕적으로 단죄되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법적인 판단이야 법관에게 희망을 걸어볼 일이나(사실 믿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 내부에서 도덕적인 판단은 신중해야 한다면서 SNS와 인터넷 상에서 혈전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진중권, 조국 같은 진보진영의 얼굴마담들의 섵부른 꼬리자르기에 일침이 가해졌고, 법적 선고와 무관하게 곽감은 도덕적으로는 진보진영의 용서를 받았고, 지지를 회복했습니다. 만약 곽감이 도덕적으로 복권되지 않고 진중권 주장처럼 부도덕한 내침을 당했다면 아마 이후 박영선, 박원순의 단일화도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나경원 시장님을 영접해야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저의 2011년은 이래저래 곽노현 구하기로 점철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곽감은 풀려나지 못했지만, 노골적으로 가해오는 수꼴들의 서울교육혁신 되돌리기 공작에 맟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인터넷과 SNS뿐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계속해서 프레임을 우리쪽으로 가져오고 저들을 고립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나는 것 두가지가 있다면, 나꼼수과 곽감을 계속 공격하던 진중권의 논리를 완전히 떡실신 시킨 것(그를 은퇴시킨 사람들 중 저도 분명 포함될 거라 생각합니다)과 교사들의 수업을 녹음해서 매카시즘 반공선동 도구로 쓰려 했던 뉴라이트와 조중동의 추악한 짓거리를 폭로해서 무력화 시킨 일입니다. 몇몇 블로거와 시민기자의 힘만으로 저 거대한 집단과 싸워 이긴 것입니다.

동요하던 곽감 진영의 사람들은 곽감 부재중인 상황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모였으며, 전교조, 교육청파견교사, 시의원들을 중심으로 다시 전열을 재정비 했고, 끈질기게 기존의 교육혁신 정책을 밀어 붙였고, 반동시도를 저지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2011년 하반기, 저와 저의 동료들의 삶은 한 마디로 "결사전"이었습니다. 교육관료들은 교육감이 부재하자 하기로 되어 있던 사업들에 대해 사보타지를 시작했고, 그걸 저지할 유일한 방법은 "그럼 우리가 다 하겠다" 하고 나서는 것 뿐이었습니다. 다들 일인 오역씩 해야 했고, 그래서 막상 일이 다 되려고 하면 마지막에 나서서 코빠뜨리려는 교육관료들과 치고받아야 했지만 누구 하나 힘빠지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곽감의 개혁정책은 그가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물러섬 없이 추진되었습니다. 곽감의 교육혁신을 저지하고 되돌리려던 저들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교원업무정상화는 모든 교장들에게 공표되었고, 인권조례는 통과되었으며, 혁신학교 등 각종 혁신 사업들은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대빵 조차 2012년 서울교육청 4대역점사업을 학교혁신과 관련된 내용을 채워야 했습니다. 이제 서울교육의 혁신 물결은 되돌릴 수 없을겁니다.학생인권조례에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이주호의 요구에 이주호가 아바타로 박아 넣은 부교육감이 미적거리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렇게 2011년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옥중의 곽교육감에게 2011년은 교육혁신이 무사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한 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2012년은 그 교육혁신이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 그런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가급적 그 선언은 1월 6일, 교육감이 직접 하시는 것이 가장 좋겠죠.

그리고 9월 이후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서울의 교육혁신 세력들을 바라보았던 여러 민주진보 진영 분들에게 우리가 이 고난을 이겨내었듯이, "쫄지 말고" 또 "졸지 말고" 우리가 믿고 있는 바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기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복잡한 2011년을 보낸 저는 2012년에는 가능하면 다시 교사와 학자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교육혁신의 배경이 되어 줄수 있는 다양한 이론들을 생산하고, 또 그런 일을 할 진보교육학자들의 네트워크를 확산시켜 볼 생각입니다. 아울러 수꼴들에 의해 오염된 교과서들을 대체할 다양한 학습용 도서들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해 볼 생각입니다. 이거, 너무 일이 많나요? 하지만 이렇게 벅차게 새해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12년 교육혁신 완성의 원년을 함께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2012년을 몇 시간 앞두고서...

잘 읽으셨으면 저의 지속적인 포스팅을 위해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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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