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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도사 보내고, 곽노현 만나고, 박명기의 상처 듣고

오늘 참 법원에서 뱅글뱅글 돈 하루였습니다. 1990년에 그 이름도 유명한 집회와 법률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서울지검에서 여러 시간 보낸 이래 이렇게 장기간 서초동 법고을에 있어 본적이 없습니다.

1. 봉도사를 보내다.

우선 11시 50분- 13시까지는  봉도사를 차가운 감방으로 보내는 웃지만 기분 엿같은 행사를 했습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봉도사를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저들의 손에 넘겼습니다. 서울구치소 수번 77이랍니다. 가뜩이나 추위도 타는 분인데 참 걱정입니다.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꽃비를 맞으며, 꽃 길을 밟으며 감옥에 간 사람은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그나 저나 김어준 총수가 한나라당 프락치인게 밝혀졌으니 이를 어쩌죠?

2. 법정에서 쫓겨나다

그리고 13시30분-14시 30분까지 식사를 하고 이번에는 서울중앙지법 서관 417호를 찾아 갔습니다. 여기서는 무려 88명이나 되는 피고가 있는, 그런데 이 중 최고 구형이 6개월에 불과하고 절반이 벌금 50-300만원인 참 황당한 재판이 열리고 있습니다. 민노당 후원금 교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교사나 공무원이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은 못해도 후원금은 낼 수 있었던 시절에 상당수 전교조 교사들이 민노당에 월 만원 정도의 자동이체를 했습니다. 그런데 2006년엔가 그게 불법으로 바뀌었습니다. 관심 많은 분들은 알아서 끊으셨지만, 대부분 소액 자동이체인 분들은 그런지 만지도 모르게 몇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 정부들어 그걸 다 끄집어 내어 엄청난 중범이라도 범한양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에 몇백만원씩 몇천만원씩 처먹인 교장들은 모른척 하고, 기껏 3,40만원 그것도 과실로 납부한 교사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피고가 88명이나 되다 보니 방청석이 모자랍니다. 법정 분위기도 상당히 억압적인데, 정위가 오더니 뭐라고 뭐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결국 쫓겨나듯 나오고 말았습니다.

3. 참모들에게는 너무 무서웠던 곽노현

자 이제 바로 근처 311호 법정에서 곽노현 교육감의 공판이 있습니다. 아까 정봉주 의원 옥에 들여보내고 울분을 토하던 이재화 변호사, 이번에는 박명기 교수 변호하러 허겁지겁 들어옵니다. 그리고 공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판 이거 참 이상합니다. 판결이야 어찌 나오건 김형두 판사 스타일 자체는 정말 멋집니다. 우선 개정, 폐정때 다른 법정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없습니다.  피고인이고 변호사고간에 말하고 싶은만큼 말하게 하며, 자기가 이해가 안가면 재삼 확인해 가면서 충분히 듣습니다.

곽노현 교육감도 참 대단합니다. 1000쪽이 넘는 검찰 조서를 아주 외었습니다. "수사기록 811쪽 하단과 812쪽 상단에 보면" 이렇게 진술하자 검사들까지 기막혀 합니다. 오늘 주로 다루어진 내용은 단일화 과정에서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그 과정에서 교육감이 그 사실을 인지하였는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곽교육감이 기소된 2호가 아니라 1호에 대한 사실이긴 하지만 댓가성 입증을 위해선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사퇴한 후보에게 사퇴한 데 대한 댓가를 목적으로 금전을 준 것을 처벌하는 규정이기 때문에 사퇴과정에서 어떤 합의나 거래를 알고 있었느냐는 매우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런데 나온 진술들이 아주 가관입니다. 다들 범같은 곽노현의 불호령을 두려워해서 박명기측 양재원에게 7억이건 5억이건 아무도 곽노현에게 말을 안한 것입니다. 양재원도 곽노현에게 그 내용이 전달될 것이라고 기대도 안한것 같습니다. 박명기 후보는 지지자나 참모들에게 돈을 빌려서 선거를 치른듯 하니, 이들 참모들끼리 비용보전을 놓고 설왕설래를 한 걸로 보입니다. 정작 후보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더군다나 곽노현측 참모들은 이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것 조차 곽노현에게 말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박명기측 참모들이 추궁하자 서로서로 미루고 도망다니기 바쁩니다. 곽노현 교육감은 이걸 "나가 자빠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건 완전 해프닝입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인데, 교육감은 1조 5천억원의 사업비를 집행할 수 있고, 이 중 150억원은 용처를 밝히지 않고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곽노현 교육감은 이 150억을 가지고 문예체 전문강사 지원, 교사들의 학습 동아리 지원에 사용했습니다. 어쨌든 교육감 말이 "만약 진짜 금전 거래를 하고 단일화를 하는 그런 교육감이라면 이 150억을 가지고 얼마든지 수익사업을 몰아주는 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지, 왜 직접 자기 돈을 쓰겟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실제로 박명기측 김**라는 참모가 상당한 규모의 학교현대화 사업이라는 사업안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만약 이게 15억짜리 프로젝트면 이거 따 내면 2억정도 리베이트를 먹을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 박명기 후보에게 댓가를 주고자 했다면 3년에 걸쳐 대형 프로젝트 몇개 밀어주면 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곽교육감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다급해진 김성오 선대본부장은 자기가 곽노현의 20년 지기이니 박명기측 인사가 아니라 자기가 급하게 일에 필요하다고 하면서 졸라보겠다고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우습기까지 합니다. 박명기측 참모들은 비용보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곽노현측 참모들은 곽노현에게 그런 말은 엄두도 못냅니다. 그러니 하다 하다 나온 말이, 너희한테 돈 주란 말 하면 대박깨지니까, 그건 싹 감추고 나한테 돈 달라고 졸라볼게. 내가 곽노현 친구니까 좀 주지 않겠어? 그럼 그거 받아서 니들 줄께. 이렇게 까지 나온겁니다. 정말 돈문제에 관한한 곽교육감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4. 외로운 남자 박명기 폭발하다

상황이 이쯤 될때 박명기 교수가 갑자기 재판장에게 말좀 하자고 합니다. 이 독특한 재판장은 말해보라고 합니다. 뭐 이런 재판 처음 봅니다. 아, 박명기 교수 폭발합니다.
"교육청에서 중요한 인사가 있을때 마다, 사람들은 내가 단일화 위해 사퇴한 후보니까 뭐 좀 알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곽노현은 일언반구 나한테 상의한 적이 없다."
"혁신학교 등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나한테 물어본다. 그런데 난 곽노현한테 자료집 한 번 받아 본적 없다."
한마디로 "난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된 이래 철저히 소외되었다. 정책 협의도 없었고, 아예 어떤 정보도 받아보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수가 있느냐?"

아, 후보 사퇴한 뒤 박명기 교수는 정말 외로웠던 것입니다. 단일화를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책자문위 한번 못 불려가고, 자료집조차 못 받아보고, 측근들도 교육청에 전혀 진출하지 못하고, 한 마디로 완전히 찬밥, 완전히 개밥의 도토리가 되었는데, 주변에서는 후보 사퇴해 주었으니 뭐 좀 있을 것 아니냐 하면서 자꾸 줄을 대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반문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게 상대 후보에게 댓가를 받기로 하고 사퇴한 후보의 처지일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건데, 이렇게 찬밥 신세를 1년이나 감수할 수 있었을까? 곽노현이 박명기를 이렇게까지 냉대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박명기에게 신세 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정황이 졸라 추정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박명기 교수가 외로움의 울분을 토하고 나니, 김형두 판사 "29일에 합시다."라며 재판을 중지시킵니다. 그러면서 자꾸 재판이 늦게 끝나면 피고인들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느냐며 엉뚱한 걱정까지 합니다. 사실 보석 인용했으면 그런 걱정 안해도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곽교육감의 모습은 건강해 보였고, 그 깔대기 내공은 법정에서도 변함 없었습니다. 곽교육감 깔대기는 봉도사 깔대기와 달리 묵직합니다. 한번 맞아보시면 놀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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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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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