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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전교조의 옛 사랑의 노래(1): 첫만남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지나간 옛사랑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별을 각오하고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전교조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먼저 추억을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이 과정이 다 끝나면 아마 칼을 꺼내 들지 모릅니다.

나는 1989년에 전교조와 처음 만났습니다. 만난지 22년이 되었으니 내 인생의 절반이 전교조와 함께 흘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때는 교사가 아니라 사범대학생이었고 주 역할은 전교조 선생님들의 집회때 안전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모이면 바로 경찰들이 잡으러 왔기 때문에 007작전처럼 대학 안에서 모였으며, 학생들이 무기를 들고 경찰과 대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9년 어느 가을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아크로 광장에 다른 볼일이 있어 온 것 처럼 1000여명의 교사들이 어슬렁 거리고 있었고, 오후 여섯시에 사이렌 소리와 함께 총학생회장이 "지금부터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식을 시작하니 학우 여러분들은 빨리 모여서 선생님들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환성을 지르며 모여 들었고, 저는 눈물까지 뿌렸습니다.

물론 경찰들은 교문을 에워쌌고, 우리는 교문 앞에 폐타이어에 불을 붙여 바리케이트를 치고, 화염병,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체 이들을 저지했습니다. 아마 요즘 세대에게는 무슨 외국 영화 같을 겁니다. 심지어는 가스통(음. 이건 우리가 원조였군. 하지만 부탄가스통)까지 준비했습니다. 경찰들이 교문을 에워싼 이유는 1000여 선생님들 중 이미 전교조 주동자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이부영(현재 교육의원이시던가?), 이수호, 윤영규 같은 분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분들을 학교밖으로 안전하게 피신시켜야 했습니다.

서울대학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사실 피신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시간이 밤 10시라는 것이죠. 경찰들이 볼 수 있으니 랜턴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야 했죠. 저와 10여명의 학생들이 쇠파이프와 앵글을 들고서 세분 선생님을 호위해서 산길을 탔습니다. 도중에 산길에 잠복한 경찰 두명이 있었지만 쪽수에서 밀렸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고, 우리는 연락을 못하게 무전기를 압수했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산길을 넘어 세분을 피신시킨 다음 서로 몰골을 보자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랜턴도 없이 밤에 산길을 넘어 기어가다시피 길을 내며 갔으니 옷은 찢어지고 얼굴은 흙탕이 되고...하지만 당시 뜻 있는 사범대학생들에게 전교조는 거의 신앙이며 미래였습니다. 전교조에 들어가기 위해 교사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2년 뒤(음. 학점 꼴아서 1년 더 다녔습니다) 기적적으로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발령이 늦어져서 은평구에 있는 구산중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먼저 부임했습니다. 부임하자마자 그 어색한 양복을 입고 제발로 찾아간 곳이 전교조 서울지부 중서부지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누가 권유하지 않아도 제발로 찾아온 젊은 교사들이 꽤 많았습니다. 내가 간날만 해도 장신* 교사가 제발로 가입하러 와 있었으니까요.  사무실에는 해직교사인 고창*, 김명*, 권오* 선생님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매주 한번씩 전남*, 양병*, 이해*, 이규* 등 저보다 서너살 많은(그땐 무척 늙어보였는데, 사실 다 젊은이...) 등도 찾아와서 의기투합하곤 했습니다. 꿈이 있었고, 이상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고, 우정이 있었습니다.

신촌 로터리에 거리 서명전을 나가기도 했고, 선전전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교조는 불법조직이었으나 이미 도덕적인 권위를 확고히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크가 가지는 권위는 대단했고, 경찰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전교조 해직교사"라는 말은 또 하나의 직책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저는 중서부의 떠오르는 활동가로 많은 아낌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20여명의 선생님들이 전교조 후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고, 특히 10여분과는 주기적으로 모여서 여러가지 학교현안, 교육현안을 토론하고 같이 책을 읽고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진보교육감이 돈을 줘가면서 학습동아리를 꾸려도 "머리아픈 책 말고 재미있는 책" 보자고 뺀질대지만, 그때는 자기 돈 써 가면서 머리아픈 사회과학책들, 프레이리 같은 교육철학자들 책 읽으며 고민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때가 전교조가 가장 힘이 세었던 시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25살 풋나기 조합원인 저에게도 어렴풋이 비추이던 불길한 조짐이 있었습니다. 가끔씩 선배들이 기존안, 비판안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쪽 사람들, 이쪽 사람들이란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당시 중서부 지회는 비판안쪽, 그러니까 강경파의 목소리가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저쪽 사람들을 백안시하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쪽 사람인 김종* 선생님이나 저쪽 사람인 이수호(워낙 유명인사니 실명 사용) 선생님이나 고루고루 오시면 환영받았고, 간혹 언쟁이 벌어지곤 했지만, 신촌시장에 있는 전남식당이라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다 풀고 갔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제 기억속에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전교조입니다. 제가 아직까지도 전교조의 끈을 놓지 못하고 미련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는 것은 이 첫사랑의 기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과연 돌아갈수 없는 전교조의 청춘의 한 시절이었을까요? 지금 전교조의 모습은 세월에 장사없는 그 모습인가요, 아니면 다만 병들고 고장난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992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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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