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학교폭력 청소년자살 문제에 대한 부화뇌동을 경계한다(1)

먼저 어린 자녀를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잃어버린 부모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 조의가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님을 유념하기 바란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몇몇 충격적인 보도가 나간 이후 온 사회가 학교폭력과 청소년 자살문제에 거의 흥분상태에 있다고 생각되어서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냄비 끓듯이 반응하고, 학교와 교사들만 난타한 다음에 공연히 학교에서 작성해야 하는 면피성 장부와 위원회만 잔뜩 늘려 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는 것을 어디 한 두번 보았는가? 그러니 이런 일이 발생하면 우선 다음과 같은 점들을 따지고 나서 흥분을 하건 질타를 하건 해야 한다.

1) 최근들어 심각해진 문제인가, 아니면 매우 고질적인 문제인가? 즉 늘 체계적으로 발생해오던 문제인가 아니면 어떤 특수한 조건에서 발생한 문제인가?

만약 전자라면 이건 교육과 청소년관련 제도의 체계적인 재조정 없이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심지어는 사회 전반적인 재조정까지 필요할 수 있다. 반면 후자라면 해당되는 부분만 개선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2) 비행 혹은 범죄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니면 일종의 병리현상인가?

전자라면 이건 특별히 나쁜 놈들과 특별히 약한 피해자의 문제로 매우 특수한 일이다. 이건 가해자들을 일벌백계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후자라면 조금 복잡하다.
우선 병리가 기질적인(생물학적인) 문제라면, 즉 기질적으로 가학적이거나 우울증이 심하거나 하다면 이건 해당 질병의 발병률 만큼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환자를 빨리 발견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길이 해법이다.
하지만 이 병리가 심리학적 문제라면 이건 누구나 한 끗발이면 들어설 수 있는 길이다. 즉 댁의 자녀도 언제든지 집단 괴롭힘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가해, 피해자의 부모, 가족 상황에 대한 연구,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심리적인 자극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 학교에 대한 자료는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너무도 많은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어서 가족연구 자료가 많지 않다.

사실 나는 심정적으로는 집단병리현상 쪽으로 보는 편이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1)이건 2)건 간에 사례를 좀더 면밀히 분석하고 객관적인 데이터와 자료를 수집한 다음에 대책을 세우건 질타를 하건 해야 한다. 특히 매우 흥분된 상태일 가능성이 큰, 피해 및 가해자의 부모의 발언들을 무차별적으로 게재하는 선정적인 언론의 행태, 그리고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섵부르게 대책을 발표하는 교과부나 교육청의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걸 근거로 학생인권조례를 공격하며 교권강화를 요구하는 보수집단의 견강부회는 철저히 비판받아야 한다. 소위 진보적인 교육단체들 역시 이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은 충분히 표시하되, 이것이 특별히 더 심각해진 일종의 사태인 것처럼 상황을 호도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집단괴롭힘이나 학교폭력, 일진회, 청소년 자살 등등은 내가 처음 교직에 들어선 1992년에도 거의 지금 정도의 강도로 잊을만하면 한번씩 터져나왔던 이슈다. 최근의 어떤 특별한 요인이 이것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1992년에도 지금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야 한다.

사실 그리 크지 않은지 만지도 데이터를 분석해 봐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데이터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가장 공신력이 있는 "청소년백서 2011"에조차 집단 따돌림, 학교폭력 관련 통계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비행 청소년 범주로 취급하면서 소년범 재판, 교정 정책에 대한 소개만 잔뜩 나올 뿐이다. 바로 여기서 과제가 나온다. 책임있는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장 질타할 대상을 찾거나 섵부른 대책을 내어 놓기 전에 어떤 자료들이 필요한지 자료의 맵을 먼저 작성해야 한다.

다음 편에서는 그나마 없는 것 보다는 나은 청소년 백서의 통계자료들을 이용해서 좀 따져보도록 하겠다.

 지속적인 포스팅을 위해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