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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판결문 분석(1) 곽노현은 상대후보를 매수하지 않았다



검찰의 주장은 이렇다.

당선되기 위해 단일화가 절실했던 곽노현은 측근들에게 박명기의 사퇴 댓가로 7억을 제시하였고, 협상이 우여곡절끝에 5월 19일 당선되면 7억, 낙선되면 5억으로 타결되었다. 곽노현은 이 사실을 보고받고 승인하였으며 단일화 하여 교육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 이행을 하지 않고 박명기를 따돌리려 하다가 박명기가 기자회견을 열어 폭로한다고 협박하자 할수 없이 먼저 2억을 강경선을 통해 지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알고 있고, 조중동은 아직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조국 교수와 그의 귀여운 제자인 송아무개씨 역시 이런 정황을 매우 쉽게 추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진중권도 아직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상대 후보를 매수한 곽노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즉 검찰의 저 주장은 날조 그 자체다.


판결문에 나오는 진실은 이렇다

판결문을 보면 법정은 검찰이 제출한 모든 증거자료를 거부하고 있으며, 검찰측 증인인 김A는 사실상 거짓 증언을 반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검찰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으며, 위에 제시한 후보매수 스토리는 그야말로 검찰이 쓴 소설에 불과하다. 심지어 판사는 검찰이 상황을 먼저 설정해 두고 자료를 거기에 끼워맞추고 있다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판사가 작성한 190쪽의 판결문에 철저한 검증을 통해 재구성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10년 51813시 양 캠프 회동(달개비 식당)

양측 캠프가 회동한다. 곽노현 측에선 본인과 그의 선거특보인 김**, 선대본부장인 최**, 박명기측에선 본인과 선거본부장인 양**이 나와서 회동하였다.  여기서 곽노현은 박명기에게 후보 사퇴를 요구하며, 차기 불출마 및 차기 후보 양보, 교대총장 선거시 지지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박명기는 이 조건을 거부하였다. 박명기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명예직에 불과한 정책자문위원장을 언급하였고, 곽노현은 충분한 자격이 있지요 등의 덕담으로 화답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협상은 실무진에게 위임하기로 하고 후보들은 자리를 떴다.
 
518일 실무진 협의(마젤토프)

곽노현 측의 김**, **, **과 박명기 측의 양**이 단일화 조건을 협의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박명기와 그의 제자인 김A(이 문제의 인물)가 도착했다. 이때부터 박측에서(박명기인지 김A인지는 명확치 않음) 7억 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누가 요구한 것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당시 곽노현측 실무자들은 김A를 내쫓으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니 누구가 돈 얘기를 끌고 들어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김A는 금전지급각서까지 요구하여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곽노현도 이 자리에 도착하였는데, 도착하자마자 나가버리려는 것을 달래서 일단 보도용 사진만 촬영한뒤 자리를 떴다.
 
이후 전화로 곽노현은 금전을 조건으로 한 협상의 거부를 김**에게 지시하였는데, 김**은 박명기 캠프가 사실상 좌초 직전이니 굳이 신경쓸 필요 없이,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스스로 사퇴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곽노현은 더 이상 단일화 협상 의지를 보이지 않고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519일 오전 박명기의 부탁을 받은 유**이 곽노현에게 박명기에게 35천 정도 도와 줄수 없는지 타진하였으나, 김**의 조언에 따라 곽노현은 이를 거절한 뒤 10억 요구하다 하루만에 3억까지 떨어진 것을 보면 사정이 정말 어려운 모양이라고 판단하고 김**의 진단이 정확하다고 판단함.
 
이에 박명기는 단일화를 포기하고 선거운동에 돌입하려고 하였으나 정작 선거본부장인 양**이 화를 내며 협조를 거부하며 단일화를 종용하여 선거운동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고 판단. 이에 양**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단일화 협상의 마무리를 부탁함
 
519일 오후 이른바 합의

**은 곽노현측의 이**(처음 등장)를 불러내어 얼렁뚱땅이라도 금전지급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고, **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 그러나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계획도 없었으며, 다만 15천을 양**이 먼저 마련해서 박명기에게 주기로 하고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차차 진행하기로 하였다. 양**은 이**에게 곽노현이 당선하면 7, 낙선하면 5억이라고 일방적으로 의사전달하였으나, **은 대꾸하지 않았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듯했지만, 일단 양**는 이걸 합의라고 생각하고 박명기에게 당선하면 7, 낙선하면 5억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과 최**은 이 협상 자체를 곽노현은 물론 김**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양**도 이들이 곽노현에게 알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들이 돈만 마련해 오면 되는 것이기에 굳이 곽노현에게 알려서 판을 다시 깰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5월 20일 박명기 후보 사퇴
 
이 소식을 들은 곽노현은 캠프 사정이 안 좋은 박명기가 10억 요구하다 안되니까 3, 그것도 안되니까 결국 백기투항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박명기를 위로하고, 만약 어려워지면 모든 진보진영의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달래었다. 그리고 곽노현이 당선되었다.

7-10

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이 기간동안 곽노현의 행동은 도저히 후보매수라는 약점잡힐 일을 한 사람의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따라서 합의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해야 이해가 된다.

**는 우선 자기 돈으로 박명기에게 돈을 주려고 하였으나 15천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같이 약속한 이**, **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외면당하고 말았다. 결국 양**은 박명기와 연락을 끊어버리고 잠적해 버렸다. 김A는 곽노현이 합의사실을 알 것으로 기대하고 각종 수익사업 특혜를 요구했으나 도리어 내쫓기다시피하게 되자 격앙되었다. 박명기 역시 몇 차례 곽노현에게 합의 이행을 촉구했으나, 곽노현은 도리어 무슨 약속을 말하는 것이냐며 화를 내어 둘 간에 언쟁이 벌어졌다. 후보를 매수한 자가 자기 멱살을 잡고 있는 매도자를 이렇게 위험하게 관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일이며, 따라서 곽노현은 합의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판사는 판단한다.
 
10월-11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곽노현이 측근들에게 상황 조사를 의뢰하고, 10월 중순 경 519일의 합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크게 격분하였으나 그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증거는 합의사실 알게 된 다음에도 박명기가 합의이행을 요구할때 그 합의는 자신과 무관하니 이행할수 없다고 강력하게 거부하였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김A는 격분하여 폭로를 하겠다면서 폭로문건을 작성하여 곽노현 측근들에게 들이밀고 협박하지만 도리어 그 문건 내용이 터무니 없고 과장되어 있다면서 면박만 당한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유력한 교육인사인 박명기와의 상황을 이렇게 방치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곽노현은 선거와 전혀 무관한 인물이었던 강경선에게 박명기와의 화해를 부탁하였고, 아울러 박명기의 상황이 얼마나 어렵길래 저런 무리한 행동을 하는지 알아볼 것을 부탁했다.
 
11월-12월
강경선은 박명기에게 곽노현이 519일의 합의에 대해 아무 관련이 없으며, 따라서 이행해야할 이해가 없음을 이해시켰다. 둘간의 대화는 만약 딱한 사정이 있으면 도와줄수는 있지만 합의를 이행해라 따위의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이후 박명기는 합의이행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박명기가 합의이행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곽노현과 박명기의 우호관계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서울교대 총장선거 실패로 선거빚이 누적된 박명기의 상황은 이때부터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경선은 그 상황을 매우 어렵고 위급하다고 판단하였다. 상황을 물어보는 강경선에게 박명기는 3억 이상의 재정곤란을 호소하였지만 강경선은 곽노현에게 금전 2억을 지원할 것을 제안하였다. 곽노현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강경선이 재차 설득하자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이들은 순차적으로 금원을 마련하여 총 2억을 박명기에게 전달하였다.  이후에도 박명기가 재차 추가의 금원을 요구하였으나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확인된 사실은 딱 두가지다.

1.곽노현은 박명기와의 금전합의와 무관하다. 즉 매수하지 않았다.


2.곽노현은 박명기에게 합의를 이행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돈을 지원하지 않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이 두 가지 불변의 사실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곽노현을 후보 매수범 따위로 부르는 것은 명백한 사실 호도이며, 심지어 명예훼손이다. 설사 유죄라고 했다 해도 이는 선의로 행한 일이라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의미이지 결코 고의적인 범법자라는 뜻이 아니다. 이건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판결문의 취지다.

문제는 이 판결문이 사실관계를 이렇게 완벽에 가깝게 재구성하는데 성공하고서도, 즉 진실을 다 밝히고서도 정작 엉뚱한 양형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건 좀 더 읽어 보고 쓰겠다.(무슨 판결문이 책 한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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