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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청소년자살 문제에 대한 부화뇌동을 경계한다(2)

먼저 이 글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읽어보면 이후 전개되는 논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편 보기)

우선 전편에서 말했던 몇 가지 따져 볼것들을 좀 따져 보도록 하자.


(1) 청소년 자살

논지를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청소년의 자살이 안타깝지 않다거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문제가 다른 문제를 뒤 엎을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분명 꽃다운 청소년의 자살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극적인 뉴스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률은 2007년까지만 해도 인구 10만명 당 6.2명 수준이다. oecd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청소년 자살에 관한한 평균 이하다. 우리가 공교육의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핀란드 청소년들이 우리 아이들보다 자살을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다. 자살율이 낮은 나라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남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이다. 물론 2007년 자료 기준이지만, 별도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 자살률은 2009년에 다소 증가했다가, 2010년에는 5.2명으로 도리어 줄어들기도 했다. 2011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큰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200명 이상의 청소년이 자살하는 셈이니, 이걸 대서특필 하기로 하면 하루 건너 한번씩 청소년 자살 기사로 신문을 도배할 수 있다. 그리고 65세 노인이 자살한 것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으나 청소년의 자살은 자극적인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청소년 자살문제는 그 실상에 비해 많이 과대 대표되어 있다. 조중동이나 언론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교육, 청소년 전문가들까지 자극적인 뉴스가 나오면 그때 잠시 남비처럼 끓어오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더더군다나 이때를 기회로 잡고



이 공식을 들이대는 보수세력의 견강부회는 철저히 비판하고 분쇄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진보진영의 교육전문가들까지 느닷없이 "우리 모두가 가해자다."라고 하면서 이 프레임에 휘말리고 있다. 죽은 학생들이 안타까운것은 감정이지만 객관적 현실은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해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프레임은 청소년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다가 교묘하게 학교폭력을 결합시킨 보수진영의 성공적인 언플이다.

나중에 상세히 다루겠지만, 학교폭력의 문제와 청소년 자살의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다. 이 둘을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면 엉뚱한 대책을 만들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살 위험 청소년들을 구제하는데 더 심각한 실패를 겪게 된다.

정작 우리나라에서 심각한 자살문제는 청소년의 자살이 아니라 어른의 자살이다. 청소년이 하지 못한 일을 어른들은 해내었다. 바로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2위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앞서는 압도적인 1위다. 우리가 일본을 이렇게 큰 차이로 앞지른 분야가 또 있을까 싶다. 청소년 자살률이 평균이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압도적인 자살률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어른들의 자살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다음 그래프는 1997년과 2007년 10년 사이에 연령별 자살률이 어떻게 변동했나 비교한 그래프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자살률의 증가폭이 더 커지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10대의 자살률은 그래프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증가율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나라의 자살 문제는 청소년 보다는 경제활동 연령층에서 더 심각 아니 훨씬 더 심각하다. 자살에 관한한 우리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가해자다."하면서 미안해 할 처지가 못된다. 어른들 코가 석자인 것이다. 그 원인은 여럿을 들 수 있으나 1997년이 신자유주의 원년이라는 점(그래서 난 김대중 대통령을 도저히 진보로 인정하지 못하겠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에 경도되긴 했으나, 거기에 대한 회의라도 보여주었지)을 가지고 모종의 추정을 할 수 있다. 실업률과 자살률간의 동조화 현상도 있고 하니.


그래도 청소년 자살은 심각한 문제이긴 하니 한번 짚고 넘어가긴 해야 한다. 자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어떤 충격이나 고통이 자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충격과 고통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자살은 한 두건의 문제 때문에 욱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살자들은 "원샷 원킬"하지 않는다. 즉 몇 차례의 자살시도가 있은 뒤에 기어코 성공한다. 즉 자살자도 자살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 자살한 청소년이 발생할때 덮어놓고 학교측, 혹은 마침 그 인근 시점에 해꼬지한 친구들에게 책임을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그들은 자살의 어떤 트리거를 제공해 준 것일수는 있으나 자살의 원인이 되는 뿌리깊은 우울증은 대부분 가정환경에서부터 길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몇 해전 사회적 이슈가 된 최진실씨의 자살도 그렇다. 정상적인 상태의 사람이라면 악플을 보고 자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플로 응대하거나 아예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차단하거나 비공개 처리한다. 진중권 같은 사람은 수십만건의 악플과 함께 블로그를 닫아버리지 않았던가? 악플에 시달리면서도 사이트를 닫지 못하는 것은 당시 최진실씨가 극도로 외롭고 고립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이 지독한 고립감, 외로움, 우울, 적대적인 세상에 혼자 떨어진 느낌. 이건 안 겪어 본 사람은 이해 못한다.

자살한 학생의 부모가 학교에 와서 삿대질 하는 것은 일시적인 분노의 표출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달리 말하면 자기들의 죄책감을 전가하는 투사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언론 등에서 자살학생 부모를 피해자 측면에서 접근해서 자꾸 발언할 기회를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들에게는 자숙과 반성이 필요한데, 공적 발언권을 주면 그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학교, 사회 등을 강하게 공격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우울증의 대부분은 정신병이라기 보다는 뇌신경계의 병이다. 즉 마음의 병이 아니라 몸의 병이다. 세로토닌 수용계의 문제가 생겼거나, 도파민 수용계의 문제가 생겼거나 하면 발생하는 것이다. 위궤양을 방치하면 위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처럼, 이 우울증을 방치하면 자살로 사망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이런 기질적 우울증은 치료 외에는 답이 없다.

그런데 만약 학급 담임이 해당 학생의 이상 동태를 파악하고 학부모에게 그런 권유를 하면 5/10은 "우리 애가 정신병자란 말이냐?"라며 항의를 한다. 설사 상의를 하지 않더라도 항우울증 치료는 비용과 시간이 상당이 들어간다. 학교에 아이들을 던져놓고 모든걸 교사가 다 해주길 바라는 한국의 학부모들은 그저 더 많은 관심을 부탁하며 상담을 마칠 뿐이다. 하지만 이걸 교사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다음은 심인성 우울증이다. 이건 다시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지나치게 강한 규범의식, 초자아가 원인이 된다. 즉 스스로를 꾸짖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 있는데, 해석하기 따라서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사디즘이라고도 하는데, 하여튼 강한 자책성향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아강도가 약한 경우 자살의 위험이 높다. 지나치게 엄격한 집안, 억압적인 부모와의 상호작용, 욕구에 대한 철저한 멸시와 부정,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과업의 연속 등이 이런 성향을 부추길 수 있다.  이번에 보도된 학생의 유서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이 죽는 그 순간에도 "부모님께 죄송하다"로 일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종류는 고립감, 외로움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비유가 아니다. 사회성은 인간의 본능이며 이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엄청난 트라우마를 받는다. 그렇다면 청소년이 이 사회성을 충족시킬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어디일까? 가정일까 학교일까? 그 상대는 누구일까? 부모일까 교사일까? 둘 다 중요하겠지만 그 비중은 8:2 정도로 가정과 부모일 것이다. 외로움에 지친 청소년들이 자살로 내몰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자살자들의 그 끔찍한 외로움은 자살을 하기 위해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을 보면 눈물겹게 느낄수 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자살하겠다는 목적을 공유하면서라도 연대감을 가지고 싶었을까? 그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최후의 밤을 보내며 서로 작별할때 아마 그들은 살아 생전에 가장 뜨거운 애정과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자살자들은 특히 청소년들은 그냥 죽지 않는다.  반드시 주변에 자신의 자살의도를 암시한다. 평소 안하던 말, 이상한 행동, 암호를 방불케 하는 쪽지 등등. 이 신호에 상대가 반응하고 관심을 보인다면 애초의 동기가 되었던 외로움이 해소되기 때문에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우울증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책 조차 읽을 수 없다."라는 말 속에서 그의 황폐화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저를 버려야 합니다."라는 비관적인 게시글을 올렸을때 우리는 그의 외로움과 자살의도를 읽었어야 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소위 진보인사들은 더 격렬한 도덕적 질타를 가했다. 안 그래도 초자아가 강한 사람에게 동지들의 질타까지 가해졌으니 그건 죽으란 말 밖에 안된다.

옥고를 겪은 강인한 투사에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조차 그럴진대, 청소년이야 오죽하겠는가? 만약 아이가 부모에게 다소 엉뚱한 행동과 말을 할때 그 대답이 "쓸데 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였다면 이건 "당장 죽어버려"와 같은 뜻이리라.

다음의 통계자료를 보면 정말 무서운 결과를 알 수 있는데, 우리 나라 청소년들의 부모와의 상호작용, 특히 아버지와의 상호작용이 거의 궤멸상태라는 것이다. 대화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적이 하위인 학생들, 그리고 고등학생들은 아버지와 대화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학생의 숫자가 매우 자주한다는 숫자와 비슷하다. 그리고 과반수가 별로 하지 않거나 가끔하는데, 이 가끔하는 대화의 내용이 무엇일지 매우 걱정스럽다. 안 그래도 OECD최고 수준의 자살위험으로 내몰리고 있는 정신 건강이 위험한 아버지들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청소년들은 아버지와 중요하거나 의미있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아래의 표를 보라. 아버지와 고민을 상담하는 학생은 3%다. 51%가 친구들과 상담한다고 하는데, 이건 괜찮다. 친구들과 고민을 이야기 하는 동안 사실상 연대감의 회복을 통해 고민거리를 극복할 힘을 가질테니까. 그런데 무려 16%가 스스로 해결한다고 한다. 즉 상당수 학생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며, 정신적인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다는 뜻이다.


더 이상 깊게 들어가는 것은 블로그 포스팅의 한계를 벗어난다. 나는 사회학자지 심리학자가 아니니 더 깊게 들어갈 능력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청소년 자살은 단순한 외부자극에 의해 일어나지 않으며, 훨씬 뿌리깊은 마음의 병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은 상당부분은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가해자다 이런 식의 말로 책임소재를 모호하게 만들지 말자. 만약 학교 폭력이 원인이면 우선 폭력을 가한자가 가해자이며, 우울증이 원인이라면 일단은 가족 아니면 어쩔수 없는 DNA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기 때문에 선진국에선 청소년이 자살하면 "심리 부검"을 한다. 자살에 이르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우선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기질적 우울증인지 심인성 우울증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후자라면 당연히 살아남은 다른 자녀들을 위해 부모에 대한 상담 처치가 행해지며, 마찬가지로 교사와 급우들에 대한 처치도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묻어버린다. 참으로 무서운 처치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편에서는 학교 폭력 문제를 좀 다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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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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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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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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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