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학교 바탕세우기 (5)

한 동안 너무 정치적인 글만 써서 제 본래의 자리를 이탈했던 것 같습니다. 곽감 판결문 분석도 길어지고 하니 우선 원래 해야 했던 교육학 연구를 다시 재개합니다.

낡은 교육의 철학적 바탕으로서 의식철학에 대한 비판까지 썼던 것 같습니다.(앞의 편 보기)


의식철학이 낡은 교육에 미친 영향

이러한 의식철학은 근대 교육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행함”, 그리고 머리를 통한 공부신체를 통한 공부를 분리시키는 이원론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란 철저히 머리, 즉 이성의 작용이며, “행함이란 다만 이 머리의 명령을 신체가 수행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식의 2원론의 깊은 뿌리는 소위 주지과목으로 불리는 국영수사과를 한 그룹으로 치면서 실업, 체육, 예술과목들과 구별하는 관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전자의 5개 과목은 공부라고 생각하고 후자의 과목들은 일종의 장식으로 생각한다. 이때 전자의 5개 과목을 공부라고 특별히 생각하는 이유는 그 과목들이 실제로 그만큼 더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로 머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음악, 미술, 체육이 탁월한데 이 5개 과목에서 성적이 부진한 학생을 학습부진아로 규정하여 나머지 공부를 시킨다면 큰 저항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다섯과목에서 탁월한 학생들 중 일부를 체육을 못한다 해서 학습부진아로 규정한다면 아마 엄청난 항의전화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물론 교육행정가나 교사들 중 그런 학생을 학습부진아라고 여기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 다섯 과목도 어느 정도의 행함이 요구되는 사회나 과학이 순전 머리로만 하게 되는 국영수보다 무시당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또 어느 정도 정서나 감정이 개입되는 국어보다 순전 이성적인 추론만을 사용하는 수학이 더 중요하고 차원 높은 교과로 대접받는 현상도 자연스레 나타날 수 있다. 심지어 진보적인 한국의 교육운동가들이나 프랑스 공립학교가 철학교육을 강조하는 것도, 한국 학교에서 수학이 교과의 왕으로 등극한 현상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는 모두 의식철학에 기반한 2원론과 신체 경시의 결과인 것이다.

또한 의식철학은 학교에서 수업이 이루어지는 방식, 학생들을 배치하는 방식, 학습이 이루어지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공부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하는 것이며 감각, 감정, 신체 활동은 머리가 하는 공부를 방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자기 역할을 받는다. 이는 체육시간이나 몇몇 허용된 시간을 제외하면 수업시간 중 학생들의 신체활동이 철저히 규제받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수업은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서 하고 있다. 의자라는 곳은 학생들의 신체를 완전히 접어넣는 수납고의 역할을 한다. 책상은 머리가 한 공부를 기록하는 손 외에는 어떤 신체 활동도 허용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형틀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교사의 지시에 따라 신체를 가지런히 하는 방법이다. 일명 앞으로 나란히부터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운동장이나 체육관에서 신체에 대한 훈육이 마쳐지면 교실에 들어가서 자리를 배치 받는다. 왼족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학생들의 신체는 교사를 향해 집중되게끔 가지런히 배치된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수업 중에 이렇게 가지런하게 정돈된 위치에서 이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지런히 정렬된 상태에서 학생들은 공부를 한다. 그리고 이 공부란 오른쪽 사진과 같이 머리와 손만 자유로운체 나머지 모든 신체가 구속된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태에 대해 성장기 아동·청소년의 정서와 신체가 지나치게 편협해질 수 있다고 인권적 차원에서 문제제기 할 수는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 자크 루소다. 루소는 이른바 이성적으로 기획되고 구성된 교육내용, 교육제도가 아동의 자연스러운 성정을 억압한다면서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래서 아동의 신체와 감정을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하는 대안적인 교육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인식론적 측면에서 의식철학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가 주장한 자연스러운 신체와 정서의 발달이 공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다만 보충적인 대안에 머무르고 말았으며, 근대 학교는 이런 문제제기를 능동적으로 수용해 왔다. 그것이 바로 공부하는 과목과 구별되는 예능과목, 실과 과목들이다. 공부는 여전히 머리로 즉 이성으로 하는 것이며, 다만 그 과정에서 쇠약해지기 쉬운 신체와 감성을 가꿀 별도의 활동이 추가되는 것에 그친 것이다. 심지어 2011년 서울형 혁신학교에서도 이른바 문예체 교육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 신체와 감성을 육성하는 교육활동조차 불순하다. 이 활동들이 미셸 푸코는 양순한 신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던 활동을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양순한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제식훈련같이 노골적인 신체 훈련은 아니다. 다만 좋은, 올바른,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담론을 통해 학생들은 특정한 유형의 신체가 되도록 통제될 뿐이다. 그리하여 신체는 완전히 길들여져서 그 사회에서 권력이 이성적이고 합당한 것이라고 규정한 방식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 의식이 아무리 저항적이고 반항적일지라도 이미 신체가 포획된 이상 체제에는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피에르 부르디외는 근대 교육이 특정한 계급의 신체를 미화하고 모범으로 만들어 그런 신체와 행동양식을 갖추지 못한 계급을 문화적으로 복종시키는 장치로서 공교육과정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환원론적 방법
 
환원론적 방법의 특징
 
우리가 만약 절대적 진리관과 근대 의식철학의 전제들을 수용한다면 연스럽게 이성적인 추론 과정을 따르는 절대적인 지식획득의 방법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공부는 이성의 작용이며, 그 대상은 불변의 외부세계이기 때문에 외부세계를 이성이 취급할 수 있도록 조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의 획득을 보장하는 일련의 절차가 바로 방법론이다
근대의 지식관은 한 마디로 누가 인식하건 간에 올바른 방법론의 절차를 따른다면 보편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을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부른다. 어떤 지식의 확실성의 문제가 그 지식을 획득하고 검증하는 절차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순서를 거꾸로 불러서 근대 의식철학은 과학적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구축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존 로크는 자신을 뉴턴이 가는 길을 청소해주는 사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과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 그 핵심은 한 마디로 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환원주의는 복잡한 현실세계, 실제 세계를 비교적 쉽게 조작하고 검증할 수 있는 단순한 사실과 원리로 잘게 자른 다음(환원), 이렇게 환원된 사실과 원리를 엄격하게 통제된 조건 아래의 실험을 통해 검증한 뒤 이를 다시 재조합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모델을 수립하는 방법이다. 즉 인식의 대상을 이성이 조작하기 쉬운 단순한 단위로 잘게 잘라서 하나하나 검증한 뒤, 검증된 것들을 재조합하여 원래의 인식 대상을 추론하는 것이다.

이 방법론은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지식을 생성하는 주체가 세계를 작은 부분들로 자르고(분석), 검증하고 재조합(추론)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의식은 분석하고 추론하는 이성일 수밖에 없다. 둘째, 의식 외의 것들은 모두 주체 외부의 세계이며 이 세계는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는 단지 사물이며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사물이기 때문에 잘게 잘랐다 하더라도 그 대상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잘게 잘라 검증한 뒤 다시 재조합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의식이 인식의 대상인 세계를 마음껏 잘게 잘랐다 붙였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식을 획득하고 생산하는 과정은 총체적인 과정이 아니라 잘게 잘라진 대상들을 취급하는 고도로 정밀한 분업의 과정이 된다. 따라서 지식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잘게 자른 뒤, 그 잘라진 한 부분 부분을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로 연구하는 분과학문의 전문가, 즉 과학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과학(science)의 어원이 자르다(scindere)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관점은 근대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이런 환원주의적 접근에 의해 과학적으로 관리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때 과학적이란 의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일체의 관례와 통념에 맞서 싸운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공식화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한다는 의미다. 즉 과학화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잘게 잘게 잘려졌다는 의미다. 그리고 잘게 잘리었다는 의미는 전체의 가치가 무시된다는 뜻이며, “부분또한 전체와 맺고 있는 연관을 무시당한다는 뜻이다.
또한 미셸 푸코에 따르면 이것은 근대적 권력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잘게 잘라서 인식하는 것이 지식형성의 과정이라면 이 자름의 기준의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자를 것인가? 그리고 이 자름의 기준을 규정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권력이 된다. 현실은 이제 어떻게 자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종류의 지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환원론적 방법이 낡은 교육에 미친 영향
 
근대적인 환원론이 교육에 미친 영향을 누구보다 잘 보여준 학자는 미셸 푸코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적인 권력은 먼저 잘게 잘라 인식할 대상과 그럴 필요가 없는 대상을 자르는 것에서부터 자름을 시작한다. 이때 잘게 잘라 인식할 대상은 정상적(normal)인 존재이며 그렇지 않은 대상은 비정상적이거나 병리적이다. 잘게 잘라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을 잘게 잘랐을 때 그 부분들이 각각 미리 설정된 범주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결국 권력이 미리 설정해둔 범주로 환원되지 않은 요소들이나 아니면 아예 그런 범주에 따라 잘라지지 않는 존재는 병들고 비정상적인 존재이며, 사실상 존재가 아니다. 존재가 아닌 것들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신병원과 감옥의 탄생이다.
그런데 이런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존재를 가려내려면 세밀한 자료와 이 자료의 프로파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각각의 개인으로부터 세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 자료를 프로파일로 작성하는 곳이 바로 학교다. 즉 학교는 개인들이 지식을 학습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에 대한 지식을 권력에게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곳에 더 가깝다
이른바 공부라는 과정은 세밀하게 나누어진 활동들로 되어 있으며, 교사들은 이 활동들을 통해 개인들에 대한 세밀하게 분류된 특성 목록을 작성할 수 있다. 이는 세밀한 과목과 영역, 단원으로 나누어진 문항들이 출제되는 시험을 통해 완성된다. 이 모든 과정들은 교사에 의해 이른바 생활기록부라고 불리는 세밀하고 체계적인 양식의 문서를 통해 프로파일링 된다. 생활기록부에는 한 학생의 특성을 여러 세밀하고 체계적인 범주로 나눈 뒤 거기에 따라 기술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생활기록부는 이후 이 학생을 입학시키고자 하는 상급학교 관리자, 혹은 채용하고자 하는 기업주가 열람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학생 본인은 이 생활기록부를 원칙적으로 절대 열람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라기 보다는 학생들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는 곳이라는 역설이 퍽 잘 들어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학교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매우 세밀하게 나누어진 지식을 배운다. 이건 당연한 귀결이다. 교육되어야 할 지식들이 이렇게 환원주의적으로 얻어진 지식이니만큼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환원주의적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교사 역시 교육에 대한 지식이나 방법을 환원주의적으로 배운 사람들이다. 교육활동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실습기간은 요식행위로 전락하고, 교육학을 세부 분야와 항목들로 나눈 뒤 마치 각 분야와 항목들이 별개의 것들인양 세밀하게 공부하고, 그런 종류의 시험을 거쳐 교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낡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에서 모든 교육은 환원주의적이다. 교육의 과정, 앎의 과정은 그 과정 전체가 하나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나뉘어진 일련의 단순한 과정들의 합으로 간주된다. 교육은 이렇게 세밀하게 나누어진 일련의 단순한 정보획득이나 행동방식 체득의 과정들을 차례차례 익히면서 습득해 가는 과정들로 간주된다
이것들을 합치는 방법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익혀나가면 이것들이 단순히 누적될 것이지만, 환원주의에 따르면 이런 단순히 누적되는 것만으로도 전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들은 세밀하게 나누어진 온갖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학교에서 배운다. 그리고 이런 잡다한 것들의 단순한 합이 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근대의 학교는 매우 역설적이다.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들은 자녀의 성공을 바라며, 자녀가 잘 자라기를 바란다. 하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성장과 성공에 꼭 필요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교사들의 수중에 넘어가서 관리된다
그 대신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세밀하게 나누어진 온갖 세밀한 지식과 정보의 조각들이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와 지식에는 철저하게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 이것은 단지 제도적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심리 구조에까지 뿌리박혀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바라보아야 하거나 알아야 하는 순간을 기피한다. 그리고 잘게 나뉘어진 지식과 정보의 조각이 주어지지 않으면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오히려 불안해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학교이며, 아직까지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낡은 교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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