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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청소년 자살 문제에 대한 부화뇌동을 경계한다- 최종회

이 글은 4부작의 네번째이다. 앞의 세편을 먼저 보고나서 읽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이다.
(1편 보기2편보기, 3편보기


앞의 글들을 굳이 읽고 싶지 않은 성질급한 한국사람들을 위해 앞의 세 편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1) 한국에서 사회문제라 할만한 자살은 청소년 자살이 아니라 성인들의 자살이다. 청소년 자살률은 OECD평균 이하인데, 성인 자살률은 압도적인 1위다. 
2) 청소년 자살의 원인은 다각적이기 때문에 섵부른 진단과 질타를 쏟아낼 것이 아니라 "심리적, 정신병리적 부검"을 실시해야 한다. 특히 가장 결정적인 원인제공자일 수 있는 자살학생 부모의 주장을 함부로 인용해서는 안된다.
3) 학교 폭력은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만 청소년들이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고통은 성적에 대한 압박이며, 학교 폭력에 대한 고통인식은 오히려 내려간 상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폭력, 청소년자살 등을 가지고 연일 대서특필하는 언론의 선정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는 비판받아야 하며, 특히 이대영 서울부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 거부와 관련지어 보면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이미 이 정도에서 논의는 다 된 셈이지만, 학교 폭력에 대해서는 책임있는 마무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몇 글자 더 이어나간다.


학교 폭력의 정의


먼저 학교 폭력의 개념을 분명히 하자. 이렇게 애매한 개념을 사용하면 전혀 다른 유형의 행위들이 하나로 엉켜서 양쪽 모두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학교 폭력을 일단 학생과 학생간의 폭력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여기서 폭력은 우위에 선 위력을 근거로 타인에게 원치 않는 행동을 강요하는 일체의 행위로 정의하려고 한다. 예컨대 학생들끼리 싸움이 벌어져서 치고박다가 행사하게 되는 폭력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싸우다가 우열이 가려져서 어느 한 쪽이 더 많이 맞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단 우열이 가려진 다음에 우위에 선 쪽이 상대를 저항하지 못하게 하고서 때린다면 이건 학교 폭력에 해당된다.


학교 폭력의 분류에 따른 대처


다음으로 학교 폭력을 책임소재에 따라 둘로 분류한다. 하나는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다. 이 경우는 청소년 범죄의 유형에 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다. 이 경우는 청소년 병리에 해당된다. 


1) 청소년 범죄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의식적, 의도적, 계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 행사의 결과 어떤 유형의 편익(금전, 쾌감, 복수 등등)을 얻는 경우 이는 범죄가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소위 1진들의 횡포와 관련되는 행위들이 거의 대부분 포함된다. 1짱을 중심으로 피라밋 구조로 후배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이들의 행위는 심지어 성인 조폭들까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명백한 조직 범죄다. 


이런 청소년 범죄에 대한 대처는 학교에서 담당하기 어렵다. 청소년 범죄의 해결 당사자는 사법당국이다. 학교는 사법당국에 대해 협조자는 될 수 있으나 결코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는 있지 못하다. 학교가 교사가 해야 할 1차적인 임무는 이들 범죄 청소년들의 선도, 교정이 아니라 다른 선량한 청소년들을 이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교육 선진국의 매뉴얼에도 교실에서 학생들끼리 싸움이 일어날 경우 교사들은 1차로 다른 학생들을 위해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싸움에 흉기 등이 동원될 경우 즉각 경찰력의 조력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해괴한 온정주의가 퍼져서 교사들이 이들 범죄자들에 대해 냉정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 범죄자의 부모들의 결사적인 적반하장(그래야 학교에서 처벌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은 교사의 단호한 처리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럴때 악역을 맡으라고 있는 사람이 교장, 교감이다. 따라서 학급에서 범죄행위가 발생할 시 담임교사는 교장, 교감에게 이를 즉시 신고하면, 이 학생은 바로, 교장, 교감에게 인수되고, 교장, 교감은 사법당국과 협조하여 이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 동안 담임교사는 이들에게 피해를 보았을 선량한 학생들을 안심시키고, 상처를 회복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 


원래는 천사같던 너희들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따위의 감상적 대처는 금물이다. 인간은 어차피 대체로 평균에 수렴하지만 몇몇 outlier가 있는 존재다. 타고난 우등생이 있는 반대로 타고난 범죄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조폭스러운 학생들은 한 마디로 "나쁜 놈들"이다. 진보진영은 이 나쁜 놈들을 나쁘다고 차마 못하고 자꾸 엉뚱한 사회적 변인들을 들이대면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집안이 어렵고 가난하다고 나쁜놈들 되는 거 아니다. 가난한 아이나 부잣집 아이나 범죄자 나올 확률은 거의 같다. 다만 집안이 부유할 경우 나쁜짓을 더 교묘히 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노출이 안 될 뿐이다. 반지하방에서 섯다판이나 증권 시장의 데이트레이딩이나 도박이긴 마찬가지지만 전자만 법에 저촉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사와 학교는 특별교육기관이 아니라 보통교육기관이다. 특별에 매달려서 보통에게 쏟을 관심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판단은 빠르고 냉철해야 한다. 사법당국 역시 학교측에 자꾸 미루지 말것이며, 이 과정에서 가해자 학부모들의 행패가 발생할 경우 이 역시 사법조치할 정도로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쁜 놈"의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형법에 저촉될 정도로 실제 범죄행위를 의식적으로 저지르는 놈들이 나쁜 놈이지, 단지 옷을 이상하게 입고, 담배 좀 빨리 배우고, 껄렁거리며 다닌다고 해서 나쁜 놈은 아니다. 교사들은 생활지도시 이 둘의 차이를 명백히 해야하는데, 진보진영은 단지 껄렁한 놈들에 나쁜놈도 포함시켜 버리고, 보수진영은 단지 껄렁한 놈들도 나쁜놈에 포함시켜 버려서 모두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2) 청소년 병리


이 경우가 실제 심각한 경우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매우 허약한 동물이다. 특히나 본능의 충족을 매우 촘촘하게 억압받아야 하는 근대 이후 인간의 정신건강은 대단히 취약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정신병은 의외로 우리에게서 멀지 않다. 게다가 인간은 하나가 아니라 집단을 이루었을때 집단병리를 이루기도 한다. 각종 집단괴롭힘이나 따돌림의 가해자들을 보면 특별히 나쁜 학생들은 찾기 어렵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도 애매하다. 작년의 가해자가 올해는 피해자가 되고, 내년에는 다시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들의 집단 괴롭힘의 양태를 보면 문자 그대로 "미쳤다"라는 말 밖에 나오는 게 없는데, 이것은 진실이다. 이들은 미쳤다.  흔히 미쳤다 그러면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떠올리면서 자기 자녀들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눈에 띌 정도로 이상행동을 하는 정신병은 정신분열증, 과대망상증 같은 경우,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신경계에 이상이 생긴 각종 기질성 정신질환 등이며, 강박증, 편집증, 우울증 등은 꼼꼼히 관찰하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호흡기가 감기 걸리듯이 우리 정신도 이런 정신병에 얼마든지 걸릴 수 있다. 정신병은 그야말로 "돌아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의외로 정신병 경계에 한 발을 딛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우울증에 시달렸었고(슬픈 일이 있어야 우울증 걸리는 게 아니다), 높은 곳만 올라가면 자살충동을 억누르느라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고, 자살 실패도 경험했다. 그 때는 성격도 걍팍하고 감정이 폭발적으로 드러나곤 해서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서기 어려웠다. 10여년 전 부터는 우울증 증상은 사라졌는데, 그 대신 워커홀릭이 된 것 같다. 물론 감정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일도 사라졌는데, 주변 사람들은 이번에는 나의 "생산력"을 칭찬한다. 


정신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주는 것 중 기질적인 것, 물질적인 것(환경 호르몬 등) 외에 심리적인 것을 꼽으라면 가장 결정적인 것은 스트레스와 억압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기대수준이 계속되면 그것은 자존감의 손상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되면 자아가 황폐해지기 쉽다. 황폐한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기란 어렵다. 또 본능, 쾌락의 충족을 계속 억압하면 이 에너지는 어떤 형태로든 발현되고 만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예술이나 스포츠 같은 활동으로 승화시켜버리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에너지는 내면으로 왜곡되고 외부 대상을 향해 왜곡된다. 그래서 각종 이상 행동이나 가학적 혹은 피학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양이나 염소같은 평화로운 동물이 아니다. 인간은 수백만년동안 무서운 사냥꾼으로 살아왔다. 아프리카에 살던 인간이 아시아, 오세아니아로 확장되면서 당시 존재하던 동물종의 80%가 멸종되었다. 그만큼 인간은 무서운 맹수다. 또한 인간 성욕과 식욕도 다른 동물보다 왕성하다. 한마디로 인간은 엄청난 욕망의 덩어리이며, 엄청나게 공격적인 그런 동물에서 진화해 왔다. 수백만년 중 문명 5000년은 순간에 불과하다. 특히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도 욕망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현대사회는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 욕망과 충동의 덩어리는 어떻게든 처리되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처리 과정에서 문화와 문명이 꽃을 피운다. 물론 잘못 처리되면 전쟁이지만.


우리 청소년을 보자. 성욕이 가장 왕성할 28청춘에 일체의 에로스가 금지된다. 아마 우리나라 청소년처럼 철저히 연애가 부정되는 나라는 다시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복장, 두발 규정 등등은 이 욕망의 대리 표출기회마저 억압한다. 일본은 교복은 철저히 잡되 머리는 풀어주지만 우리나라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옭아매어 왔다.  이 억압된 욕망을 다른 문화, 문명적 활동으로 승화시켜야 하지만, 그 마저도 몇몇 제한된 영역을 제외하면 철저히 가로막고 있다.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은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청소년이 자유로이 자신들의 꿈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종종 처절한 보복을 당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어른들의 표현의 자유마저 처절하게 가로막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이라면 총파업이 일어나도 할 말없을 엄청난 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 16시간 노동! 그런데 그나마 미래의 보상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생 오빠 형들은 취직을 못해서 아우성이다. 아우성이 보이는 미래를 향해 아우성치며 가야 하는 하루 16시간의 강제노동. 그리고 일체의 사랑도 일체의 미적 표현도 철저히 봉쇄된 삭막한 콘크리트 공간에서 피끓는 청춘을 삭혀야 한다. 이 청소년들이 제정신이기를 과연 기대할 수 있는가? 당장 어른들부터 하루 16시간 노동하고, 술, 담배 절대 하지 말고, 연애도 하지 말고, 취미생활도 하지 말고 한번 살아보라. 며칠이나 버티나? 한달이면 "돌아버릴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은 몇몇 범죄자와 대다수의 돌아버린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등생은 일종의 워커홀릭이며 성적 강박증 환자다. 집단괴롭힘으로 돌아버리는 아이들은 가학성 도착증이다. 아니면 우울증에 걸려 자살 위험에 처해있을 수도 있다. 적절한 중독대상을 만나면 중독증에 빠져들수도 있다. 멀쩡해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건 멀쩡한게 아니라 멍떄리고 있는거다. 이렇게 멍때리고 있는 아이들은 집단심리, 집단병리에 쉽게 휘말린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답은 간단하다. 


1) 청소년들에게 사랑을 허하고 가르치라. 소위 선진국의 성교육이 순결교육이 아니라 피임교육임을 염두에 두자. 내가 청소년에게 섹스를 시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체의 청소년의 연애관계를 금지하거나 장난스럽게 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교정해야 한다.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나이이며, 성춘향과 이도령 나이다. 
2) 청소년들의 자기표현을 허용하라. 외모를 가꾸는 것은 어른들 생각처럼 이성에게 꼬리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리비도 자기집중의 일환이다. 즉 단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뿐이다. 이 과정에서 소중한 자아가 자라난다. 이 과정을 억누르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면서 자책이 강한 옹졸한 인간이 된다. 이런 사람이 가책없이 가학적 행동을 쉽게 한다. 
3)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승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의 기회와 교육을 보장하라. 즉 문예체가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며, 모든 수업이 글쓰고, 말하고, 노래하고,연기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대책들이 대체로 진보교육감의 정책과 일치한다. 그러니 여기에서 도출되는 또 다른 대책은 4) 투표 잘하자 가 되겠다. 아이들 성적을 올려주겠다는 교육감은 뉴타운 아파트값 올려주겠다는 정치인과 마찬가지다. 뉴타운의 결과가 경제의 황폐화 민생고이듯, 성적올리기 교육의 결과는 학생 정신의 황폐화와 각종 병리현상인 것이다.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으라.


그런데 이런 사랑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서 학생인권조례를 거부하는 일부 종교단체와 수구 교육단체들은 결국 우리 아이들에 대해 간접적인 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바로 가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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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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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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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