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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교사들 직무유기로 잡을 생각 말고, 수사권이나 찾으라

내가 전교조니 교육진보세력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상처를 받고도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과부와 경찰청의 닭짓 때문에 피해를 볼 선량한 교사와 학생들을 위해서다. 즉 나는 전교조나 진영이 아니라 나 홀로 교과부, 경찰청, 그리고 잘못된 정책과 싸우는 것이다. 이런 나의 결심은 (귀거래사)를 참고하라.

교과부가 학교 폭력 대책이라고 내어 놓은거라는게 기가 막히다. 말은 복잡하게 하지만 결국 학교 폭력을 경찰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 잡아 넣어!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교사도 잡아 넣겠다는 거다. 문책이나 징계가 아니라 경찰이 학교에 뛰어 들어와 학교폭력 피해가 발생했을때 교사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데, 더군다나 거기 적용하겠다는 법이 직무유기다.

직무유기가 뭐냐 하면

"형법 제122조(직무유기)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없이 그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그 직무를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거다.

이게 뭐냐 하면 공무원이 자기 직권을 행사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부작위(행하지 않음)의 범죄다. 그래서 직권 남용과 대칭이 되는데, 직권 남용은 공무원이 자기 직권을 원래 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작위(행함)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할일을 안하면 직무유기, 권한 밖의 일을 하면 직권 남용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된다. 어떤 교사도 근무시간중에 모든 학생들에 대한 모든 처치를 다 할 수 없다. 그러니 교사가 눈이 수백개, 손이 수천개가 아닌 다음에야 하루에도 수 많은 "부작위"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부작위를 모두 직무유기로 걸자고 든다면 이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복도에서 어떤 학생이 인사를 했는데 인사를 씹었다거나,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는데, 별 쓸모 없는 질문으로 판단해서 대답을 안했거나, 시간표를 착각해서 그만 수업을 빼먹었다거나 등등 학교에서는 무수한 부작위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수 많은 부작위들 중 "직무를 유기한 때"를 가려내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법률 자체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판례를 찾아 보게 된다. 판례에서도 수 많은 부작위들 중 직무를 유기한 때를 가리는 기준을 찾으려고 부심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먼저 다음의 판례를 보자.

대법원 1997. 8. 29. 선고 97도675 판결
[1] 형법 제122조 후단 소정의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직무를 유기한 때라 함은 직무에 관한 의식적인 방임 내지 포기 정당한 사유 없이 직무를 수행하지 아니한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공무원이 태만, 분망, 착각 등으로 인하여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아니한 경우나 형식적으로 또는 소홀히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성실한 직무수행을 못한 것에 불과한 경우에는 직무유기죄는 성립하지 아니한다.

여기서 직무 유기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1) 의식적인 방임이나 포기 2) 정당한 사유 없음 3) 직무 수행 부작위 이렇게 이루어진다. 이 셋이 모두 충족되어야 직무를 유기했다는 범죄가 구성되는 것이다. 이걸 풀어서 쓰면 1) 직무를 수행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의식을 스스로 하고 있어야 하고(고의성), 2) 그렇게 생각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어야 하고, 3) 직무를 수행하지 않아야 한단 뜻이다.

따라서 공무원이 단지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 혹은 "성실히 하지 않았다"는 것만 가지고서는 직무유기가 성립될 수 없다. 양천경찰서가 자살한 학생 담임과 교장을 입건하겠다고 드립치고 있는 경우를 보면 되도 않는 사안을 가지고 언론플레이 하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 경우 해당 교사나 교장이 1) "면담이나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음에도 하지 않았음"이 입증되어야 하며, 그 경우에도 만약 "시기가 적절치 않아서, 면담이 더 일을 키울 것 같아서"등의 이유가 있었다면 2)가 성립이 안되기 때문에 사실상 직무유기를 묻기 어려워진다. 또 아무리 형식적이거나 엉성한 조치를 취했더라도 일단 조치를 취하려고 해 봤다면 무능함을 질책할 수는 있어도 직무유기죄를 적용할 수는 없다. 양천구 모학교의 경우 교장과 담임이 나름 훈계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했지만 도리어 사태가 악화된 케이스라 딱 이 경우에 해당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직무유기를 걸고 넘어가면 가장 크게 다칠 측은 교사가 아니라 의사와 경찰일 것이다. 의사가 응급실에서 조금만 대처가 늦으면 직무유기, 당장 수술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느긋하게 있었는데 급병으로 사망하면 직무유기. 경찰은 신고 했는데 출동 위치에서 신고자 찾다가 못찾아서 돌아가면 직무유기.혹은 민원게시판의 글 읽지 않은 구청장이나 시장도 직무유기 등등. 하지만 이런 경우들은  "왜 최선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라고 따질 수는 있을지언정 직무유기는 아닌 것이다.

다음의 판례를 보자.

대법원 1999. 11. 26. 선고 99도1904 판결 【직무유기】
직무유기죄는 구체적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작위의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하에 그 작위의무를 수행하지 아니하면 성립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의식, 고의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의식하면서도 할일을 하지 않는다고 본인이 의식하면서 하지 않아야 직무유기가 성립된다. 그러니까 교사의 경우 "폭력학생 벌을 줘야하지만 지금 주지 않고 있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어야 직무유기이며 "폭력학생 벌을 주면 도리어 피해자 보복할 가능성이 큰데... 어쩌지?" 이런 경우라면 직무유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경찰예를 들면 조폭 부두목이 가는 것을 발견했는데 "에이 잡아봐야 승진도 안되고, 잘못하면 다치고, 난 몰라" 이러면 직무유기고 "저놈을 지금 잡지 말고 내일 여기서 마약 거래를 할지도 모르니 좀 기다렸다 잡자" 이러다가 놓치면 직무유기가 아니다.

다음 판례
대법원 2009. 3.26 선고
직무유기죄는 구체적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작위의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직무를 저버린다는 인식하에 그 작위의무를 수행하지 아니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고, 또 그 직무를 유기한 때라 함은 공무원이 직장의 무단이탈, 직무의 의식적인 포기 등과 같이 그것이 국가의 기능을 저해하며 국민에게 피해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대법원 2009. 3. 26. 선고)

계속 같은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공무원이 마땅한 자기 직무를 저버리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인식하는 상태에서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야 직무유기가 성립된다. 그러니 교장이나 담임이 하지도 않은 상담을 상담일지에 기록한 다음에 할만큼 했노라 하거나 한 경우라면 모르겠거니와 서투른 면담, 서투른 처벌, 서투른 훈계라도 했다면 거기에 대해 무능함과 불성실을 질타할 수는 있어도 직무유기죄를 적용할 수는 없다.

과연 경찰이 이걸 모를까? 절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백만번 담임이나 교장을 입건해도 이건다 무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교육자들이 입을 마음의 상처, 학교의 혼란과 당혹감 등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이런 무모한 발상을 끄집어 내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사실, 이렇게 해석하면 진중권이 음모론이라고 디스 걸겠지만(상관없다. 난 이미 베어버린 상대에겐 흥미 없다) 소설을 한 번 써 보자면, 나는 경찰이 학교폭력을 빌미로 학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로써 학교인권조례를 무력화시키고 전교조를 굴복시키고 진보교육감을 무너뜨리려는 것으로 본다. 아무리 무죄 받을지라도 이번 민노당 후원금 재판에서 보았듯이 30만원 벌금형으로도 일단 입건되면 상당히 고생한다.

그런데 이른바 노는 학생들을 단 칼에 자르지 않고 어떻게 좀 해 보겠다고 품어 보려는 교사들은 아무래도 교총보다는 전교조쪽에 많을 것이며, 곽노현 김상곤 지지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 이제 "폭력 학생"을 비호하고 방치했다는 이유로 피해자 측을 선동하면 경찰은 직무유기를 내세우며 입건 하는 것이다. 그럼 인권조례를 지키려는 교사들, 혁신적인 교육을 해보려는 교사들, 그리고 "범죄자"수준의 학생이 아니라 단지 환경이 거칠어서 그렇게 된 학생을 품어 보려는 진보성향의 교사들은 언제 직무유기로 끌려갈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 속에 처하는 것이다.
길게 갈 필요도 없다. 이런식으로 줄줄이 걸어 넣은 다음에 한 서너달만 고생시키고 언론에 띄우고 "깡패의 배후세력은 전교조, 그 두목은 곽노현" 이런 식으로 신문에 두드리고 하다가 총선 끝난 다음에 모조리 무혐의 처리하거나(검찰이 이걸 받아서 기소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무죄, 기각 되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절대 그럴리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도리어 경찰에게 묻겠다. 조현오의 망자모욕죄는 지금 수사 하고 있나? 안 하고 있다면  모르고 안하는게 아니라 안하려고 작정하고 안하는 것이니 고의성이 충분하다고 보이니 이건 당연 유죄 아닌가?

그리고 정동영도 때리고, 박원순도 때린 여성이 어떻게 백주 대낮에 돌아다니다가 세번째 백색 테러를 감행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제대로 수사하거나 사법처리 안 한 거 아닌가? 봐주기 수사 한거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도 유죄다.

아니, 그런데 직무유기건 아니건 간에 경찰이 감히 수사할 수 있나? 교사가 직무유기 했는지 여부를 내사라도 할 수 있나? 이거 전부 검찰의 지휘 받아야 하는 것 아니었나? 최소한의 초동 수사권도 조현오 청장님이 검찰에게 냅다 진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슨 입건을 하네, 수사를 하네 호들갑인가? 이건 직권 남용이다.

그러니 경찰은 교사 직무유기 입건가지고 호들갑 떨기 전에 먼저 검찰에 가서 수사권 조각이라도 얻어 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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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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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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