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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 해 놓고 자화자찬하는 교과부의 학교폭력 대책

요즘 교과부가 멘붕 상태다. 장관만 멘붕이 아니라 이제는 차관도 멘붕인 것 같다. 여기에 기자들이 파업중인 방송사들의 멘붕까지 합세하니 별 해괴한 보도가 다 튀어나온다. 여기에 그 극치라 할 만한 사례가 하나 있다.

지금 교과부는 학교폭력 예방을 빌미로 온갖 해괴한 정책을 졸속적으로 쏟아내어 학교를 일대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는 정작 아주 큰 효과가 있는 양 선전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흐리멍텅한 눈으로 보아도 효과는 커녕 혼란만 일어나고 있음은 명약관화다.  그러자 교과부는 느닷없이 진보교육감들의 비협조 때문에 자기들의 훌륭한 정책이 잘 되지 않고 있다고 둘러대고 있다. KBS가 이런 말도 안되는 자화자찬과 견강부회에 한 몫 단단히 하며 거들고 있다. 이제 그 사례를 보자.

3월 22일 KBS뉴스는 이제 땡이 뉴스가 이명박 뿐 아니라 이주호에게 까지 봉사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KBS 기사 링크

뉴스 요지는 이렇다. 교과부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체육 시수를 늘리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 이행률이 예상보다 저조하다. 그 이유는 진보교육감들이 협조를 안해서다. 아, 이 좋은 정책을 단지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 협조하지 않는다니, 진보교육감 나쁜 것들. 대충 이렇다.

하지만 이 뉴스에는 교과부가 체육 시수를 1시간 이상 늘리라는 특단의 조치를 새 학년 시작이 한달도 안 남은 시점에,  교사들 인사 이동 다 끝나고, 상당수 학교에서는 이미 새학기 시간표까지 다 짠 다음에 느닷없이 내 던졌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말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2012학년도 들어 교과부가 교사 정원을 10%나 줄여서 체육교사도 예외없이 줄어들었다는 말도 쏙 빠졌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체육 시간을 늘리라고 요구하는 교과부의 방침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아 챌 것이다.

교과부 차관은  한 수 더 떠서 진보교육감이 협조를 안한 탓에 체육시수 늘리는게 얼마나 좋은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이 정부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소통이 부족하다고 문제제기하면 홍보를 늘리겠다고 대답한다. 참 딱하다. 게다가 KBS에서 붙인 보도 타이틀을 보라. "학교 체육수업 확대... 일부 교육청 참여율 저조"다.  정확한 타이틀은 "학교 체육수업 확대 파행, 편법"이라야 할 것이다.

당장 친여 성향의 SBS 보도만 봐도 교과부의 주장이 엉터리임이 단박에 드러난다. 보도 타이틀이  "시간만 늘린 체육수업.... 콩나물 시루 운동장"이다. 한 마디로 준비와 여건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졸속 정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실시되고 있다고 보고한 교육청들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진보교육감들은 교과부를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선 학교의 불만을 진지하게 고려했기 때문에 이 정책의 실시에 소극적인 것이다. SBS 기사 링크

복수담임제에 대한 반응 역시 처참하다. 한겨레나 경향이 아니라 기자들이 파업해서 친여 성향의 직원들이 제작중인 YTN YTN기사 링크의 보도에서도 그렇다. "겉도는 복수 담임제... 학교폭력 예방효과 '의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예견된 실패다. 그러니 YTN이 제대로 된 언론이었다면 이렇게 뒷북이나 칠게 아니라 교과부 대책이 발표 되었을때 바로 정면에서 비판했어야 한다. 즉 겉돌면서 수백억의 예산을 낭비하기 전에 문제제기 했어야 했다. 지금 우리나라 중학교 교사의 배치 기준은 학급당 1.5명 이상이다. 산술적으로도 복수담임은 불가능하다. 이걸 시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사 수가 학급수의 두배 이상이 되는 것이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교과부는 교과부가 교사 정원을 학급당 1.67명에서 1.55명으로 대폭 감축했다. 교과부 관료들은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학생수가 줄어들면 학급당 학생수 줄일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교사 수를 줄이려 든다.
그 결과 23학급인 송파구의 P중학교를 예를 들면  2011년에는 23학급에 교사 38명이 근무했었는데 지금은 34명만 근무하고 있다. 23학급이니 담임교사 23명, 여기에 학년부장이 아닌 부장교사 8명을 더하면 벌써 31명이다. 담임도 부장도 아닌 교사는 이제 달랑 세명 남는다. 그리고 학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 세명이 어떤 사람인지 알수 있을 것이다. 건강이 안 좋거나, 연로하신 분들이거나 출산이 예정된 임산부들이다. 그래서 담임을 빼 놓은 것인데 느닷없이 2학년 담임 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행정업무를 전담키로 하고 부장이 된 것이기 때문에 담임업무를 볼 여력이 없다. 학교에서 3년만 근무해 봐도 뻔히 결말이 보이는 정책을 명색이 수십년 교육경력을 가진 고위 교육관료들이 생각해 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 관점에서의 비판이 어떤 뉴스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교과부가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별도의 교사 충원 없이 효율적인 업무분담 모델등을 발굴해 복수담임제를 정착시킬 방침"이라고 우기는 모습만 클로즈업 하고 있다. 이것 정말 언어의 마술이다. "교사는 충원하지 않으면서 담임은 두배로 늘린다!" 놀랍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나는 지불하는 돈은 늘리지 않으면서 받아가는 상품은 두배로 늘리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정말 말이 안되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체육 시수 증가나 복수담임제가 정말 학교폭력 예방대책으로 검증되었는지를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과부도 기자들도 학교폭력 예방 하면 NO1,2를 다투는 권위자인 단 올베우스, 크리스티나 살미발리를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명색이 기자라면 학교폭력이 화두가 될때 이 두 사람 정도는 반드시 찾아 보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두사람의 학교 폭력 예방프로그램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보았다면, 복수담임제니 체육수업시수 확대니 하는 것이 학교 폭력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고 의심했어야 한다. 나 역시 학교 폭력과 관련한 국내외 논문 190여 편을 검토해 보았지만 체육 수업을 늘리고 담임을 두명씩 배당해서 학교 폭력을 막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연극, 영화, 게임, 그리고 토론을 통해 학급, 가정, 학교, 지역사회가 모두 성장해 나가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하고 있다.  올베우스는 학교 규칙을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도록 개선하고, 학교 폭력이 발생한 학급의 구성원 전체가 참가하는 연극, 토론 등의 활동을 통해 이를 예방하고 있다. 살미발리는 10차시로 이루어진 특별한 학생교육 프로그램(영화, 토론, 연극 등이 포함됨), 학교폭력 상황을 가상으로 체험하고 선택해보는 컴퓨터 게임 등을 활용하여 학교폭력이 발생할때 방관자들이 피해자를 돕도록 나서게 하는 공감증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반면 체육시수 확대나 복수담임제는 가해자, 소위 일진들을 보다 촘촘하게 감시하고 억압함으로써 학교폭력을 막겠다는 발상에 가깝다. 아니 차라리 그런 발상이기라도 하면 좋겠다. 교과부의 학교폭력 대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예 족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즉흥적이고 아무 이론없는 그런 대책인 것이다. 한 마디로 교육을 놓고 아님 말고 식의 정책을 던졌다는 것이다.

교육은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국가 사업이다. 그래서 교사를 전문직이라고 한다. 그리고 명색이 교과부에서 일하는 교육전문직들은 그 교사들 중에서 선발되었다고 서로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책을 내어 놓기 전에 먼저 그 정책의 이론적, 과학적 배경을 제시하고, 효과를 예측하고 검증하고, 예상되는 결과, 반향, 부작용 등을 충분히 검토한 다음에 내어놓았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애들 장난같은 정책을 폭력 예방 대책이라고 내어 놓고는 진보교육감이 협조를 안해서라고 투덜거린다. 그 동안 이런 무리들에게 우리 교육을 맡겨 놓았던 것이다.

참고로 교과부 관료들을 위해  올베우스 프로그램 과  살미발리 프로그램 링크 걸어둔다. 번역은 제공하지 않는다. 아린지 정권의 교과부니까 영어는 기본 아닌가?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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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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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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