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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교육감, 박명기 교수 항소심의 포인트

곽노현 교육감 항소심 세번째 공판이 끝났다. 그런데 이 공판을 보도한 신문 기사의 타이틀이 아주 애매한 표현을 써서 사건의 쟁점을 엉뚱한 프레임으로 몰고가고 있다. 사실 이 사건의 쟁점은 아주 간단하다. 판사 입장에서는 곽노현, 박명기 두 사람에게 각각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며, 여기에 대해 검사와 변호사가 공방을 벌이는 것이다.

먼저 곽노현 측에 던지는 질문이다.

1. 박명기 당시 후보에게 사퇴하는 댓가로 어떤 이익의 제공을 약속한 적이 있는가?

여기에 대해 1) 검찰은 약속한 적이 있었거나, 약속을 추인했다고 주장하며, 2) 곽노현 측은 약속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약속한 적이 있었다면 이 재판은 하나 마나다. 하지만 약속한 적이 없었다면 계속해서 다음의 질문이 추가된다.

2. 만약 약속한 적이 없었다면 대체 왜 선거 끝나고 8개월이나 지나서 돈을 주었나?
여기에 대해 1) 검찰은 사퇴한 데 대한 대가라고 주장하며, 2) 곽노현 측은 사정이 딱하게 된 박명기 후보를 돕기 위해서라 주장한다.

1심 재판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다. 당시 재판부는 1의 질문에 대해 곽노현은 박명기의 사퇴의 댓가로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으며, 선거 끝나고 몇달이 지나서야 양측 캠프의 몇몇이 모여서 아무런 문서도 뭐도 없는 구두 합의를 했음을 알았을 뿐이며, 알고 난 다음에도 그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음을 분명히 했다. 다음 2의 질문에 대해서는 곽노현이 돈을 준 동기는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 안스러움, 연민, 동정심, 강경선 교수의 설득, 종교심, 혹시 문제가 될지 모르는 상대방에 대한 입막음(정치적 이익) 등등, 한마디로 선의(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법적 의미)가 주된 동기였음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는 박명기 쪽이 사퇴의 대가라고 여길수 있는 정황에서 주었고, 또 어설프게나마 댓가에 대한 합의를 캠프 사람들끼리 했었으니, 그 책임을 지라면서 벌금형을 선고했다. 즉 곽노현 교육감은 매수행위를 한 적도 없고, 돈을 준 이유도 선의임은 밝혀졌지만,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이상한 연좌죄에 얽혀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따지자는 것이 항소심의 핵심이다.

특히 이번 항소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강경선 교수의 입장이다. 강경선 교수는 자신이 단지 곽노현 교육감의 돈 전달 심부름꾼이 아니라, 박명기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입장이라고 밝혔다. 사실 이는 1심 판결문에서도 어느정도 드러난 사실이다.

이렇게 강경선 교수를 중심으로 사건을 다시 쓰면 이렇게 된다. 1) 강경선 교수는 사이가 벌어진 곽교육감과 박교수 사이를 중재하고, 무슨 어설픈 약속이 있었건 간에 그런 것은 불가능함을 분명히 했다. 2) 다만 정책공조는 앞으로 잘 해 나가자고 화해를 시켰고, 박명기도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 증거는 2010년 11월 이후 박명기가 어떤 금전적 요구도 하지 않았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3)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강교수는 박교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고 동정심이 움직여서 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기 위한 일종의 모금을 했다. 4) 그런데 불행히도 곽교육감 외에는 그 모금에 응한 사람이 없었다.혹은 나머지는 익명이었다.  즉 한 마디로 "나는 곽노현의 돈 셔틀이 아니다. 내가 오히려 돈을 주자고 했다."이다.

다음은 박명기 측에 던지는 질문들이다.

1. 후보를 사퇴할때 어떤 댓가를 약속받거나 혹은 약속 받았다고 생각하고 사퇴했는가?

여기에 대해 1) 검찰은 곽노현과 직접 약속했거나 혹은 적어도 곽노현에게 보고된 것을 확인하고 사퇴했다고 주장하며, 2) 박명기 측은 그런 약속과 무관하게 단지 대의를 위해 사퇴했다라고 주장한다.

2. 선거가 끝난 뒤 교육감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있는가?

여기에 대해 1) 검찰은 수차례 돈을 요구한 녹취록 등을 제시하고 있다. 2) 박명기 측은 곽교육감에게 찾아가서 항의한 것은 돈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정책 공조와 인사추천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3. 선거 끝난 뒤 8개월이나 지나서 왜 돈을 받았는가?

여기에 대해 1) 검찰은 사퇴에 대한 댓가라고 여기면서 받았다고 주장한다. 2) 박명기 측은 진보진영에서 사퇴한 자신의 손실을 어느 정도 보전해 주는 것이라 여기며 받았다고 주장한다. 즉 대의를 위해 큰 손실을 감수하고 사퇴한 박명기를 돕기 위해 진보인사들이 발벗고 나선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4. 정말 그 정도로 경제적 사정이 어려웠는가?

여기에 대해 특이하게도 검찰이나 박명기 측이나 모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안타깝게 박명기측의 이 주장들은 1심에서 거의 탄핵당한다. 1심 재판부는 박명기측이 먼저 댓가를 요구한 뒤 그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는 착각 속에서 사퇴했으며, 그 가공의 댓가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곽교육감을 집요하게 괴롭혔고, 곽교육감의 선의의 지원을 댓가라 여기면서 받았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이 주장들을 종합하면 1) 검찰측은 곽노현과 박명기가 댓가를 합의하고, 박명기가 사퇴하고, 나중에 곽노현이 약속한 돈을 주었다고 주장하며, 2) 곽노현측은 박명기는 대의를 위해 사퇴한 것으로 알며, 나중에 박명기의 사정이 매우 딱한 것으로 보여 대의를 위해 가난에 처한 사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 강경선이 진보진영의 모금을 시도했으나, 불행히도 곽교육감 외에는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주장하며, 3) 박명기 측은  대의를 위해 사퇴했고, 사퇴한 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으나, 곽노현측에서 지들 멋대로 아주 가난에 빠진걸로 착각하고 돈을 걷어다 주었고, 선거 사퇴하느라 손해도 막심하고 하니 스스로 주는 돈을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어서 받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러고 보면 박명기측의 감정적 대응과 다소 어리석은 증언들 때문에 본질이 많이 흐려지지만 핵심적인 쟁점에서 곽측과 박측은 주장이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1. 박명기 후보의 사퇴: 양측 모두 금전적 댓가와 무관한 사퇴로 주장
2. 댓가에 대한 요구: 양측 모두 금전이 아니라 정책공조에 대한 요구로 주장
3. 2억원을 주고 받은 동기: 곽측은 박측의 어려움을 도와야 한다는 강경선의 호소, 박측은 대의를 위해 사퇴한 자신을 돕기 위한 진보진영의 도움이라 생각.

그런데 이 주장 중 박명기측의 주장만 탄핵된 이유는 당시 박명기 선거캠프장인 양**이 5억, 7억 그러면서 협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박명기측은 참 재미있는 주장을 내세우는대 양**은 박명기를 사퇴시키기 위해 나중에 들어온 스파이라는 것이다. 즉 5억이니 7억이니 요구한 것은 양**, 김**이 자기들끼리 요구한 것이지 박명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보도하는 신문의 타이틀은 참 엉뚱하다.
곽노현 측 “선의의 돈” vs 박명기 측 “선거 완주할 수 있었다”(아시아 투데이)

이건 얼핏보면 논쟁이 되는 주장같지만, 두 주장은 전혀 맥락에 맞지 않다. 이 타이틀만 보면 마치 곽노현이 돈줄테니 사퇴하라 요구했지만, 박명기는 선거 완주할 수 있어서 그 돈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처럼 들린다. 하지만 "선의의 돈"은 선거 끝나고 8개월 뒤의 상황이고, "선거 완주할 수 있었다."는 선거 끝나기 한달 전의 상황이다. 도대체 이 두 주장이 무슨 근거로 vs 양측에 배치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곽노현측 박명기 캠프 사실상 와해단계로 파악 vs 박명기측 선거 완주할 수 있었다"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후보매수가 더더욱 성립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차피 주저앉을 후보에게 돈 약속 따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곽노현 공판 증인신문 대가성 놓고 공방(국민일보)
이 기사도 아주 이상하다. 타이틀을 보면 곽노현이 준 돈이 댓가성이냐 아니냐를 놓고 치열하게 논란이 벌어진것 같지만, 막상 본문을 보면 그런 논란은 전혀 없다. 곽측이나 박측이나 모두 저마다 댓가성이 없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다만 논란은 곽측은 박측이 몹시 딱해보였다고 주장한 반면, 박측은 그렇게까지 딱하지는 않았지만, 댁들의 착각은 자유 이런식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곽노현 교육감은 돈을 준 동기가 선의임은 1심 재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돈을 받은 박명기가 댓가로 인식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즉 관심법을 쓰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니 이 사건의 키포인트는 돈 받을 당시 박명기의 마음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후보 사퇴에 대한 댓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항소심에서 나온 내용은 이게 전부다.

이제 공은 검찰에게 넘어갔다. 어차피 곽교육감이 댓가 지급 약속을 했거나 승인했다는 증거를 찾아낼 가망이 없는 상황이라면 박명기 교수에게 관심법을 사용해서 "그때 댓가라고 인식하고 있었잖아?"라고 추궁하던가 그런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1심 판사는 박명기 교수가 2억을 받은 뒤에도 추가로 1억을 더 요구했다는 점을 들어 박명기가 선의로 받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사실 이럴떄 박명기가 "내가 당시 얼마나 찌질했으면 교육감에게 자꾸 손을 벌렸겠는가? 당시 정말 길바닥에 나앉을 거라는 공포를 느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사건은 끝난셈이다. 하지만 박명기 교수의 자존심이 이걸 용납하지 못한단다. 정말 그렇게 딱하진 않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충분히 사정이 딱한데 자존심 때문에 한사코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여기에 키가 있다.

1심때는 박명기가 "내가 그 정도로 사정이 딱하거나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 아니었다."라면서 자존심을 지켰고, 그러자 판사는 "사정이 딱하지도 않은데 2억을 받아? 너 댓가라고 생각한거 맞네." 이렇게 판단했던 것이다. 만약 여전히 박명기가 자신의 궁핍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명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처사이며, 여전히 자기가 교육감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옛 생각에 잡혀 있다면, 정말 교육감이 되어서는 안됬을 사람임을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 기사들을 보면 또 하나 신기한 것이 검사의 증인심문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검사는 대체 어디 갔을까? 대체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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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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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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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