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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김용민에게 더러운 쉴드 친다고 하는 진보(?)들에게

최근에 어떤 진보진영으로 추정되는 젊은이가 내 트윗에다가 "댁들같이 더러운 쉴드 치니까 짜증난단 말입니다."라고 더러운 리플을 던져왔다. 그가 말하는 더러운 쉴드는 내가 연일 김용민 막말로 도배질을 하는 조중동과 거기 흔들리는 야권, 진보진영에게 "8년전 성인방송에 나가서 한 말과, 박사학위 논문을 대필, 복사한 일의 경중도 구별못하는 것은 계산 장애"라고 쓴 짧은 글이다. 그러면서 그 자는 이 건과 저 건은 별건인데, 저 건을 들이대면서 이 건을 쉴드치는 피장파장 논법을 하지 말라고 점잖게 훈수까지 두었다. 그 훈수를 보면서 내 느낌은 "참 더러운 놈이로군" 하는 생각 뿐이었고, 그래서 아낌없이 블록을 걸어버렸다.

또 어떤 젊은이는 "왜 갑자기 주사 꼴통들하고 같이 노느냐? 옛날 그 부정변증법의 체신을 지키시라"라는 우정어린 설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내가 나의 트친, 페친들을 당황하게 했음은 충분히 인정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작년 기준으로 진보신당 성향이 강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김어준=NL, 따라서 나꼼수= NL 도식으로 보면 나의 최근 행보는 심각한 배신이며 실망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라. 내가 한겨레, 경향, 그리고 소위 순결한 진보진영 인사들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김용민 혹은 나꼼수 쉴드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시종일관 단 한가지, "조중동이 떠들때 흔들리지 말고, 일단 의심하고 좀 더 캐어보라." 이것 뿐이다. 우리편이니까 무조건 옹호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편이니까 잘못해도 잘했다고 우기자고 한 것도 아니다.

단지 1) 의심하라. 2) 다른 관점이 가능하지 않을지 조사하고, 다른 내러티브를 세워본다 3) 더 합리적인 내러티브를 선택한다. 이게 작년 8월말 곽노현 사태때부터 올 4월 김용민 사태때까지 내가 견지한 시종일관한 원칙이었다. 만약 이 원칙이 더럽다고 느껴지는 진보가 있다면, 그들은 조중동 욕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한다. 그 기사가 왜곡된 허위일것이라는 의심도 하지 않으면서 그 신문을 욕한다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혐오한다. 그래서 의심한다. 그래서 모순이 없다. 내가 조선일보를 혐오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기사를 쓰기 때문이다. 곽노현의 경우 조선일보가 악의적으로 왜곡한 기사만 가지고 백서가 하나 나올 정도다.

조선일보는 세련되게 왜곡하고 동아일보는 서투르게 왜곡한다. 그래서 나는 조선일보에서 뭐라고뭐라고 나오면 일단 그것을 기사가 아니라 엉터리 소설이라고 간주하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를 비교하며 읽기 시작한다. 그럼 반드시 한 발 더 나가려다가 실수하는 동아일보(항상 팀킬한다)의 기사에서 빈틈이 나온다. 그럼 그 빈틈을 토대로 해서 좀 더 쑤셔 보면 조선일보의 기사가 교묘하게 조작된 소설임이 밝혀진다. 이게 조중동 읽는 방법이다. 조중동에 나온 기사를 기사이며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안된다. 물론 의심하고 다른 내러티브를 구성해 봐도 확고부동한 사실임을 인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럴때는 그냥 인정하면 된다.

내가 이렇게 조선일보를 냉정하게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두가지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것은 내가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읽지 못하고 일단 조선일보에서 흔들어대면 두려움부터 느낀다. "혹시 선거 * 되는거 아니야?", "혹시 이거 내 자리 달아나는 거 아니야?" 이런식의 두려움.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제대로 대응이 되지 않고 질질 끌려가게 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나는 졸라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삶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트윗 프로필에도 밝혀 놓았지만 나는 칼 마르크스, 존 듀이,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기반으로 하는 좌빨이다. 마르크스는 그렇다 치고, 아도르노와 듀이의 공통점은 이들은 그 어떤 절대적이고 고정된 무엇인가를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정작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기 자신이라는 고정된 무엇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 용서하자.

어쨌건 아도르노의 사유방법인 부정변증법은 무시무시한 방법이다. 굳어진 모든 것은 해체되어야 하며, 무엇이 정립되는 순간 바로 그 외부를 사유해야 한다. 그 외부는 정립된 것의 반대로서 부정이 아니라 아무것도 정립되지 않은 순전한 외부로서의 부정이다. 결국 남는 것은 바로 이 순간 뿐이다. 바로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저 미래에 그려놓은 어떤 이상적인 세계, 이런것은 자본주의의 질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억압하는 또다른 사슬일 뿐이다. 이는 현재를 미래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듀이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미래는 현재의 우리의 노력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예정된 미래, 역사의 단계 따위는 없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 그 순간 순간 되어야 할 것, 그 순간 순간 이겨야 할 싸움을 해 나갈 뿐이다. 그 보다 먼 미래, 그 보다 고상한 차원의 가치와 도덕을 가지고 현재의 싸움과 행동을 재단할 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거 나의 동지, 독자, 혹은 지지자들이었던 친구들의 관점은 너무 경직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현실 외부에 하나의 준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준거의 기준에서 현재를 재단한다. 김용민의 경우도 그렇다. 김용민의 과거가 김용민의 현재를 규정하는 준거가 될 수는 없다. 김용민을 비판하려면 김용민의 지금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김용민을 비판하는 것의 의미 속에서 비판해야 한다. 진보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떨어져 있는 형이상학적 가치도 아니고, 먼 미래에 도달해야 할 어떤 지점도 아니다. 진보는 지금,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만들려는 노력들의 누적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조금의 노력 이상의 것을 할 노력이 없다. 누구도 그 범위를 벗어나서 저 위에서 "전반적인 진보의 관점에서" 작은 행동들을 배치하고 평가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김용민 막말 파문이 일어났을때, 그가 사퇴하는 것이 대의에 맞다거나, 진보의 도덕성의 차원에서 보지 않았다. 다만 아주 단순하고 작은 일, "저것이 정말 사실일까?"에서 시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보도가 짜집기, 거두절미임을, 그리고 8년전 29살때, 성인방송에 나가서 지껄였던 말들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악의적인 짜집기와 단지 젊은 시절 멋모르고 까불었던 말들을 교수직을 기만하고 IOC위원직을 기만한 행위와 같이 퉁쳐서 사퇴를 촉구하는 한겨레 경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로큰롤 음악을 60년대 저항의 상징으로 인정하면서도 비틀즈는 수용해도 롤링스톤즈는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한계가 느껴질 뿐이다. 좀 더 논하고 싶은데, 회의가 있어서 여기서 접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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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