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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80년대 엔엘(NL)과 피디(PD) 경험기

80년대의 망령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결국 진보의 발목을 붙잡아 버리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명색이 국회 제 3당이라는 공당에서 이미 역사적으로 내용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어야 마땅한 옛 정파놀음이 재현되고 있다. 나는 엔엘의 쪽수로 밀어붙이기는 잘알고 있었고, 그들의 낡은 정세관과 도저히 국민과 호흡할수 없는 대북관을 우려하긴 했지만, 주둥이만 열면 품성 타령하는 이들이 이렇게 후안무치하게 막장으로 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소 찝찝한 맛은 남지만 그래도 노, 심, 그리고 서기호 변호사 등을 지원하자는 뜻에서 그리고 아무리 엔엘 패권주의자들이 패악질을 해도 염치는 있겠지 싶어서 가장 결정적으로는 진보당의 의석이 크게 늘어나서 메이저 정당의 꼴을 갖추면 경기동부연합이 오히려 소수파가 될 가능성이 클것이라 보아 진보당을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영석 씨 말대로 엔엘 주사파들의 서기호 끼워팔기에 낚인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엔엘들이 24년이나 지났으니 뭔가 배우고 바뀐 게 있을 것이리라 기대했건만 결국 또 속고 말았다. 하긴 2006-2007년에도 참실련에게 속아서 선거공보에 폼날 말들 실컷 만들어줘서 교찾사 이기게 만들어 줬더니만, 정작 선거공보의 내용은 하나도 실천 안해서 병신된 적이 있었다. 역시 그 버릇은 절대 남 주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1987년에는 엔엘에 속해있다가 1988년 부터 피디로 옮겨갔기 때문에 두 정파의 특징에 대해 모두 아는 편에 속한다. 그래서 최근 이 정파간의 갈등에 어리둥절할 일반 시민들을 위해 경험담을 좀 풀어보려 한다. 무려 25년전의 청산되었어야 할 낡은 이념 서클들이니 새누리당만도 못한 사실은 둘 다 청산되어야 할 것들이지만, 그래도 청산되어야 한다면 엔엘이 먼저 청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미리 내린 결론이다. 그 이유는 엔엘은 1980년대에도 이미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처음에는 엔엘이었냐고? 처음 엔엘에 몸담았던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원래 엔엘이 더 흔했으니까. 운동권이다 싶으면 일단 엔엘일 정도로 당시에도 엔엘과 피디의 쪽수에는 차이가 많았다.

엔엘이 더 흔한 이유도 별 대단한 것 없다. 엔엘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국 근현대사 책 몇 권 읽고서 "아 빡친다. 식민지의 설움이여!" "아, 갈라진 내 조국이여!" 하고 울분만 토하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모든게 미국과 그 앞잡이 때문이다.!"하고 피끓는 증오심을 드러내며 소주잔만 탁 내려 놓으면 되었으니까. 그러니 입시공부하느라 기본교양이 부족한 사실은 청소년에 불과한 한국 대학생들이 이런 감정 놀음에 울컥하며 빠져드는 것은 신기할 것도 없다. 게다가 대학생의 특권도 인정해준다. 대학 졸업하고 그럴듯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진보적 사회진출"이라 불렀고, 가부장적인 행동도 "민족 정서"로 합리화 시켜 주었으니 사실 엔엘에서 학생운동을 할때는 존재론적인 고뇌는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피끓는 청년학도면 되니까. 게다가 민족의식, 애국심 따위의 덕목은 놀랍게도 박정희 덕분에 초, 중등학교때 귀에 못히 박힌 친근한 덕목들이었다. 그러니 박정희가 펼쳐놓은 이순신장군, 김구선생 신성화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일본놈에 대한 증오를 미국놈에게로만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엔엘 선배들은 듣기 좋은말, 들으면 청소년의 감정에 확 와 닿는 말을 했고, 술도 잘 사주었고, 핀잔도 잘 주지 않았고,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즉 품성이 좋았다. 그러니 주변에 학생들이 모여들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엔엘이 되었다. 이렇게 엔엘은 강고한 조직망을 갖추기 보다는 인맥과 알음알음으로 엮어나가는 재주가 있었다. 사실 이건 일종의 다단계 판매업자들의 기술인데, 이걸 그들은 대중조직 사업이라 불렀다.

반면 피디(처음에는 CA) 선배들은 매우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언제나 어려운 말을 했고, 눈빛은 너무 결연해서 잘못 말 걸었다가는 쳐 맞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자꾸 어려운 공부를 하자고 하고, 학생의 기득권을 놓고 노동자가 되는 것 때문에 존재론적 고뇌를 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같이 엮였다가는 신세 완전히 망칠 것 같은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조직적이었다. 자기들끼리 모였고, 자기들끼리 미리 의사를 결정한 다음에 공식적인 협의체에 들어갔다. 그 비밀조직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대중들을 살짝 경멸하는 느낌마저 있었다. 그러니 대학 1학년때부터 바로 PD되는 녀석들은 매우 드물었다.

NL과 PD의 차이를 한 마디로 보여주자면, 어떤 중요한 집회에 친구를 동원할때 엔엘은 "집회 같이 갈거지?" 하고 친근히 종용하며, 피디는 "집회의 정당성"에 대하여 강의를 한다.

그럼 왜 나는 엔엘을 집어 치웠는가? 1980년대에도 이미 말이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깊게 들어가자면 끝이 없는데, 그 대표적인 엉터리 이론중에 식반론이라고 있다. 식민지 반자본주의(반봉건주의)론이라는 건데,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기 때문에 정상적인 자본주의로 발전하지 못하고 봉건적인 모순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기형적 사회라는 것이 그 주장의 골자다. 따라서 한국의 당면한 변혁과제는 우선 미국놈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 자주적인 자본주의 근대화를 이루고, 그 다음에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이 중 미국놈 몰아내는 단계를 먼저 확립한 선진사회로서 이미 사회주의에 들어선 우리의 지향점이라고 제시되었다.

그런데 1987-1988년 한국 사회는 어느모로 보나 반봉건사회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전형적인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처럼 식민통치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박약했고, 미국으로부터 자주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한의 모습은 어디를 보아도 평등한 사회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막말로 김일성에 비하면 전두환은 훨씬 착한 편이라고 여겨졌고, 북한의 지배를 받을 바에는 차라리 미국의 식민지로 남는게 났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 그 품성 좋던 선배가 별안간 악마로 변했다. 너무도 분노해서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아무리 품성 좋은 엔엘 활동가라 할지라도 "나는 부칸이 싫어요" 하는 순간 악마로 돌변하는 데는 10명이면 10명 모두 1초면 충분했고, 예외는 없었다.

그러다가 1988년 3월, 아크로폴리스라 부르는 학내 광장에서 집회가 열렸다. 전방입소훈련 반대 집회였는데(놀랍게도 당시에는 대학생들을 1주일씩 전방 부대에 보내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참 대단한 시대였다), 슬로건은 "양키 용병 교육 반대"였다. 그러니까 대학생에게 강제로 군사훈련을 시키는게 문제가 아니라 남한의 군대는 양키용병이기 때문에 그 훈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하긴 그렇게 주장할수밖에 없을 것이, 온 국민을 강제군사훈련에 동원하다시피 하는 부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군정치의 부칸을 부정할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 그들의 대갈빡 속에 든 생각은 대학생이 군사훈련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미국이 지배하는 남한군이 아니라 자주적인 부칸군이라는 전제하에서.

듣다못한 어느 학생이 이런 문제제기를 했다. "전방입소 군사훈련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양키 용병교육 이런게 아니라 이 제도가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을 병영화 하는 그런 반민주적 제도의 철폐를 요구하는 맥락 속에서 전방입소 훈련을 거부해야 한다. 게다가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군사훈련을 거부한다고 하면, 북한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무슨 소리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무리 되지 못했다. "북한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사방팔방에서 "품성이 훌륭한" 엔엘 학생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그 학생을 집단 구타했기 때문이다. 조 대표의 부정경선 발표를 심한 욕설로 저지하고, 심지어 운영위원회를 마치 어버이 연합처럼 깽판쳐서 가로막는 경기동부연합 청년들의 모양을 보니 엔엘은 저 24년전 버릇을 전혀 버리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바로 그날로 나와 엔엘의 관계는 끝났다. 이미 1988년에도 엔엘은 민주주의와는 영 거리가 멀고, 다수가 형성되었다 하면 자기들과 뜻이 다른 소수를 주먹과 발길질로 몰아내는 그런 집단이었던 것이다. 저 야만적인 모습을 견딜수 없었던 나는 몰매맞던 학생을 구하려고 소리쳤고, 다행이 이성을 갖고 있던 대다수의 일반학우들의 제지로 엔엘들의 만행은 중단되었다. 나는 그때 6.25 남침도, 도끼만행사건도, 아웅산테러도, 기타 북한의 수많은 만행도 반공교육 때문에 조작된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화 운동권이 아니며, 다만 북한에 동조할 세력을 늘리기 위해 당시 인기가 많았던 민주화 슬로건에 편승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관용과 부드러움은 "부칸을 비판하지 않는 한도내"에서의 관용이었으며, 부칸과 관계되는 사안, 그리고 자신들의 주도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철저히 불관용적이고 야만적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 나이까지 처먹어서 꼰대가 되었다면 과연 어떤 인간이 되었을지 안봐도 3만리 아닌가?

그렇게 몰매맞던 학생을 구하고 나도 마이크를 잡고 뭐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엔엘 학생들이 집단구타대신 큰 소리로 "반전반핵가"를 부르며 발언을 방해했던 기억은 난다. 몰매맞던 학생은 바로 인접한 학과인 역사교육과 과회장이었으며,그와 나는 금새 의기투합했다. 그는 2학기때 PD진영의 후보로 나와서 사범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는데, 나는 그 옆에서 북을 치며 문선대 노릇을 했다. 알고보니 그 역시 원래 엔엘이었다가 건대사태 이후 환멸을 느끼고 나온 케이스였다.

이렇게 나의 PD시절이 시작되었다. PD들의 삶은 자뭇 비장했다. 술도 별로 안 마시고, 세미나는 징그럽게 많이하고, 문건들 쌓아놓고 밤새도록 회의하기 일쑤였다.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정치경제학'으로 이어지는 입문서에 이어서 '공산당 선언', '공상에서 과학으로', '고타강령 비판'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독일이데올로기', '정치경제학 비판 강요', '자본론' 등 마르크스의 저작,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무엇을 할 것인가?','국가와 혁명',  '일보전진 이보후퇴', '임박한 파국' 등의 레닌의 저서들을 숨가쁘게 읽고 토론했다. 당시에는 다들 금서였기 때문에 번역본이 없으면 몰래 입수된 원서를 읽었고, 따라서 독어과인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전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회사원이 되어 부르주아의 돈을 벌어주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빛나는 국립대 졸업장이 주는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PD그룹 내부에서는 늘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엔엘처럼 진보적 사회진출로 모두 미화할수는 없었다. 그나마 사범대학에 다닌 나는 교육운동이라는 영역으로 진출한다는 미명하에 임용고시를 보았지만... 몰매맞았던 학형은 끝내 교직진출을 거부하고 노동운동판에 뛰어들었다가 뒤늦게 교직으로 진출했다.

선후배간에도 가차없었다. 아무리 선배라 해도 조금이라도 기회주의적이거나 개량주의적인 헌행을 보이면 사정없는 비판의 칼날이 날아왔다. 한 후배는 모든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극좌 모험주의자라면서 면박에 가까운 비판을 했고, 나 역시 그 정도 수준의 반격을 했다.  남자친구가 다소 중도파의 포지션을 취하자 가차없이 결별을 선언하는 여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운동을 했으니, PD활동가들은 자연스레 언제나 심각하고 찌푸린 얼굴을 하게 되었으며, 늘 어렵고 까칠하게 말하고, 오만하게 행동했다. 그러니 엔엘에 비해 쪽수가 발리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PD들은 소위 커트라인 높은 대학에서나 집단을 이룰 정도의 숫자가 나왔고, 지방에서는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마 도시의 경험은 엔엘의 식반론을 공허한 담론으로 여기게 만들지만, 낙후된 지역의 경우는 오히려 식반론이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난한 농민들도 대개는 자영농이라는 사실은 뭘로 설명할런지....

여튼 결론은 엔엘은 다수파가 되고 피디는 소수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심각히 여기지는 않았다. 엔엘은 단지 대중주의자에 불과하고 우리는 빛나는 전위조직이니 소수라는 것이 오히려 더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자랑스러움과 확신은 1989년 천안문 사태때 크게 타격을 받고 1990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천지사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사회주의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으니 전위조직도 필요성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그 폐단과 고통이 너무 뻔히 보였다.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 대안을 찾기 위해 PD의 지도급 인사들은 유학을 떠나거나 연구모드로 돌입했다. 진중권, 이진경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로써 단일 대오로서 PD는 사실상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따지고 들자면 제파그룹, 노급그룹 하면서 복잡하지만 그건 접어두고).
물론 과거의 PD이념은 절대 바꿀 필요 없다는 완강한 집단들도 있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결국 그 숫자로도 더 적은데다가 다양한 써클들로 분화된 PD는 무슨 이유인지 확신할 이념도 이론도 없는데도 강철같은 대오로 뭉친 엔엘에게 당할수가 없게 되었다. 엔엘의 철학과 이념은 24년이 지나면서 모두 낡은 것이 되었지만 "뭉치자, 대동단결주의"는 면면히 이어져왔던 것이다. 뭉쳐서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철학도 비전도 없는 집단이 진보진영의 사실상 유일한 조직된 힘이 되고 만 것이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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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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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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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