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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80년대 NL PD 경험기 (2) PD라고 까방권 아님

제목은 NL PD 경험기지만 이번 포스팅의 실제 내용은 내가 NL을 나온 다음의 이야기니까 PD에 대한 것이다. 이는 지난번 포스팅이 NL만 비판하고 은근히 PD를 옹호하는 종파주의적인 글이라는 항의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나는 절대 PD에게 까방권을 주지 않았다. 실제로 전교조 활동가로서 나는 족보는 PD에 두고서 활동은 NL과 가까운 참실련 언저리에서 하고 있어서 PD성향의 교찾사로부터 배신자급 비난을 받으면서 정작 참실련에도 온전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어쩌면 그런 경계인으로서의 위치가 나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시야를 유지시키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흔히 PD라고 하지만 실제 내가 그쪽 그룹에 포섭(?)된 1988년에는 CA 그룹이라 불렸고, CA그룹이 나중에 ND와 PD로 갈라졌다. 그리고 PD도 하나의 단일 정파가 아니라 반제반파쇼PD, 여명, 노동계급 등의 정파들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하지만 서로간에 거의 인격말살적인 논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NL을 칠때보다 결코 더 약하지 않게 자기들끼리 치고 받았다) 이들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CA그룹에서 흘러나온 정파들, 그리고 그와 유사한 CPC그룹에서 흘러나온 정파들(CPC가 뭐냐고? 너무 깊게 파지는 말자.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니. 그냥 그런 사람들 있었나보다 하자)을 가리지 말고 그냥 PD라고 통칭하자.

PD의 가장 큰 특징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혁명투쟁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혁명 전위당(전위조직)이 구성되고, 이들의 철저하고 과학적인 전략 전술에 의해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NL과 PD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민족 대 계급, 대중 대 전위, 품성 대 과학 인 것이다.

따라서 PD는 NL과 달리 빡치고 울분을 토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설사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착취에 빡치고 흥분할 수 있지만, 과학적인 전략 전술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경로를 세밀하게 밝혀내야 할 '전위'들은 철저히 냉정하고 합리적이라야 했다. 이건 레닌의 영향력 있었던 책 '무엇을 할것인가?'(What is to be done이나 무엇이 되었어야 했나 아닌가? 여튼 번역본 이름은 저랬다)에서 비롯된 것인다.

여기에 따르면 착취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지배자들에 맞서서 저항하는 '자생성'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분노와 직관에 의존한 투쟁은 먼 미래를 설계해 낼수 없기 때문에 작은 목표라도 달성하면 쉽사리 사그라들며, 지배계급의 사탕발림, 즉 개량 시도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조합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자기 공장, 자기 조합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를 폐절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 하지만 이 책무는 자본가들에 대해 빡친다고 해서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의식적인 학습을 통해서만 깨우칠수 있다. 이 깨우침은 개별 공장, 노조 단위에서 천만번 투쟁한다 한 들 생겨나지 않으며, 노동계급 외부에서 유입, 즉 교육되어야 한다. 이게 당시 PD들은 노래처럼 외우고 다녔던 자생성과 의식성 테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실제 투쟁의 힘을 발휘할 노동계급(주로 노동조합)과 이들에게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과 전망을 수혈해줄 사회주의 지식집단(전위당)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학생운동권의 PD들은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노동자가 아니니 당연히 전위다. 그런데 PD의 전위는 NL의 전위처럼 먼저 각성하고 먼저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싸움의 전망과 미래사회에 대한 설계도를 그리고 그 경로를 과학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PD의 전위는 빡 세게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졸라 공부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 밝은 사람들이라면 87년 789 대투쟁이 바로 PD가 등장하게 된 배경임을 이론만으로도 바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PD의 운동관 조직관은 학생회를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PD들은 공식적인 학생회 외에 일종의 지하 학생회인 'PD건추'라는 지하당을 세웠다. 나는 당시 'PD건추'의 노학동맹위원장이라는 무시무시한 타이틀을 강제로 부여받았다. 각 단과대학별로 PD세포들을 건설하였고, 각 단과대학 PD대표들이 PD건추 중앙 회의에 참석했다. 이 중앙회의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조금만 덜 투쟁적인 안건을 제시하면 즉시 "개량주의자!" "수정주의자!"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NL보다 조금 나은 점이 있다면 학번이고 뭐고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봉건적 위계서열은 벗어났다고 할까? 제 아무리 명망가로 높은 존경을 받던 선배라도 일단 "개량주의자!" 소리 듣기 시작하면 그날로 실각이었다. 그러니 이 중앙회의는 저마다 자신의 선명성을 강조하는 자리가 되었고, 결국 졸라 치열하고 과격하고 심지어 자기파멸적인 투쟁지침이 채택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총 지침이 확정되면 각자 자기 단과대학으로 가서 단과대 학생회를 이 지침에 따라 움직이도록 프락했다. 물론 이들은 각 단과대학에서 다수의견이 아니었지만, 소수파로서 다수파를 주도하는 능력은 당시 PD활동가에게는 생명과 같은 능력이었다. NL10명과 PD 1명이 같이 회의를 해도 언제나 말하는 쪽은 PD였으니까. 말로 해서 안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뜻을 관철시킨다. 혁명을 위한 길에는 모든 행위가 '전술'로서 정당화된다. '품성'(?) 이런건 PD에게는 개풀뜯어먹는 소리다. 혁명가의 유일한 품성은 싸움을 이기게 해주는 능력이지 다른 거 아니니까.

만약 5월 5일 통합진보당 운영위원회 실력저지가 주사파가 아니라 PD가 시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운영위 표결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욕지거리를 하는게 아니라 일단 단상부터 점거하고 유시민 감금해서 아무데도 못가게 했을테니...부끄럽지만 그게 전형적인 PD방식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게 경기동부연합 주사파가 민노당이나 통진당을 말아먹은 방식이 딱 이랬다는 것이다. 완전 피디건추 방식이다. 다만 경동연은 쪽수로 밀어붙이고 PD는 말빨로 밀어붙인게 다르달까?)

이러한 PD들의 등장은 당시 학생운동권의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나 감상적 민족주의 수준을 넘어 노동자, 빈민들의 투쟁과 학생운동의 동맹이 시도되었다. 나 역시 구로공단을 집처럼 드나들었고 '슈어 프로덕츠'라는 공장에 들어가서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같이 먹고자고 하면서 싸움을 이끌었고(내 혼자 생각에 ^^), 구사대와 들이 받고, 사당동, 신림동, 서초동, 도곡동, 봉천동 등지의 판자촌에 공부방을 세운 뒤 빈민들을 각성시키려고 했으며, 철거가 개시되자 철거민들과 같이 철거용역들과 박이 터지게(정말 박이 터졌다) 싸웠다.

당시 내 자취방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걸핏하면 들이닥쳐서 칼잠을 자곤 했다. 그 중에는 아직도 내 인생에 큰 짐이 된 친구도 있다. D산업이라는 공장의 노동자였는데, 나보다 두어살 어렸다. 그 친구는 나의 마르크스 강의(?)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세상을 절딴내는데 평생을 바치기로 젊은 혈기에 같이 맹세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마르크스주의자로 사는 것과 노동자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사는 것은 그 결이 달랐다. 결국 그 친구는 회사에서 해고되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회사에도 쉽게 취직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년 뒤에는 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이 사건은 PD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고 나 역시 가지고 있었던 관념적인 과격성과 이상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이때 부터 나는 PD적 경향만 유지한체 PD조직 자체와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도 PD조직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당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는 PD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당시 정부는 공안부는 주사파, 안기부는 PD를 조지는 환상의 분업이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안기부 요원들의 꿈은 단병호를 잡는 것이었다.). PD건추에서는 여기에서 조직을 지키기 위해 가짜 그림을 그렸다. 가짜 지도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가짜 지도자가 체포되었고 적당한 고문 끝에 가짜 지도부 요원들을 불었다. 빌어먹을 나는 그 가짜 조직도에서 무려 PD서열 3위의 초 거물이 되어 있었다. 당시 각 단과대학 책임자들은 죄다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는데, 나만 사범대 학생회장 선거에 낙선하고 말았으니 아마 조직에서는 나를 도마뱀 꼬리로 배치한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두달 도바리를 쳤다. 대구 경북 등지까지 도바리 쳐서 하양에 있는 농장에서 돼지 똥치우는 인부로 지냈다. 그런데  조직에서 연락이 왔다. 경찰에서도 '집시법 위반'으로 소환장을 보냈으니 대처하란다. 젠장 더블수배다. 그런데 묘수가 떠올랐다. 당시 경찰과 안기부는 절대 정보를 교환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안기부에 잡혀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찰에 체포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찰서에 자수해버렸다. 조직사건에 연루되는 쪽 보다는 집회와 시위법률 위반으로 걸리는 쪽이 당연히 타격이 적었으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나 할까?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기소유예 정도로 마무리 되어 별은 달지 않게 되었다. 당시 경찰들은 내 얼굴이 선명하게 찍힌 채증사진을 들이댔지만 나는 그게 누군지 모른다고 버텼고, 다른 건으로 체포되어 온 후배들에게도 "이 새끼 권재원 맞지?"라고 다그친 모양인데, 그들도 꿋꿋하게 "첨 보는 사람인데예?" 하고 버텼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고문이 푸시업과 오리걸음이었다니 나중에 마주앉아서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을 선동질하고 다니는 PD들은 지배층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이들은 품성론 따위의 세례를 거부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싸움과 갈등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은 즐기는 경향도 있었다. 한 마디로 PD는 싸움꾼이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대립과 갈등의 지점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노동자, 도시빈민들을 어떻게든 싸움터로 끌고와서 들이 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게 PD를 영원히 소수파로 머무르게 만들었다. 그들은 싸움을 좋아했고, 싸울 상대가 마땅치 않을때는 자기들끼리라도 싸웠기 때문이다. PD가 10명이 모여 있으면 10개의 정파가 생긴다고 할 정도로 이들은 어디서나 특히 자기들끼리 싸웠다. 처음에는 노선에 대한 논쟁이었지만, 결국 사람의 일인지라 감정적인 대립까지 번졌다. 그래서 PD는 1989년 처음 등장해서 거대한 정파로 자리잡던 그 때 이외에는 한번도 단일한 정파를 이루지 못했다.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나아가 전국연합, 이런 식의 조직은 PD의 성향상 불가능했다. 그 정도 규모가 모이면 서로 투쟁방향의 올바름을 놓고 다투는 소리로 밤을 지새워야 했으니. 그러다 보면 그 속에서 "네가 개량이다." "너는 좌익 모헙주의자다!" "에잇 수정주의자" "뭐라고 블랑키스트!" 등의 소리가 난무했으리라.

게다가 PD들은 모두 나름 치열한 이론학습을 통해 성장한 과학적 사회주의 전위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자신이 이론가이며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여겼고,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로 논쟁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 결국 이들은 대중을 상대로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89년 전노협, 전교조의 등장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드디어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시작되었으니, 전위답게  우리는 단위 조합의 경제투쟁이 아니라 지배계급 전체와 싸우는 정치투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문제는 이 말을 공단에 가서 직접 그대로 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출퇴근하는 길목에 가서 "해방의 길"이라는 참 노골적인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면서 "이제 노동자들이 주인되는 사회주의 세상을 건설합시다! 자본주의 질서를 폐절하고 국가기구를 장악합시다!" 하고 외쳐대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무도 듣지 않았고, 심지어 누군가가 신고까지 해서 죽도록 달려야 했다. 이미 출근시간이 지난 공단에는 공장 벽들만 몇 킬로미터에 걸쳐 뻗어 있었고, 인적이라고는 찾을 길이 없었고 어디 숨을데도 없었다. 결국 전투복을 입고 무장을 해서 우리보다 더 빨리 지쳐버린 경찰들이 추적을 포기할때까지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지난번 포스팅에서 내가 다소 PD에게 온정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속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서술에서 PD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대체로 PD들은 순수하다. PD조직에서는 슬로건 잘 만들고 팜플렛 잘 만드는 사람이 왕이다. 그러니 술 잘받아주고 인간관계 잘 맺어서 중책에 올라간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조직에서 크고 싶으면 글을 잘 쓰던가 싸움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소위 인간미는 찾기 어렵게 된다. 까칠하고 오만하고 대중들이 다가서기 어렵고, 대중들에게 다가서려 하지도 않는 그런 인간이 된다. 전위의식에 쩔어서 어딜 가나 지도하려 들고 지적질 하려드는 그런 버릇도 생긴다. 사상투쟁이 버릇이 되어서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꼬투리를 잡아서 언쟁을 벌이는 그런 버릇이 생길수도 있다. 비단 진중권 뿐 아니라 PD출신들은 대체로 모두까기 인형이다.

이런 부분들은 PD출신 활동가들은 깊이 되새겨야 한다. NL들의 패권주의가 잘못된 것은 사실이다. 또 NL의 주장이 낡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째서 지식인 집단인 전교조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운동조직, 단체에서 NL들에게 압도적인 다수를 내어 주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 '소수파'라는 것으로 핑계를 삼아서는 안된다. '소수파'가 된 것에도 책임을 져야하며, 번번히 소수파로 밀려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면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까칠한 PD는 이런거 잘 인정 안한다. 심지어 소수파인 상황을 즐기는듯해 보이기도 하며, 설사 다수파가 된다 하더라도 그럼 자기들끼리 싸워서 반드시 두 세개 파로 찢어진다. 그리고는 마르크스 레닌은 커녕 푸코, 들뢰즈, 네그리까지 섞어가며 졸라 어려운 말로 왜 찢어져야 했는지를 잔뜩 설명한다. 그런 말 듣고싶어하는 사람은 자기들 뿐이다. 참으로 고질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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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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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