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곽노현, 박원순의 서울교육희망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동아일보

얼마 전 동아일보에 김순덕의 횡설수설곽노현의 ‘교육 희망선언’  이라는 참으로 겸손하고 솔직한 논설이 하나 게재되었다. 이 논설이 겸손한 이유는 글쓴이가 너무도 자기 수준을 겸허하게 밝이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한 이유는 논설의 제목이 실제 논설의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조중동 기자들 중 이렇게 기사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참으로 이 논설은 글쓴이나 그 내용이나 모두 '횡설수설이다'

이 논설의 구조는 이렇다. 어떤 훌륭한 교사의 사례를 소개하고, 교육개혁은 이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곽노현 교육감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교육희망선언은 굵고 큰 이야기만 해서 갑갑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김순덕은 자신이 원하는 작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바꾸려면 학교 현장에서는 거의 전쟁과 같은 노력, 순직을 각오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사의 깡다구와 무한노력에 기대는 교육개혁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김순덕이 예로 들고 있는 박선생을 보자. 이 사례에서 박선생은 ADHD로 교사에게 막말을 하던 승리란 아이의 밥도 챙겨먹이고 바지까지 빨아 입히고 칭찬도 해주면서 장애인인 승리 엄마 역할까지 대신함으로써 마침내 승리를 바꾸어내었다. 그러면서 내 아이가 이런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학부모의 소원이고 교육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육감과 시장이 발표한 교육희망선언의 학생회, 학보무회활성화, 교원업무정상화, 대학입시개혁, 사회의 변화 등을 답답한 원칙론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 말을 통해 우리는 김순덕은 교육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 우선 이 승리와 박선생의 사례는 아무리 봐도 소설에 가깝다. ADHD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수용기 장애지, 학생의 가치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적절한 신경정신과 치료가 병행되지 않으면 절대 치료되지 않는다. 폐결핵 치료가 헌신적 간호로 이루어지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지금 김순덕은 한국신경과학회에서 발표해도 될 정도로 놀라운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사람은 ADHD를 그저 무례하고 주위산만한 것 정도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박선생이 정신 제대로 박힌 교사라면 바지를 빨아줄 것이 아니라 적절한 치료기관을 찾아주어야 한다. 교사는 보모가 아니라 전문직이다. 교사의 지원은 전문적인 것이라야지 단지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김순덕 기자 같으면 전문적 능력이 탁월하지만 인간성은 다소 문제가 있는 의사와 열과 성을 다하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의사 중 누구에게 몸을 맡기겠는가? 교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기자는 교사를 뭘로 보고 있는지 스승의 날에 교사를 비하하는 논설이나 쓰고 있다. 만약 신문의 날에 기자를 단지 워드나 열심히 치면 되는 직업으로 소개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또 김순덕은 모든 엄마들이 이렇게 헌신하는 교사를 원한다고 한다. 자, 모든 엄마들이 박교사처럼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교사를 원하고, 교사가 거기에 부응할것을 요구받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결과는 아무 교육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사의 시간과 관심은 희소성이 있는 자원이다. 교사의 하루는 48시간이 아니며 유독 교사에게만 다른 노동자의 몇배를 일하라고 강요할 근거도 없다. 그러니 학급 인원이 30명이라고 할때 승리같은 아이는 5/30 정도의 관심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네명의 학생에게 가야 할 교육적 관심을 그만큼 더 사용한 결과가 된다. 그런데 모든 엄마가 다 이렇게 자기 아이만의 특별한 대우를 요구한다면 이는 교육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설사 아주 초인적인 교사가 있어서 그렇게 하려고 하더라도 당장 두가지 문제에 부딪친다. 첫째는 헌신적 보살핌으로는 치료되지 않는 ADHD를 치료하자면 수십만원을 들여 검진을 받아야 하며, 주사 한 방에 15만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또 ADHD는 임신기간동안의 유해환경 노출 등으로 인해 발병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깝게도 이는 주로 빈곤한 계층에서 일어날 개연성이 높은 일이다. 그래서 실제로 학교에서 ADHD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을 면담해 보면 대개는 가정형편이 저런 고가의 진단과 치료를 받을 상황이 못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당장 개별 교사, 개별 학교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을 만난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복지가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시장과 교육감이 손을 잡고 이런 교육복지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김순덕 같은 엄마들은 자기 대신 아이 빨래 해주는 교사를 바랄지 모르지만, 제대로 배운 엄마들은 교사들의 노력을 좌절로 마무리하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을 바랄 것이다. 

그런데 교육복지 체제가 잘 갖추어 졌더라도 또 문제가 있다. 현실의 학교에서 박선생 같은 교사는 설 자리가 없다. 우선 승리 바지를 빨 시간이 없다. 승리에게 관심을 좀 기울일만하면 반드시 무슨무슨 공문을 써 내라거나, 무슨무슨 사업결과 보고를 하라거나 하는 각종 행정업무가 쏟아져 내릴 것이다. 게다가 승리를 위해 필요한 기자재나 하다못해 간식 하나를 구입하려 해도 에듀파인이라는 전자재정 시스템 속에서 수십분을 헤매면서 결재를 받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헌신의 헌신을 거듭해서 ADHD 학생 수십명을 정상인으로 바꾸어 놓는 놀라운 개가를 올렸다 한들, 그런다고 해서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며, 교장, 교감 되는데 0.0000001점의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다.  까먹느니 개인 시간이며, 에듀파인에 고생하다 결국 써버린 자기 돈이다. 반면 아이들을 외면하고 행정업무 열심히 한 다른 교사들은 점수 잘 받아서 교감, 교장으로 쑥쑥 승진한다.

그래서 교사에게서 행정업무를 덜어내는 교원업무 정상화가 필요하고, 왜곡된 교사의 승진제도의 개혁이 필요하고, 행정위주의 비민주적인 학교구조의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김순덕 기자는 그런데 이런 개혁이 팍팍하고 답답하다고 말하면서 "교사가 학생을 잘 가르치는 학교, 학생이 박 선생님 같은 교사로부터 잘 배우는 학교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면 안 되나."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말 팍팍하고 답답한 사람이다. 말 참 잘했다. 바로 이게 그런 학교를 만들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아 참, 박선생님은 아니다. 승리와 박선생님 사이에서는 아무런 배움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안되었지만 김순덕이 예로 든 박선생님은 결코 전문직인 교사라 불릴만한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교사가 학생을 잘 가르치는 학교"도 결코 21세기에 걸맞는 사고방식이 아니다. 이건 교육학 용어로 전수모형(transmission)학습관에 입각해 있는데, 이미 1960년대에 모두 소멸된 낡은 학습관이다. 학교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학교에서는 '가르침'이라는 용어 대신 '교수-학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텐데 참 한심하다. 즉 학교는 교사의 가르침과 학생의 배움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곳이다. 그래서 학교에 가장 필요한 교사는 잘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의 배움을 잘 이끌어내는 교사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학교는 잘가르치는 교사의 판타지에 너무 빠져있었고, 이제야 거기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더니 김순덕은 느닷없이 "부모들은 자녀가 왕따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공부하기 싫어하던 아이가 선생님 잘 만나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고, 친구들과 잘 못 지내던 아이가 특별활동 덕분에 성격이 달라지는 것같이 작은 변화여도 고맙고 충분하다."이렇게 말한다. 이런 일들이 아주 사소하고 작은 변화인양 말하고 있다. 공부 싫어하는 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갖게하는 일이 작은 변화인가? 친구들과 잘 못지내던 아이가 특별활동 덕분에 성격이 달라지는게 작은 변화인가? 이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가 선생님들의 헌신 혹은 교육감의 아주 작은 정책 하나로 가능한 일인가? 사회 구조의 문제, 제도의 무제, 학교 문화와 풍토의 문제, 교원 업무구조 왜곡의 문제가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러니 이걸 교육감과 시장이 같이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서율교육희망선언인 것이다.

참고로 공부 싫어하는 아이가 공부에 흥미 갖는 작은 기적을 보고 싶으면 곽노현 교육감의 혁신학교를 방문해 보기 바라며, 특별활동 덕분에 아이가 밝아지는 기적을 보고 싶으면, 곽노현 교육감의 문예체 활성화 사업을 보기 바라며, 왕따가 사라지는 기적을 보고 싶으면 곽노현 교육감이 시동을 걸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교육연극을 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필요한 돈, 시설,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마련되는가 보려면 앞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펼쳐나갈 교육복지사업을 보기 바란다.

그리고 당부하는데 기자라면 적어도 글의 제목은 제대로 읽고 쓰기 바란다. 서울교육희망선언은 곽노현의 것이 아니라 곽노현과 박원순의 공동선언이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