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의 기억: 반북주의의 원흉은 북한 자신이다

요즘 종북, 반북 논란이 요란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수도 진보도 서로 입조심하는 묘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보수쪽에서는 조금이라도 북한에게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심지어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종북으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워한다. 진보쪽에서는 조금이라도 북한에게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면, 아니 종북주의자들에게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면 수꼴로 몰릴까봐 조심한다. 사상적 계엄이 따로 없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차갑고 냉정한것 같다. 애초에 많은 시민들이 통진당 사태에 분노했던 것은 1) 이렇게 허술하고 엉성한 경선으로 후보를 선출했다는 것, 2) 그렇게 선출된 후보들이 빠득 빠득 안 물러나겠다고 버티는 것, 3) 그 과정에서 때거리로 몰려나와 당대표를 폭행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행동을 하는 것, 4) 이 과정에서 국민보다 당원을, 당원보다 자파 당원을 우선시 하는 종파주의적 행태를 보인 것이지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시민들은 이제 북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소위 진보가 주장하는 통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보수가 주장하는 남침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통일의 경우는 실제로 우리가 얻을 실익이 거의 없고, 북한과의 공통점 보다는 차이를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으며, 북한 정권이 절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상 북한의 현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한, 한반도의 통일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 외에는 답이 없다. 북은 이미 소위 적화통일을 할 의지도 힘도 상실한 상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보수진영이 국민들을 두렵게 만들기 위해 퍼뜨리는 남침위협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관심이 없다. 북한이 남침을 할 경우 그 귀결은 오히려 북의 궤멸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과정에서 서울에 최소 5000발의 장사정 포와 각종 스커드 미사일이 날아온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잃을것이 없는 북한과 잃을 것이 많은 남한의 차이이다. 따라서 시민들이 남북 대결국면을 싫어하고 햇볕 정책을 지지한다 해도 그것은 북한을 좋아하거나 혹은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단지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그럴 뿐이다.

하지만 2002년만 해도 북한에 대해서 이렇게 냉정하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직후 불타올랐던 민족주의는 그대로 남북화합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 과정에서 하일라이트를 이루었던 것이 바로 부산 아시안 게임이었다. 이때 남북 선수단 동시입장, 그리고 날마다 사진 공세를 받았던 이른바 북한의 미녀응원단 열풍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때 식자층을 중심으로 남과 북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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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청년을 보면서 "민족은 순결해야 한다. 조선민족은 순결하다. 저런 머리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여성의 모습은 지금 다시 보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같은 공산권 우방국인 쿠바 대사를 "어디 깜둥이가 더럽게 조선을 드나드냐?"며 집단 구타한 대형사고를 친 그들의 그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직도 그대로임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냥 애교로 넘어갔다. 또 유난히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한국인들은 오히려 그런 말을 교훈으로 듣기까지 했다. 노친네들이 "그 말이 맞지. 거 머리 꼴이 그게 뭐냐?" 이럴 정도였으니. 그리고 교과서에서 받은 반공교육 처럼 북한이 그런 억압체제는 아니고, 단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다소 올드 패션드 국가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시안게임 기간 내내 내숭떨며 본색을 잘 감추던 미녀응원단이 갑자기 폭발한 것이다. 이른바 김정일 현수막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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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모양인데, 이 사건은 아주 결정적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반공교육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 증명시켜준 사건이다.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저들의 모습과 통진당 폭력사태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당대표 머리끄덩이를 잡아 당기던 소위 청년당원들의 모습을 중첩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 열풍은 싹 식어버렸다. 6.15 정신? 그딴거는 자폐증 걸린 진보우파들끼리나 축하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일반 시민들은 북한이 어떤 체제인지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런 체제로는 절대 통일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저런 체제를 가진 사람들과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굳혔다. 우리가 저들 같아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저 정도 광신도들을 합리적 민주시민으로 개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족주의와 통일염원(? 오, 난 이게 싫다)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에 북한 스스로 그 불길에 찬물을 냅다 뿌린 셈이 된다. 나는 저 응원단이 우연히 저런 행동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있었으니 했을 것이다. 김정일은 통일 열기가 정말로 일어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남측에는 미국놈들이 삥을 뜯고, 괴뢰정부가 북침을 호시탐탐 노리니, 백성보다 군대가 우선시되는 것을 참고 견디라는 선군정치를 정당화해야 하지 않겠나? 평화무드, 이건 말도 안된다. 정권에 위협이 된다.

진보진영은 여기에 대해 대답을 해 주었어야 했으나, 아무도 책임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 우리는 같은 민족" 담론은 사실상 수명을 다했으며, 이후 어떤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6.15 선언과 비교하면 완전히 싸늘하게 식어버린 1004 선언에 대한 반응을 보라. 더구나 6.15 선언을 북한에서는 "김대중이 사회주의를 포기하라고 협박하러 왔으나 김정일에게 감복하고 설득하여 도리어 6.15 선언에 서명했다."는 식으로 선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일반 국민은 몰라도 노대통령은 알았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역시 북에 대해 큰 애착이나 흥미를 버렸다.
영화 '코리아'에 대해서도 '공동구역 JSA'와는 자뭇 공감의 정도가 다르다. 아니 이 영화는 그만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2002년에 젊은이들이 외쳤던 구호는 태극기, 애국가와 함께 어우러진 "대한민국"이었지 "한민족"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그 방계이자 가난한 형제인 북한을 동정했던 것이지 동경한다거나 최소한 동등하게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북한에 마취된 운동권들은 그만 이런 정서를 오판했다.

이는 미군장갑차 사건의 의미를 오독한데서도 드러난다. 당시 젊은이들이 분노하며 촛불을 들었던 배경에는 대한민국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찌질한 시대가 아니라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시대에 자라난 세대다. 이들이 분노한 대상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찌질한 어른들, 찌질한 고위직들, 정치가들 이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서 분노한 것이 아니라(사실 어디를 둘러봐도 식민지의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미군이 있어서 분노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도 아니면서 왜 굽신대냐는 분노, 그리고 왜 미군에게 정당한 땅값을 받아내지 못하며, 그들을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규제하지 못하느냐에 대한 분노였다. 따라서 이 촛불행렬을 "반미, 주한미군 철수"로 유도하려던 선동은 촛불집회 현장에서 거센 반발에 부딪치며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오판은 4.11 총선에서 강정마을에 대한 개입 방향 미스에서도 드러났다. 강정마을 문제에 대해 분노한 젊은층은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환경, 자연, 생태의 가치를 무시하는 해군의 처사에 대한 것이었지, 거기에 미군이 들어온다 만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그럼 강정마을에 미군이 들어오지만 않으면 해군기지를 지어도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강정마을 문제에 개입한 운동권들은 이런 방향 미스를 저질렀고, 이후 강정마을에 대한 개입은 통진당, 민통당의 득표를 깎아먹은 원인이 되었다.

이건 좀 과잉해석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2002년에 정점에 올랐던 NL식 운동 담론은 그 정점의 순간에 사망했다. 만약 그 담론이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북한을 딛고 갔어야 했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여기에 북한 핵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결정타를 때렸다. 천안함 때만 해도 이명박 정부가 북풍 조장을 하려고 조작하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북한은 직접 포를 갈기면서 빼도박도 못할 증거를 만들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과거 진보였던 활동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걸 받아들이고 다시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냐, 아니면 갈수록 숫자는 줄어들지만 "순결성"은 높아지는 동창회, 더 나아가 옴진리교로 생명을 마감할 것이냐는 그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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