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학교폭력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자

이 글은 월간 '인물과 사상'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이제 해당 잡지가 과월호가 되었기 때문에 블로그에도 함께 게재합니다.



1. 학교폭력, 조금 냉정하게 바라보자 

학교폭력 때문에 연일 신문들이 아우성이다. 특히 조선일보가 유별나게 적극적이다. 조선일보에 비추인 우리나라 학교는 일진들이 학생들을 괴롭히다 못해 교사들까지 제압하고 있는 폭력천지다. 이 지경이면 자퇴하지 않고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신기하게 보일 지경이다. 정말 우리 학교가 이리도 막장이란 말인가? 이제는 우리 학교가 학생은커녕 교사들마저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무법천지란 말인가? 


잠깐 엉뚱하지만 미국의 이미지는 범죄로부터 안전한 나라일까, 아니면 강력범죄가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는 나라일까 생각해 보자. 아마 후자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자료를 보면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살인사건은 20% 이상 감소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의 이미지는 이렇게 험악해졌을까? 같은 기간 미국 언론과 방송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보도가 무려 600%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뭐가 올까? 폭력에 대한 공포와 불안의 조성, 그리고 인권에 대한 반대와 공권력 강화에 대한 요구다. 범죄를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공포를 증폭시킨 다음 이런데도 인권 타령이나 할 것이냐, 당장 엄하고 강력한 공권력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다른 나라 사례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게 마침내 우리나라의 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언론의 논조가 이와 판박이다. 먼저 충격적인 폭력 사례를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피해자가 자살하거나 교사가 구타당하거나 한 사건이 있다면 놓치지 않고 계속 집중 보도한다. 30만명이 넘는 교사들 가운데 0.1%만 학생에게 폭력피해를 입어도 300건이다. 집중적으로 보도해서 지면을 꽉 채우기엔 충분하다. 이렇게 폭력에 대한 반감과 공포를 잔뜩 유포한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자유가 지나치고 인권이 지나쳐서 그리고 공권력과 권위가 약화되어서란 논지를 펼친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진보교육감과 학생인권조례에다 돌린다. 그 다음 귀결이 학교규율 강화, 학교장 권한 강화 등인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왜 이런 짓을 할까? 폭력의 위험으로 가득 찬 세상, 이웃과 급우들이 언제든지 가해자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갈급해 하는 것은 안전이며, 이 안전에의 욕구야 말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보수화시키기 때문이다. 토마스 홉스의 명저 ‘리바이어선’의 주제가 바로 타인의 폭력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어떻게 강력한 주권자를 정당화하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흥분하기 전에 먼저 따져봐야 한다. 우리나라 학교는 정말 그렇게 폭력으로 난무한 위험한 곳인가? 그래서 약한 학생들이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야 마는 그런 곳인가? 정말 그런가? 


2. 학교폭력은 더 심각한 문제의 결과일 뿐이다 


먼저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서 발표한 최근 5년간 학교폭력 변동 추이를 보면 우리나라의 학교폭력 피해율과 가해율은 특별하게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2006년에 17.3%에 달했던 피해율이 2010년에는 11.8%로 크게 줄었다. 다음은 청소년 자살이다. 흔히 우리나라 청소년의 자살률이 세계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률(10만 명 당 자살자 수)은 8.3명으로 OECD국가들의 평균 정도다. 가장 심각한 나라는 뉴질랜드이며, 우리에게 교육선진국으로 알려진 핀란드나 스웨덴이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높다. 게다가 ‘2012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자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인은 ‘가정문제’ ‘성적 비관’이며 학교폭력은 매우 미미하다. 


설사 자살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학교폭력이 우리 아이들이 늘 불안에 떨게 만드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아닐까?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원인은 학교폭력 말고도 많고, 학교폭력은 그 중 유력한 원인에 들지도 못한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스트레스의 근원 중 압도적 1위는 공부, 다음은 직업이다. 학교폭력이라고 응답한 학생은 0.2%에 불과했다. 2002년과 비교하면 공부와 직업(진로)관련 스트레스는 크게 증가한 반면 학교폭력은 1/6로 줄어들었다. 직업관련 스트레스가 8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다는 것에 주목하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었던 선배들에 비해 지금 청소년들은 “공부 열심히 해도 불투명한” 미래와 맞닥뜨린 것이다. 우리나라 학교의 학교폭력 문제는 언론이 떠드는 만큼 심각하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은 어른들이 청소년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성인 자살률은 압도적으로 OECD 1위다. 지금 성인과 노령층이 청소년보다 더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최근 청소년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성인들이 절망적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제 코가 석자가 된 성인들이 청소년들을 제대로 돌보기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3. 그래도 학교폭력은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사회적 화두가 되었으니 학교폭력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폭력에의 공포를 유포하고, 일진회 등의 증오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폭력의 개념을 엄밀히 정의하고,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교육적 처방을 찾아야 한다.


 먼저 학교폭력의 정의부터 엄격하게 내려야 한다. 폭력적 상황이 발생했다 해서 무작정 학교폭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폭력은 학교 구성원 사이에서 피해자가 동의할 수 있는 정당성 없이 가해지는 일체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압력 혹은 강제력의 행사를 의미한다. 교사의 체벌이나 강압적인 꾸지람도 넓게는 학교폭력에 들어간다. 사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경우는 교사는 물론 학부모가 자기 자녀를 체벌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학생들 간에 발생하는 폭력적·공격적 행위로 범위를 좁혀보자. 


이 중 폭력을 행사한 쌍방 간의 관계가 대등한 경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건 그냥 아이들끼리 싸움이다. 싸움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옳지만, 만약 하게 되더라도 서로 화해시키고, 부상 등의 피해가 있으면 배상하도록 하고, 이후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도록 지도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싸움은 학교폭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학교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등하지 않은 경우만 지칭한다. 대등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에는 순간적으로 격분한 가해자가 열등한 관계에 있는 피해자에게 강력한 신체적, 언어적 공격을 가하는 폭행(assualt)과 우월한 위치의 가해자가 열등한 위치의 피해자에게 의도적이면서 그리 과격하지 않은 폭력을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가하는 괴롭힘(bullying)이 있다. 선정적인 언론은 폭행에 관심을 가지지만 실제 더 위험한 것은 괴롭힘이다. 실제 교육 선진국에서 개발된 무수한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도 거의 대부분 괴롭힘(bullying)의 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일진회를 박멸 보다 평범한 학생들이 가하는 눈에 띄지 않는 폭력을 더 심각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학교폭력 문제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올베우스(Oweus)는 괴롭힘(Bullying)을 1) 가해자와 피해자의 힘의 불균형에 기반하고, 2) 한명 혹은 다수의 학생들이 3)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목표로 삼아 4) 신체적, 언어적, 사회적, 간접적 폭력 등을 5) 장기간 지속적으로 가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괴롭힘은 가해자, 피해자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큰 피해를 준다. 실제로 괴롭힘 가해자의 65%가 범죄를 저지르며 그 중 40%가 재범 이상의 전과자가 된다. 피해자는 공포·불안·고립감 등에 시달리면서 자존감, 자아효능감 등에 심각한 상처를 받고, 심한 경우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기도 한다. 심지어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학생들 역시 폭력 상황에 대해 스트레스를 느끼며, 자기들도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고통 받는다. 게다가 괴롭힘은 그 강도가 약하거나 어른들 눈에 그저 친구 간에 장난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또 괴롭힘 가해자는 일진회처럼 눈에 두드러지는 비행청소년인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교사들에게는 모범생으로 알려진 학생이 가해자인 경우도 많다. 따라서 언론이 선정적으로 취급하는 두드러지는 폭력이 아니라 우리 청소년들을 좀먹는 이런 숨은 폭력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강도가 강해져서 이미 범죄의 영역에 들어선 고등학교보다 폭력이 시작되는 중학교에 주목해야 한다.


4. 학교 폭력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가해자 일벌백계는 별무소용 


그럼 이런 학교 폭력은 왜 일어날까?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1) 가해자에게 가해의 원인이 있다(가해자 귀인), 2)피해자에게 폭력을 유발한 원인이 있다(피해자 귀인), 3)학교 폭력이 일어나게끔 만드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사회적 귀인) 등 세 가지 설명이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설명 중 어느 것도 학교폭력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학교폭력은 이 세 가지 요인이 한 테 엉켜서 발생하는 복잡한 현상이다. 그런데 학교폭력을 다루는 보수 언론들은 이구동성 가해자들을 질타한다. 그리고 상담, 치료, 엄벌, 사법처리 등을 통해 이들을 교정하거나 배제해야 하는데, 그걸 ‘인권조례’가 가로막고 있다며 개탄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가해자들보다 더 강한 힘으로 이들을 제압하고 본때를 보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폭력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된다. 


학교 폭력의 원인이 되는 가해자 특성은 단지 “나쁜 녀석”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가해자들은 타고나기를 냉담한 기질로 태어났을 수 있다. 또 문화·예술적 경험이 부족하거나 어릴 때부터 잘못 형성된 성격으로 인해 감정적 공감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 열악한 가정환경, 어린 시절 폭력 피해 경험, 학업 스트레스 등도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되게 만드는 다양한 원인들이다. 또 일탈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청소년들의 높은 긴장상태가 각종 폭력적 일탈행동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때 청소년들의 긴장상태를 높이는 중요한 원인들은 경쟁의 격화, 커뮤니티 등 각종 사회적 자본의 파괴, 그리고 가정에서 특히 부모에 의한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상호작용 등이다. 이런 것들이 가해자가 책임질 수 있는 것들인가? 오히려 2008년 이후 갈수록 격심해지는 사회 전반적인 경쟁풍토와 거기서 비롯되는 긴장감의 고조에 책임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가해자의 특징을 두루 갖춘 학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쉽사리 용인되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갖춰지지 않으면 쉽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 사소한 폭력도 용납되지 않는 사회분위기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분위기가 학교 폭력에 주는 영향은 매우 다르다. 다름과 차이에 대해 관용하지 않는 학교나 사회의 풍토, 위계서열·폭력의 규범이 지배하는 경직되고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 등은 없는 가해자도 만들어낼 정도로 중대한 학교폭력의 원인이다. 보수언론의 기대와는 달리 진보교육감 지역 보다는 대구, 경북 지역에서 끔찍한 학교폭력이나 교사폭행 등의 사건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까닭도 어쩌면 이 지역이 관용이 부족하고, 위계서열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팽배해서가 아닐까 조심스레 진단해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진회만 적발해내면 학교폭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다른 변인들이 멀쩡히 살아있다면 일진의 제거는 새로운 일진의 탄생 외에는 아무것도 바꾸어 놓지 못할 것이다. 


학교의 모든 구성원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다 


가해자 적발 위주의 학교폭력 대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부분의 학생들과 어른들에게 자신들은 학교폭력과 관계없다는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다. 실제 학교폭력 가해자는 5% 내외, 피해자는 8% 내외다. 그렇다면 85%의 학생들이 국외자인 셈인데, 과연 이들은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일까? 살미발리는 학교 폭력은 가해자-피해자 간 문제가 아니라 학급, 학교, 경우에 따라 지역사회까지 함께 움직이는 복잡한 집단 현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단순한 견해를 반박했다. 


모든 학생들은 학교 폭력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 가해자를 도와서 함께 가담하는 조력자, 선동적인 청중 노릇을 하는 강화자, 그리고 모른척 하는 방관자, 피해자를 돕는 방어자가 그들이다. 방어자를 제외하면 누구나 크건 작건 학교폭력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대체로 동조자와 방관자들이 많아서 자신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여겨지면 폭력의 강도와 지속기간을 늘리는 경향이 있다. 애초에 학교폭력 가해 자체가 권력 과시를 위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똘마니와 응원부대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방관자는 비록 직접 가담하지는 않으나 폭력이 일어나고 있음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조함으로써 가해자가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즉 침묵을 지키는 것 자체가 이미 인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대체로 학교 폭력이 장기간 지속되면 방관자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보고 가해자쪽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반면 피해자를 도와서 가해를 막거나 피해자를 사후에라도 도와주는 방어자의 수가 동조자보다 많아지면 가해자가 집단의 압력을 받아 가해행위를 쉽게 하지 못한다.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총인 눈총”의 위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폭력 예방의 열쇠는 가해자를 적발해 내거나 제압하는 것에 있지 않고, 가해자의 편을 줄이고 피해자의 편을 늘리는데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대상이 방관자다. 어떻게 방관자를 방어자로 돌려세우는가가 학교폭력 예방의 열쇠인 것이다. 이때 방관자들을 피해자에게 돌려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타인의 상태·정서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학교폭력보다 몇배, 아니 몇십배 우리 청소년들을 더 괴롭히는 학업성적, 진로, 그리고 경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이다. 물론 학교 폭력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고통의 원인은 외면하고 기껏 몇몇 일진들에게 학교가 불행한 이유를 전가하는 행위야 말로 또 다른 폭력이며 기만이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