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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감 취임 2주년을 기념하며 드리는 말씀

미디어 오늘에도 기고한 글인데, 여기에도 남겨 둡니다.

 혁신을 넘어 진보를 향하라 

어느덧  6개  시도에서 이른바 진보교육감이 탄생한지 2년이 지났다. 경기도는 벌써 3년이다. 이들 진보교육감들  덕분에 교육 혁신이라는 말은 아주 친근한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6개 시도의 교육이 꽤 활발하게 바뀌기도 했다. 얼른 눈으로 보아도 다른 지역보다 이들 지역의 학교가 더 다채롭고 활기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제는 새롭게 바꾼다는 혁신을 넘어 교육의 새로운 의미를 세우고, 교육이 학생과 나아가 사회의 전반적인 가능성과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됐다. 즉 혁신을 넘어 진보로 향해야 한다.

이들은 스스로 선언했듯이 진보교육감이지 혁신교육감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혁신과 진보의 연결 지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다만 새롭다는 것이 곧 진보는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다양화와 학부모 선택권 강화라는 방향성을 내건 경우가 더욱 그렇다. 획일성을 넘어 다양성으로라는 구호는 진보는 커녕 혁신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건 이주호 교과부장관이 늘 외치던 고교 평준화 해체와 고교 다양화와 사실상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선택권 강화는 누가 입시에 실적을 더 잘 올리는 교사이며 어느 학교가 입시 실적이 더 좋은가를 놓고 선택하게 만들고자 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과 강하게 공명한다. 

다양성과 선택의 원리는 철저히 시장주의적인 원리다. 이는 기본적으로 교사들은 그냥 두면 정체되어버리기 때문에 자극이 필요하다는 불신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각 학교에게 자율권의 미명하에 경쟁을 붙이자는 것이다. 학교의 자율성은 현 상황에서는 교사의 자율성이 아니라 교장의 자율성이며, 교장은 학부모들 중 유력한 학부모들의 요구에 굴복하게 되어 있다. 그 요구는 결국 입시교육 강화일 것이다. 따라서 다양성은 입시에 유리하기 위한 꼼수의 다양성이 되며, 학부모 선택권은 학교와 교사들이 이 꼼수와 무한정한 노동연장을 놓고 경쟁하라는 강한 압력이 된다. 백번을 시물레이션 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 혁신학교가 입시에 유리하도록 하겠다는 등의 엉뚱한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가 뻔히 보이며 진보는커녕 혁신도 되지 못할 다양성과 선택권의 유혹에 진보라는 사람들이 자꾸 휘둘리는 것은 이렇게라도 해서 빈곤계층과 취약지역의 진학율이 높아지면 사회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겠느냐는 미련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나는 신화가 그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이 미련의 뿌리는 80년대 운동가요 중 “못 배워 땅만 파는, 우리 부모 원망 하랴?” 라는 가사에서도 드러나듯 그 뿌리가 깊다.


여기서는 배움을 경제적 윤택이나 사회적 지위 향상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 그리고 아카데믹한 직업을 농사보다 우러러보는 관점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서울대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른 일각에서는 서울대학 들어가는 것이 갈수록 강남권과 특목고 출신이기 유리해진다면서 항의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진보적인 관점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나게 하는 것은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건 오히려 기존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개천에서 용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 나라는 1894년, 1910년, 1945년, 1950년, 1998년 등 거의 매 세대마다 나라가 초토화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서 전국이 개천이 되고, 용이 모조리 죽어버린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외적인 개천출신 용이 몇 마리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매우 드물고, 다시 와서도 안 되며, 그런 시대에도 허황된 용꿈을 꾸고 쓰러져간 무수한 미꾸라지들이 그림자 아래 감춰져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나라에서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는 매우 냉정하다. 그 중 블라우와 덩컨의 경로 모형, 그리고 콜맨 보고서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결과들은 한 마디로 어떤 학생이 장차 성공하느냐 마느냐에서 교육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학업성취도에서조차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교사나 학교의 노력보다 더 영향력이 강했다. 즉 부모가 용이면 자식도 용이고, 부모가 미꾸라지면 자식도 미꾸라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교육감이 할 수 있는게 대체 무엇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교육 혁신을 넘어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자면서 개천에서 용 나게도 안한다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진보교육감은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여기서 교육혁신과 진보가 만난다. 즉 그저 새롭고 다양한 것이 아니라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는 다양함의 세례를 일선 학교에 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참교육의 평등이다. 입시교육의 평등이나 허황된 개천에서 용나기 신화가 아니라 저소득층 자녀들이 부모들의 수준에 제한되지 않고, 부모세대 이상의 더 나아가 부유한 가정 이상의 덕성과 지성과 감수성, 그리고 신체관리 능력을 갖추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부모는 어쩌다 생긴 여가시간을 술, 담배, 막장 드라마에 탕진하는 삶을 살지라도, 그 자녀까지 그 수준에서 헤매게 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 차이를 학교가, 공교육이 메꿔 주자는 것이다. 이건 교사가,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더 높은 성적을 올리게 하면서 교육 불평등을 해소 할 수 없으며, 그건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덕성, 지성, 감수성을 함양하도록 할 수는 있다. 이렇게 덕성, 지성, 감수성이 높아진 학생이라면 스스로 결정한 어떤 목적이 있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할 경우 성적은 구태여 닦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라간다. 이렇게 저소득층의 자녀들이 부모의 수준을 넘어 지배층에게 결코 뒤질 것이 없는 지성과 덕성을 갖추게 된다면, 그래서 그 사회가 이런 지성과 덕성을 갖춘 피지배층으로 가득하다면 그 사회는 강력한 평등에의 요구에 직면할 수박에 없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듯이 국민들이 의문을 품는 사회에서는 어떤 독재와 억압도 성립될 수 없다. “어째서 일은 우리가 하는데 기업주가 모든 이윤을 다 가져가는가?”라며 의문을 품는 노동자, “어째서 한번도 만난적도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군인, “어째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가 아니라 어른들 마음대로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학생들이 늘어날수록 그 사회에는 어떤 차별도 권위주의도 발붙이기 어렵게 된다. “어째서 같은 돈 내고 흑인은 자리에 앉을수 없는가?”라는 로자 파크스의 의문 하나가 미국의 거대한 민권운동을 일으켰음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교육이 불평등 해소에 기여한다면, 즉 사회 진보에 기여한다면 이는 교육을 통해 빈곤층의 자녀에게 더 높은 소득을 올릴 능력을 길러줌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교육 평등이 사회 평등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하게 하는 것에 있지, 결코 교육받으면 더 잘살게 되는데 있지 않다. 


진보적인 교육운동이란 지식인으로서의 교사들이 끊임없이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속에서 사회적 평등의 열망과 조건을 개척하는 것이지 기존의 잘못된 제도와 체제 하에서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보교육감이 실천해야 하는 교육 불평등 해소의 방안은 명백하다. 그것은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능력과 미적 감수성, 그리고 민주적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교육을 혁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 이러한 수준을 높이는 교육의 혜택을 취약계층 자녀들부터 우선 제공하는 것이다. 서울시 교육청의 문예체 진흥 교육 방안은 이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교육감의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사들이 그만한 수준에 먼저 도달해야 하고 그만한 의지와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먼저 교사들부터 일으켜 세워야 한다. 교사들의 문화를 바꾸어서 교사들이 덕성, 지성, 감수성으로 충만한 집단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사들이 모였을 때 연예가 중계나 자식 이야기나 하지 말고 지성인다운, 문화인다운 대화를 나누고, 교무실의 풍토가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무궁한 지적, 도덕적, 문화적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교육혁신, 그리고 진보교육의 출발점이다. 교원업무 정상화가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교육 받느라고 바쁜 상류층 자녀들은 맘대로 하라고 두자. 그걸 부러워하거나 그것 때문에 경쟁에서 뒤쳐진다고 조바심 내지 말자.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면 참교육을 저소득층이 더 많이 받게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서울시교육청이 적극 지원하고 있는 교사학습동아리, 경기도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각종 교사학습모임의 활성화는 희망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소득층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의 교사들부터 이렇게 바뀌어나가게 한다면, 또 이런 훌륭한 교사들이 저소득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선호하도록 이끌어낸다면, 이것이 바로 교육평등이다. 


 그 결과는 용이 되어 개천을 빠져나가려는 미꾸라지를 기르는 것이 아니다. 개천의 가치를 인식하고 개천을 더 살기 좋게 만들려는 깨어있는 미꾸라지들, 용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하기 위해 떨쳐 일어서는 미꾸라지들을 기르는 것이다. 이제 진보교육감들은 단지 덜 부패하고, 덜 권위적인 것을 넘어 자신들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미디어 오늘 원문: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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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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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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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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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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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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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