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곽노현이 한국교육을 폄하했다는 동아일보의 학습부진

오랜만에 곽노현 교육감이 동아일보 1면을 장식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곽 대한민국 교육을 폄하하다"(동아일보 기사 )라는 내용의 흑색기사다. 문장어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거의 사춘기 감상문같은 문장으로 씌여진 이 기사를 신문기사다운 문장으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7월 12일 오전 10시 서울시교육청 9층 회의실에서 열린 로스 터너(호주국립연구원 출신 피사 출제 전문가)에서 곽노현 교육감은 다음과 같이 한국 교육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 “PISA 1등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없는 이유를 오바마는 몰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은 분이 성적이 높은 한국의 비결을 궁금해하지만 그 8할은 강요된 누적학습, 사교육비로 뒷받침된 학습시간의 결과라는 게 현실이다.”

여기에 대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김동석 대변인은 “사교육의 영향이 없을 수 없겠지만 국민들의 뜨거운 교육열과 현장 교사들의 노력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해 이뤄낸 성과를 너무 폄하했다”고 지적했다. 박경미 교수 역시 “PISA는 실생활에 적용하는 문제를 출제하므로 다른 시험과 달리 학원교육이나 선행학습과는 비교적 무관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세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자리에 나온 기자들이 "OECD새로운 교육방향은 협동(오마이뉴스 기사)", "한국 피사 상위권에 안주해서는 안되(연합뉴스 기사)"라는 내용의 기사를 쓴 걸 보면 동아일보 기자는 시각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시간이나 진행된 강연 내용은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직 곽노현 교육감 깔 거리만 찾고, 그걸 또 1면에 때리는 것을 보니 말이다.


자, 그럼 이 기사가 어째서 엉터리인지 한번 살펴 보자. 우선 피사 1등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없다는 류의 발언은 곽노현 교육감이 처음이 아니다. 그건 2003년 이후 계속 되어온 발언이다. PISA는 점수와 순위만 발표하지 않는다. 한번 나올때마다 300쪽 짜리 보고서 대여섯권 분량의 보고서가 나온다. 그런데 기자들은 1권의 첫 50페이지만 보고 만다. 하지만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 이후 수백페이지를 본다.

에컨대 2009년에 발표된 피사2006 분석자료에는 성취도 점수를 학습시간으로 나눈 학습효율과지수라는 것이 나온다. 즉 공부하는 단위시간당 학업성취도인 것이다.  핀란드는 성취도 점수를 학습시간으로 나누어도 여전히 1위인데, 우리나라는 학습시간으로 나눈 순간 30개국 중 24위로 뚝 떨어진다. 심지어 같은 동아시아권인 일본조차 학습시간으로 나누면 순위가 올라가는데 말이다. 이 그래프를 보면 이성이 박힌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의 높은 학업성취도는 결국 공부를 유난히 많이해서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곽노현교육감은 이 분석자료를 보고 받고 하는 말이다.


금년에 나온 PISA2009 분석자료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데, 읽기 영역에서 읽기를 즐기는 정도와 성취도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가 높으면 공부를 좋아하면서 또한 성취도도 높다는 뜻이다. 즉 배움이 행복이 된다는 뜻이다. 통계적으로 설명하면 학업성취도 중 학생의 흥미(선호)가 얼마나 많이 설명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높은 성취도에도 불구하고 이 성취도에 대한 학생의 선호, 흥미의 설명력은 매우 빈약하여, 역시 평균 이하로 쳐져있다.




이 두 결과를 결합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1) 한국 학생들은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이지만, 학습시간이 유독 길어서 나오는 현상이다.
2) 또한 한국 학생들의 높은 학업성취도에서 공부에 대한 선호, 즐김은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3) 따라서 한국 학생들은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오랜 시간 하고 있으며, 이게 결국 높은 성취도의 원인이 된다.
4) 물론 이것만이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겟지만, PISA 점수가 높다고 해서 한국교육이 훌륭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버다.

동아일보에게는 유감스럽지만 이런 결론은 유럽쪽에서는 이미 확정된 내용이다. 독일에서 한국교육의 기적을 분석한다며 보낸 조사관을 보냈다가 배울거 없다며 철수한 경우도 있고, 핀란드 교육부 장관이 한국과 비교되는 것을 매우 불쾌히 여긴 경우도 있다.


그러니 곽노현 교육감의 발언은 이미 세계 교육학계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분석을 인용한 것이며, 기껏해야 피사 1위라고는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는 수준의 진단을 한 것이다. 이건 폄하가 아니라 주의이며 비판이다. 그걸 문제삼아서는 안된다. 주의와 비판을 했으니 교육을 바꾸자고 교육감 나오지 않았겠는가? 한국교육 이대로 훌륭하고 문제없다라고 생각했다면 뭐하러 교육혁신 하겠다며 교육감에 나왔겠는가?


진짜 한국교육을 폄하하는 것은 이런 비판과 주의가 아니라 한국교육 글러먹었으니 애들 딴나라에서 가르치자라고 주장한다거나, 한국교육 글러먹었으니 다른나라 교육제도 빨리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짓은 바로 곽노현 교육감이 아니라 동아일보 자기들의 장기였다. 여기 한국 교육을 폄하한 진정한 사례들을 보여주겠다. 역시 한국교육 폄하에는 동아일보가 갑이었다.


동아일보 시론 "해외로 떠나는 아이들"(기사 보기)
동아일보 사설 "나도 미국 소도시로 이주하고 싶다"(기사 보기)

이 시론과 사설이 나온 2007년에도 우리나라 PISA성적은 여전히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명색이 정통일간지 주간이라는 자가 사설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리나라 교육을 부러워하고 있는 미국으로 애들을 보내고 싶다, 교육이 구리다라고 망발을 했다. 이게 바로 한국교육을 폄하하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곽노현 교육감이 객관적인 팩트를 가지고 피사1,2위의 환상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것을 대한민국 교육을 폄하했다고 호들갑 떨 자격이 없다. 그래도 정 그렇게 하려면 저 사설과 시론 쓴 사람들을 신문 1면에 소환하여 공개 사과시켜야 할 것이다.

참고로 저 기사 마지막에 인용한 박경미 교수의 발언도 왜곡이다. 박경미 교수의 실제 발언은 다음과 같다. 이건 내가 그날 박경미 교수와 마주앉아서 같이 점심식사까지 했으니 100% 정확하다.   “PISA는 실생활에 적용하는 문제를 출제하므로 TIMSS등 다른 시험과 달리 학원교육이나 선행학습과는 비교적 무관한 결과가 나올것이라는 것이 세계 전문가들의 예측이었으나, 실제로는 핀란드가 부상한 것 외에는 다른 시험과 동일한 결과가 나와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셀프 스폰서)재미있게 읽었으면 제가 쓴 책들도 한번 봐 주시길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