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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선고일 다가오는듯 하자 배신의 이빨 드러내는 교육관료들

6월부터 서울시 교육청은 롤러 코스터 같은 분위기였다. 6월 초에는 관료들이 교육감의 명을 교묘히 물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 이들에게 곽노현 6월 22일 낙마설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0일자로 대법관 4명이 퇴임할 것이기 때문에 6월 4주 목요일인 6월 22일에 선고가 나고, 그럼 곽노현 교육감은 물러날 것이니 말 들어서 뭐하리 하는 그런 태도다.

물론 관료들 중에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스스로 동의한 교육혁신의 상을 위해 묵묵히 자기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도리어 6월 22일 이전에 혁신사업을 최대한 추진시켜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초조하다 못해 자뭇 비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관료들은 6월 22일 설이 나오는듯 하자 즉각 태도가 바뀌면서 노골적으로 비협조적 변신을 꾀했다.

이들이 묵묵히 자기일을 하는지 기회주의적으로 배신의 틈을 노리는지는 교육청 파견교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관료들은 이들을 단지 파견교사로 보지 않는다. 이들을 전교조의 일부로 보며, 곽노현 교육감의 별동대로 본다. 따라서 교육감의 눈치를 보아야 할 상황에서는 파견교사의 눈치도 보며, 교육감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파견교사도 무시하며 심지어 모욕을 가하기도 한다.

이번에 학교폭력 토론연극으로 전국적인 히트를 친 부서의 관료들이 딱 그런 태도를 취했다.  교육감이 석방된 직후 이 사업이 추진될때는 매우 적극적이고 협조적이었다. 물론 이 사업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당한 파견교사인 K교사에게도 매우 협조적이며 적어도 겉으로는 존중하는 제스쳐를 취했다.그러다가 4월 18일 항소심 판결에서 엉뚱한 판결이 나오자 갑자기 안면 몰수 지지부진으로 바뀌었다. 담당 장학사는 한국 교육연극계 최고 권위자중 한 사람인 K교사를 마치 아랫사람 부리듯 하려 들었고, 학교폭력 토론연극 프로젝트는 준비하던 극단들이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질질 시간만 끌었다.

그래도 이걸 억지로 억지로 추진하여 여러 언론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고  학교폭력 대책은 바로 교육연극이다라는 대세를 이끌어낸 힘은 K교사의 열정과 뚝심, 그리고 높은 전문성과 연극 단체들로부터 받고 있는 신망이었다. 솔직히 담당장학사, 장학관이 한 일은 투덜거리면서 문서 작성하고 결재낸 것 밖에 없다. 심지어 그 문서조차 K교사가 거의 다 작성해주다시피 했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는 크게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 관료들은 이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공로자인 K교사를 무시했으며, 배제하고 투명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가 6월 22일 선고공판에 곽노현 교육감 사건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고 국회의 개원이 늦어지고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가 만만치 않아 7월 10일에 신임 대법관 임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렇다면 사실상 7월 28일 이전까지 선고나기는 어려운 상황이니 적어도 한달 이상은 곽노현 교육감을 모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담당 관료들의 태도가 다시 바뀌었다. 2학기에 추경예산을 잡아서 학교폭력 토론연극 사업을 130개 학교로 확대하겠다고 호언했다. 이 사업의 만족도가 75%가 넘는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K교사를 칙사대접을 하며 갑자기 친한척들을 하며 알랑거렸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7월 18일에 있을 학교폭력 토론연극 평가회 및 시연회를 위해 연습하고 있던 극단에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걸어 다른 팀이 공연하게 되었으니 그만두라고 했다. 이들은 마치 극단이 자기들 전화에 따라 공연 준비를 했다 말았다 하는 노예로 여기는 것 같았다. K교사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못하게 된 원한을(장학사, 장학관들은 교사를 껌으로 안다. 껌 앞에서 굽신 거렸으니 스트레스 깨나 받았을 것이다), 극단 관계자들에게 퍼부은 것이다.

그러더니 이들의 태도가 또 바뀌었다. 원래 7월 18일에는 상반기중 진행된 이 사업을 망라하고 평가하는 자료집이 배포될 예정이었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교육관료들과 관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처음에 이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K교사에게 행사 진행과 사회를 의뢰했다. 그리고 자료집에는 이 사업의 취지와 의의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를 정리한 K교사의 발제문, 그리고 이 사업의 효과를 통계적으로 검증한 나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담당장학사가 K교사의 발제문과 나의 논문을 자료집에서 삭제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18일 행사의 진행도 K교사에서 S장학관으로 바뀌었다. 자기들이 다 해먹고, 이 사업에서 K교사가 기여했다는 흔적을 지우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이 사업을 곽노현의 사업이 아니라 이주호의 사업으로 슬그머니 옮겨가겠다는 뜻이리라(이주호도 요즘 곽노현 따라하느라 열심히 연극마니아 행세를 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이제 7월 27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날 선고공판이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늦어도 8월9일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다시 배신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자면 이 사업이 곽노현표 사업이 아니라 이주호표 사업인것처럼 전향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곽교육감의 측근으로 보이는, 그리고 실제 이 사업을 추진할 것을 곽교육감으로부터 직접 지시받은 K교사가 적극개입한 흔적이 남아서는 안된다. 철저히 자기들끼리 한 일로 조작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교과부 특교예산 받아 한 일로 조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K교사의 흔적도 지우려는 마당에 곽교육감 진영의 주요 논객으로 알려진 내 논문까지 자료집에 실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못했으리라. 그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면서 논문을 삭제한 그들의 본심이리라. 심지어 그들은 내 논문을 삭제하면 교육감에게 직접 갖다 드리겠다는 말을 듣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럼 그래 보시라. 하지만 논문은 삭제한다."라고 대답했다. 이건 이미 교육감을 배신하기로 미리 모의하고 각오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태도일 것이다.

이에 나는 K교사와 함께 7월 18일에 있을 최종 발표회 및 평가회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두 사람이 불참하면 숱한 교육관료와 관계자들 앞에서 왜 학교폭력을 교육연극으로 풀어보려 했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어쩔수 없다.

 물론 이후 펼쳐질 간담회에도, 그리고 만찬에도 불참할 것이다. 사실 이 만찬 자리는 K교사가 교육감에게 수고한 극단 관계자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해서 만들어진 자리다. 하지만 불참하겠다고 한다. 모욕과 노골적인 인격말살, 흔적지우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인 것이다. 그날 이 프로그램을 한껏 자랑하고 싶어하는 교육감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의 자존이 손상받은 상태에서는 교육감도 제대로 모실수가 없다. 교육감보다는 나의 존엄이 먼저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언한다. 8월중 선고공판 일정표에 곽교육감 사건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확인되면 이들의 태도가 또 바뀔 것임을. 이들은 다시 갑자기 친한척 하고, 알랑거리고, 뭔가 혁신적인 생각 있는척 할것이다. 그렇게 되면 9월 인사를 곽교육감이 하게되니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주의자들. 칼자루가 남아 있을때 이런 것들은 싹 쓸어버려야 한다. 실제로 작년 12월 17일 일명 라벨지 사건을 통해 충성스런 관료와 기회주의자가 가려졌고, 그 결과 2012년의 비교적 튼튼한 집행라인이 갖춰질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시계추 같은 무리들이 마각을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관료들의 속성상 장학관, 장학사 혼자서 이런 짓을 획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그 윗선의 누군가일 것이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이대영 부교육감이랑 일선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도 그래서 몹시 찜찜하다. 여튼 결론은 나는 몹시 화가났고, K교사는 역사적인 큰 공로를 도둑맞게 생겼다는 것이며, 어차피 우리는 곽노현 교육감과 운명을 같이 할 사람들로 분류되었을 터이니,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교육감을 우습게 보고 말기암 환자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개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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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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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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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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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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