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입시 문제만 해결되면 정말 교육문제가 해결되는가? 불편한 진실


내가 늘 바탕화면에 올려놓는 MB잔여 임기 카운터가 188을 가리키는 것을 보니 대통령 선거가 정말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 실감난다. 자천 타천으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분들의 행보도 활발하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들에게 나라를 맡기면 더 좋은 나라로 만들어 보이겠노라며 각종 정책들을 펼쳐 보이느라 분주하다. 이들이 펼쳐 보이는 다양한 정책들을 비교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다른 영역의 정책들과 달리 유독 교육 영역에서만큼은 후보들 간의 이견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후보들이 “대학 입시 제도를 바꾸고 공교육을 강화하여 사교육 부담을 줄여주겠노라” 고 공약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정답이 정해진 서술형답지를 보는 것 같다. 물론 후보들간에 견해가 일치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단 그것이 올바른 해법일 경우에 말이다. 하지만 얼른 보면 모범답안 같아 보이는 저 말이 사실은 지독한 오답이라서 문제다. 오답은 오답인데 모범답안 같아 보이니 더욱 문제인 것이다.

이들이 정말 답을 몰라서 그랬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들인데, 오답을 정답으로 착각할 정도로 교육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말하면 다수 대중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정답은 대단히 듣기 거북한 불편한 진실이다.

그럼 그 불편한 진실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 “당신들의 자녀는 평범합니다. 당신들의 자녀는 명문대학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공연히 자녀들 명문대학에 보내려고 사교육 업자 배불리지 말고, 소박하면서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기르세요. 우리나라 입시문제, 사교육문제의 가장 큰 문제는 여러분들의 허영심과 그걸 부추긴 사교육업자의 상혼 때문입니다. ” 이다. 이건 패배주의를 퍼뜨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녀가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그래도 내 자식인데” 하는 허영심이 패배주의의 원흉이다.

실감이 나지 않으면 구체적인 수치로 따져 보자. 미국의 아이비 리그처럼 우리나라에서는 통칭되는 명문대 리그는 없지만, 고3들은 “서연고서성한이중경외시동건홍숙”을 노래처럼 외우고 다닌다. 소위 말하는 인 서울 대학이다. 혹자는 이걸 무슨 한국의 아이비 리그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학부모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아이비 리그란 최고 명문대학의 의미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족보는 최고 명문대학의 의미가 아니라 심정적 마지노선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인 서울 대학은 가야 할 것 아니야?”라는 부모의 잔소리는 드라마 등에서 아주 익숙하게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아닌가?

그런데 이 “하다못해”의 수준이 기가 막히다. 이 15개 대학의 입학정원을 모두 합하면 전체 수험생의 6~7%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특수 분야의 명문대인 한예종, 포스텍, 카이스트 등을 보태더라도 8%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상위 8%가 “하다못해” 수준으로 취급되는 어이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상위 8%에서 “하다못해” 컷트라인이 끊어진다면 나머지 92%는 뭐라 불러야 할까? 8%에게 특별한 성공을 축하해주고 92%가 보통의 삶을 살아야 정상적인 세상일텐데, 8%에서 보통수준의 하한선이 그어지고 92%를 패배자로 낙인찍은 세상은 얼마나 뒤집혀진 세상일까?  누가 이렇게 세상을 뒤집었는가? 정부가? 재벌이? 아니면 서울대 출신들이? 아니다. 이건 누가 시킨 것도 아니며, 가르친 것도 아니다. 학부모 한 사람 한 사람의 허영과 욕심이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인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 뿐 아니라 힘써 일하지 않고, 애써 저축하지 않으면서도 큰 돈을 벌고 싶어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탐욕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또 온실가스가 줄어들지 않은 원인 역시 거대 석유자본의 로비 뿐 아니라 온실가스 감축에는 찬성하면서 자동차 이용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에는 불편하다며 반대하는 우리들 각자의 위선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꼬일대로 꼬인 대학입시와 나날이 치솟는 사교육비 문제는 명문대 출신들의 패권주의 때문도, 사교육업자들의 광고 때문도 아니다. 92%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보다는 내 자식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8% 안에 넣어야 한다는 학부모 개개인의 이기주의와 내 자식은 당연히 8%에 들어간다는 헛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허영심이 계속 누적되어온 결과인 것이다.

이건 한국 경제를 폭발 직전의 풍선으로 만들어 놓은 부동산 투기와 흡사하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하는 것 외에 돈 버는 방법은 없으며, 위험 부담이 있는 투자를 하려면 먼저 여유자금을 충분히 저축한 다음에 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온갖가지 대박 재테크가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넘어가 자산을 털고 빚까지 져 가며 달려들었다. 정부가 투기를 부추겼건 말았건 간에 어쨌든 부화뇌동했다면 그건 일차적으로 본인 책임이다. 그 결과는 겉잡을수 없게 된 부채, 그리고 위험 직전 상황으로 내몰린 국가 경제다.  마찬가지로 8%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지 못하고, 샛길을 찾는 반칙 심리의 빈틈을 노리고 족집게니 뭐니 하는 갖가지 사교육이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거기에 넘어가 빚까지 져 가며 사교육비를 퍼부어 대었지만 남는 것은 막대한 부채와 황폐해진 아이들의 마음 뿐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중독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녀에게 8%에 집착할 것을 강요하지 말고 92%의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92%가 “하다못해”도 안 된 패배자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임을 일깨워야 한다. 사실 이 세상은 “하다못해”에도 들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출퇴근을 도와주는 버스기사, 택시기사, 식사를 해결하는 식당 주인, 조리사,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는 아파트 경비원, 내가 일용할 양식을 지은 농부,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자, 그리고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 이들이 그토록 하찮은가? 어차피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이런 일하는 삶을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이지만 동시에 다수의 지배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 바 있다. 토크빌에 따르면 특히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하는 정치가들이 표를 얻기 위해 다수 대중들에게 쓴 소리는 하지 않고 환심을 살 말만 할 때 민주주의가 타락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아직 아무도 “8%의 명문대에 들어가는 좁은 문에만 매달리지 말고 92%의 소박한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자녀를 길러 주십시오. 그럴 때 92%의 삶이 개선됩니다. 그렇지 않고 모두 92%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8%에만 들어가겠다고 아등바등 거리면 제도를 아무리 뜯어고쳐도 입시문제, 사교육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라는 불편한 정답을 거론하지 않는다. 나는 이들 중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대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진실을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