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학부모가 상대적 약자라고? 교권 침해 따위는 무시하자고?

교육과학기술부가 모처럼 한건을 했다. 이른바 교권보호 종합대책이란 것이 그것이다. 진보진영은 교과부가 한건을 하면 무조건 반발하는 반사작용은 좀 접어둘 필요가 있다. 이건 시기적절한 대책이며, 오히려 이런 절호의 안을 선점당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엉뚱한 반응들이 나왔다. 학부모를 교권침해의 주범으로 모는듯한 표현이 거슬리며, 상대적으로 약자인 학부모를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있다는 진보교육단체의 반응이 그것이다.

물론 그 취지가 뭔지는 안다. 학부모나 학생으로 인한 교권침해만 다루고, 교장이나 여타 기관으로부터 가해지는 교권침해는 다루지 않았다는 불완전성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그럴 경우는 불완전성만 지적하면 그만이다. 즉 교권침해는 학부모 학생 뿐 아니라 교장이나 기관으로부터도 가해진다. 이 부분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 이렇게. 그런데 전교조는 꼭 여기다가 학부모가 무슨죄냐 식의 현장감각 없는 반발을 붙여서 안그래도 교총에게 빼앗기고 있는 교사들의 지지를 더 빼앗기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 교사들이 교권을 침해하는 주체로 뼈져리게 느끼고 있는 상대는 교장이 아니라 학부모이며, 실제로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 교사를 처절하게 약자 위치로 만들어버리는 상대도 교장이 아니라 학부모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학부모가 자식맡긴 죄로 교사앞에선 약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서 아주 단적인 사유실험을 하나 해보자. 학부모가 학교로 쳐들어와서 교사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와, 교사가 학부모를 찾아가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 어느쪽이 신문에서 더 대서특필되며, 어느쪽이 사회적으로 더 확실히 매장될까? 당연히 후자다.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을때 어느쪽이 막장전술을 구사해도 뒤탈이 더 적은가? 대개의 경우 학부모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상황에서 학부모가 교사보다 선택지가 더 많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자식 맡겨놓은 죄로 저자세? 그건 옛날 얘기 아니면, 퇴학이 가능한 고등학교 얘기다. 아무래도 학부모가 막장으로 나올 수 있을 정도 학생이라면 이미 교사들로부터 벌이란 벌은 다 받았고, 그까짓 여선생의 회초리 쯤이야 하는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사회봉사? 교내봉사? 수업 안하고 더 좋다. 만약 교사가 체벌이라도 하면 도리어 동영상 찍어서 돌리면 된다. 더 좋은 방법은 미워하는 교사의 발언을 발췌 녹음해서 정치적 좌빨로 만들어서 조중동에 뿌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자식맡겨놓은 죄"(?)는 교양있는 중산층 학부모의 일이며, 그런 학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학부모단체 활동하는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표준적인 학부모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좋지 않은 일로 학교에 소환되는 학부모들의 경우는 이미 자식맡겨놓은 죄따위는 면벌부를 구입한지 오래다. 오히려 이들은 학교에서 막장으로 깽판을 쳐도 학교에서 이렇다할 제재를 할 수 없으며, 도리어 그럴수록 자녀가 받을 불이익에 브레이크를 걸수 있고, 최소한 밑져야 본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권은 학부모와의 균형 타령을 하기에는 너무도 약하다. 자꾸 선진국 타령을 하는데,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교사들의 교권은 위로는 교육당국과 교장으로부터, 아래로는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마음껏 유린되어 사실상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지경이다.


반대로 선진국의 학부모는 교사 앞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훨씬 저자세다. 우선 미국의 경우를 보자. 우리나라는 학부모가 학교에 아이를 맡겨둔 뒤 나중에 검사해 보고 나서 따지는 체제다. 아니 아이를 믿고 맡겼는데 왜 이모양이야 이런 식으로. 하지만 미국은 학부모가 자기 아이를 학교라는 공동체에 조심스레 소개시키는 형식이다. 만약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학교공동체에 자기 아이가 누를 끼친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해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시스템이다. 다음 링크를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http://blog.daum.net/sayme613/462514

엔엘 성향이 강한 전교조나 참학에선 그럼 "그건 미국놈들 얘기다"그럴지 모르겠다.  안그래도 오늘 어떤 전교조 활동가가 미국사례 같은거 검토해서 뭐하냐, 다 쓰레길텐데 따위의 헛소리를 했다.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진보진영이 교육성지처럼 여기는 핀란드의 얘기다.


진보진영이 그토록 좋아하는 핀란드에서도 학생이 교사를 모욕하거나 욕설을 하면 교사는 이를 지도하려 하는 대신 즉시 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학생이 70여만원의 벌금을 무는 판결을 받기도 한다.

그럼 독일은 또 어떨까? 독일의 경우도 학부모는 교사앞에서 큰소리를 치거나 행패를 부릴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 독일은 지필고사 점수가 50%밖에 들어가지 않고, 교사가 임의로 매길 수 있는 점수가 50%나 된다. 그러니 시험 다 맞아도 수업태도가 불량하면 50점밖에 못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살인사건 날 일이지만 독일에서 학부모가 찾아가서 항의하고 소리지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다음은 영국의 사례다. 영국의 경우도 신자유주의 교육론을 들여오면서 학부모가 교육수요자라는 식의 인식이 팽배했고, 이는 학부모에 의한 교사 폭행, 폭언으로 이어졌다. 이에 영국은 공동체 정신의 해체를 우려하여 교권에 대한 강력한 보호조치를 시행했다. 그 그 내용을 보면 매우 삭막하다.


영국은 교사를 위협(폭행이 아니라 위협이다!)만 해도 75000달러의 벌금 혹은 6개월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교사를 위협하면 학교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체포되며, 교사 위협, 폭행에 대해서는 불관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학교는 세속의 성전이며, 교사는 사회의 성직자라는 에밀 뒤르켐의 말을 염두에 두자. 물론 교사가 과연 그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느냐고 따지고 들수 있겠으나, 그런식으로 따지고 들면 사회 자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럼 당신은 경찰들이 벌금 스티커를 발부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가? 육법전서 달달외운 영혼없는 법관들이라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그 판결을 존중하지 않는가? 그건 경찰관과 법관 개인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 그 자리가 대표하는 공동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잘먹고 잘사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을 가르치는 곳이다. 따라서 교사는 우리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대변한다. 설사 그가 미숙한 24세의 젊은이라 할지라도 사회는 그에게 이 사회의 부모같은 지위를 준 것이기 때문에 이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권이다.

그럼 선생들 살판난다고? 고대 중국에는 천리마의 뼈를 천금을 주고 구입한 군주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자 살아있는 천리마를 팔겠다고 상인들이 몰려왔고, 무능한 신하를 예를 다하여 존중해 주자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대우하는만큼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필요한 교사는 공동체의 가치를 대변할 고결한 존재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방법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이 알아서 찾아오고, 또 그 사람도 거기에 걸맞게 변해 갈 것이다.

자기 자녀의 성적과 처우에 조금의 불이익이 생겨도 언제든 찾아가서 따질수 있는 존재로 교사가 남아있는 한 이 나라에 공교육은 없는것이며, 공동체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교사가 정말 **같은 사람이라도 일단 그 앞에서는 그 지위를 존중해야 하며, 그 대신 공식적인 통로고 그와 같은 중요한 지위에 저런 **같은 사람이 있어선 되지 않는다고 청구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