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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을 놓고 벌리는 교과부와 진보진영의 막장극을 중단하라

학교폭력 문제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이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혹자는 별것 아닌 행위로 가해자로 몰려서 처벌받은 억울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억울함 100명분을 모아도 피해자 한사람의 고통에 미치지 못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공감의 동물이기 때문에 동료들을 믿지 못하고, 동료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은 거의 지옥과 다름없는 고통이다. 여기에 신체적, 언어적 위해행위까지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니 학교폭력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를 경우 교육당국이 느낄 당혹함과 초조함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대해 초조감을 느끼지 않는 교육당국은 오히려 직무를 유기하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초조하다 하더라도 그 대책마저 졸속이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학생생활기록부에 기재하여 5년간 보존하도록 하겠다는 교과부의 지침은 그런 초조함이 만들어낸 또다른 졸속이다. "학교폭력"을 구태여 별도로 분류하는 까닭은 이것이 일차적으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당국이 내어 놓는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 역시 교육의 한 종류로서 나와야 한다. 적어도 이게 법무부나 행안부에서 내어놓는 대책과는 결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교육이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는 무수히 많지만 그 많은 정의들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것은 "학생의 변화를 위한 의도적인 개입"이라는 것이다. 교육은 학생의 변화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그저 기다린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개입, 즉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육적 조치도 학생의 변화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부의 이번 조치는 일단 징계를 받으면 돌이킬수 없게끔, 더 나아가서 보복성 불이익까지 당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형벌로서는 의미가 있으나 교육으로서는 의미가 없으며, 교육을 책임지는 부서에서 내놓을만한 방안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기재 거부"를 내세우는 일부 교육감의 대응과 그 논리에도 문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인권 침해"를 들먹였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 진보교육감의 인권관이 자유주의적 인권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의 자율성, 개인의 존엄성을 인권의 핵심으로 보기 시작하면 결국 이는 사회적 강자, 자본가를 위한 인권이 되고 한다. 그러나 공화주의적 인권관에서는 법이 아닌 일체의 자의적인 예종과 복종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인권의 핵심이다. 따라서 법과 제도를 통해 타인을 자의적으로 예종시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제어하고 억제하는 것은 전혀 인권 침해가 아니며 오히려 인권의 본질적인 측면에 속한다. 다만 이 법의 억제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가해진다는 조건만 갖추어져야 한다.

잠자고 있는 친구를 깨우기 위해 팔꿈치로 찔렀는데 가해자로 낙인 찍혀서야 되겠느냐는 어느 교육감의 항변은 인권과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만약 번번히 잠을 깨운다는 이유로 팔꿈치로 찌르는 행위가 여러차례 있었다면 이건 학교폭력이며, 찔린 학생이 싫어하는데도 했으면 학교폭력이며, 잠을 깨우는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힘으로 찔렀다면 이 역시 학교폭력이다. 오히려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이런 사소한 폭력을 저지를때 이루어져야 한다. 피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고 빵셔틀을 시키는 수준의 가해자는 사실상 교육적 선도가 어려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교육감은 이런 사소한 것도 학교폭력이냐라는 식으로 반발할 것이 아니라, 이런 "바늘도둑 수준의 가해자와 소도둑 수준의 가해자를 구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응징위주로 대처하는 것은 비교육적이다."라는 식으로 반발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고 진보교육감과 진보진영은 "가해자에게 너무 가혹하다면, 그럼 피해자는?"이라는 질문에, 그리고 "그렇게라도 안하면 퇴학도 못시키는 중학교에서 징계도 겁내지 않는 가해자들은 어떻게 제어하는데?"라는 일반학부모와 교사들의 항변에 대해 효과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판국에 "봉사활동 우수자로 선발했더니 장애인 성폭력 가해자였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그러면서 학생생활기록부에 폭력 가해사실 등 나쁜 일은 일체 적지 않으니 이게 무슨 자료로서 가치가 있느냐는 식의 대교협의 반응도 나왔다.  이 모든 것들이 분명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사실 교육감은 학생생활기록부에 무엇을 기재하라 마라 명령할 권한이 없다. 권한도 없이 기재 거부를 말한 것이다. 교과부 장관은 끝내 징계사실이 기재되지 않을 경우 교육감은 건너 뛰고 해당 교장만 징계할수도 있다. 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때 이 징계 수위를 낮추는 것 정도다.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법이 그렇다. 법이 그런데 땡깡을 쓰는 것은 공화국 시민의 도리가 아니다. 다만 그 법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개정을 요구하는 것이 보다 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기재 거부율이 몇 %라는 주장도 사실 의미가 없다. 어차피 생활기록부는 연말에 생성된다. 그러니 그건 기재 거부율이 아니라 미기재율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고3 학생의 경우 대입 수시를 위해 8월에 생활기록부를 생성하는데, 기재 거부율은 이 고3학생들의 생활기록부만 가지고 따져야 할 것이다. 대교협에서 대입에 이것을 반영하겠다고 말하고 요구한 이상 아마 교육감이 기재거부를 선언하며 농성하고 있는 교육청에서도 도리없이 담임교사들은 이걸 다 기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진보진영은 완전히 호구에 말려든 격이 되었다.

그런데 교과부는 보복성 특별감사라는 뻘짓을 했다. 감사할 이유가 없는데도 감사할 권한이 있다는 이유로 자기 정책에 반발하는 교육청에 감사팀을 보내서 행패를 부리는 것은 말하자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러니 이건 문자 그대로 병림픽이다. 이 병림픽의 순서를 그려보면 이렇다.

1) 교과부는 학교폭력을 근절한다면서 가해자에 대한 제재 방안은 각급 학교에 폭력적으로 강요하였다.

2) 진보진영은 가해자에 대한 교육적인 대처방안에 대한 고민 부족을 드러낸 상태에서 인권침해를 들어 이를 거부함으로써 본의아니게 폭력의 편에 서게 되었다.

3) 여기에 대해 교과부는 폭력을 없애자는데 왜 태클을 거냐면서 특별감사라는 폭력을 행사하였다.

정리해 놓고 나니 이건 코믹하기까지 하지만, 사실은 아찔하기도 하다. 만약 교과부가 3)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퇴학이 없는 초중학교에서 전혀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해자들을 억제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제시한 것인데, 일부 교육감들이 반발해서 추진이 어렵다. 부디 인권 근본주의, 원리주의를 벗어나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기 바란다." 이런 성명 하나 때리고, 대교협에서 입시에 반영한다 한마디 했으면 이건 진보진영의 완패로 끝났을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과부의 발끈 감사 덕분에 서로 개미지옥에 빠진 격이 되었다.

이제 이 병림픽을 끝낼때가 되었다. 이 병림픽을 끝내는 열쇠는 결국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다. 어떻게 피해자의 고통을 줄이고, 학교폭력을 줄일 것인가라는 문제에 머리를 모으자라고 서로 제안하면서  병림픽 상태를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이 논란 속에서 노출된 문제들을 정리해야 한다. 이 논란 속에서 드러난 문제들은 이렀다.

1) 너무 사소한 행위까지 일괄적으로 가해자로 처리되는 문제
2) 심각한 가해행위자에게는 너무 가볍고, 사소한 가해자에게는 너무 무거울 수 있는 조치
3) 가해자의 인권과 교육기회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억제력을 가질 수 있는 제재방안의 부재

이런 문제들은 교과부 장관의 불뚝성 정책이 아니라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연구와 준비, 그리고 학교폭력방지 특별법의 정교화를 통해 해결될 문제다. 1)의 경우는 학교폭력방지 특별법에서 학교폭력의 규정을 정확하게 함으로써 2)의 경우는 사안의 경중, 피해의 정도에 따라 여러 조치방안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법률상에서 열어 놓음으로써, 3)의 경우는 생활기록부 기재를 포함한 강력한 제재방안을 규정하되, 가해학생에게 의미있는 변화가 나타나면 이를 완화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해결이 가능하다. 특히 3)의 경우 기존 학교폭력방지특별법에 징계 기록에 대한 관리 규정이 없어서 비롯된 문제이니만큼 이를 별도로 규정해서 처리할 일이지 장관의 훈령상의 지침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교과부 장관은 더 이상 불뚝성 정책 남발과 발끈성 감사를 중단하기 바란다. 진보교육감들은 법률에서 위임된 범위를 훨씬 벗어나고 위헌의 소지가 있는 이번 기재지침에 대해 위헌심판 청구와 효력정지 가처분 청구를 하고, 학교폭력방지특별법의 실효화, 정교화를 위한 입법안 공동연구를 제안하기 바란다. 이런 병림픽을 하고 있기에는 피해학생들의 고통이 너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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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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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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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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