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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쇄신 없이 진보의 승리는 절대 불가능하다

요즘 대선판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는 진보의 자리가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당시 권영길 후보의 자리 말입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본질적으로 자본의 정당임을 드러내고, 진보의 참신함과 선명성을 드러낼 그런 후보 말입니다. 당시 노회찬 의원의 일갈처럼 "한나라당은 원조 부정부패당, 민주당은 신장개업 부정부패당", "불판을 갈아라" 등의 말이 먹히는 그런 진보후보 말입니다.

지금 그 자리의 공백을 안철수 후보가 차지했습니다. 이미 2007년 대선때 그런 참신함과 진취적인 후보의 자리를 "코리아 연방제"를 들고 나온 권영길 후보가  "사람을 살리는 경제"를 들고 나온 문국현 후보에게 진취적인 후보의 이미지에서 밀려나기 시작할때 예견된 일이지만, 이제는 밀려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무릇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 냉정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박근혜를 이기는 쪽이 진보가 아니라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는 쪽"이 진보입니다. 문재인이나 안철수는 진보쪽으로 견인해내기 쉬운 후보이지 진보후보는 아닌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진보가 더 이상 진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많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SNS를 서핑하다 보면, 다양한 팟캐스트들을 섭렵하다 보면, 혹은 2008년 촛불때의 그 분출하는 에너지와 담론들, 당시 진보신당 게시판의 그 유쾌발랄하던 토론과 아이디어들을 보면 이건 거짓말입니다. 진보는 진보했으며, 지금도 진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진보가 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보하지 않은 자들이 번번히 진보후보로 추대되었기 때문" 이라고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건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이 모인 진보운동 단체들이 한결같이 봉건적인 문화에 쩔어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진은 2008년 당시 촛불시위의 지도부를 자처했던 분들의 기자회견 장면입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지위는 무엇이었을까요? 대부분이 공동위원장입니다. 뭐라고요? 모두 위원장이라고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중 서너명은 상임공동위원장, 또 서너명은 고문, 서너명은 상임고문, 그리고 젊은 사람들 중 남자들은 집행위원장, 상황실장 등등 모두 간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촛불을 말아드신 진보 꼰대들

여기서 우리는 소위 진보운동권의 치명적인 약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들은 이 약점을 공략해 들어옵니다. 그 약점이란 바로 "자리"에 대한 욕망입니다. 어쩌면 이건 남성중심주의적인 운동권의 악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이란 하여간 자리에 연연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장"이 무한정 늘어납니다. 소위 진보단체에서 위원장이 한명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항상 공동위원장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중에 공동상임위원장이 있고, 그 밖에 수많은 장들이 있습니다. 여느 단체에서는 그저 간사, 주무 정도로 불릴 일을 하는 분도 집행위원장이란 멋진 타이틀을 받습니다. 집행위원들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전교조나 민주노총은 물론 위원장이 한 명이지만, 그 대신 수많은 "장"자리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전교조 당직자들 중 최하급 근무자의 직책은 "부장"입니다. 부장 위에 국장, 국장위에 실장, 실장위에 처장.

이 분들 나름 순수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듯한 "장" 자리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도 "장"자리가 무한정 늘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집행위원장만 30명, 공동위원장만 50명, 상임공동위원장 20명, 이런 단체가 무슨 단체입니까? 모든 의사가 원장인 동네 치과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장"자리를 더 이상 늘릴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지금 각종 "장" 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계속 "장"자리를 돌려가며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위 진보단체, 운동단체는 교묘한 과두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008년 촛불시위때 제 아무리 수만 군중을 몰고다니며 열렬히 싸웠다 해도, 저 점잖은 자리에 올라가 앉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미 자기들끼리 수없이 돌려가며 자리를 해먹은 "진보 명망가"들 만으로도 자리는 꽉 찼거든요.

이렇게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공범이 됩니다. 공동운명체가 되다 보니 서로간의 비판은 절대 삼가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진보, 좌파 활동가들간의 공개비판이 없는 나라도 드뭅니다. 서로 서로 주례사 하기 바쁩니다. 진보행사 열렸을때 이들 진보명망가들끼리 서로 인사나누는 소리 들어보면 완전 오글거릴 지경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진보의 정신인 "비판정신"과 "진정성(생각과 말의 일치)"을 드러내는 사람은 도리어 "단결을 해치는 자", "인화에 문제가 있는 자"로 몰립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근거로 논리를 전개하는가에는 관심도 없고, 다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해친다"에만 방점이 놓입니다.

좌파도 아닌 미국 주류 경제학자들인 그레고리 맨큐와 폴 그루그먼이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공개된 블로그를 통해 주고받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진보는 미국 중도파만큼도 왼쪽으로 가 있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페이스북에 어떤 진보 인사에 대해 주례사, 그의 책에 대해 감동먹었어요 계통의 글을 올리면 좋아요가 줄줄이 달립니다. 하지만 어떤 진보인사에 대해 그의 한계, 그의 책에 은연중에 숨어있는 보수성 등을 지적하면  용감한 몇 분 빼고는 좋아요 누르지 않습니다. 서로 서로 눈치보며 결국 마음에도 없는 주례사나 해야 하는 공론장. 이게 바로 소위 진보 운동단체들의 실상입니다. 결국 '진보'라 쓰고 '장유유서'라 읽는 풍토가 자리잡습니다. 일단 운동권 원로로 대접받기 시작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하던, 아무리 시대에 뒤떨어진 말을 하건 무조건 박수를 받고 존경의 찬사를 듣습니다.

이게 독입니다. 그러니 어떤 진보인사가 공부를 하고 탐구를 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판정신은 진보진영에서 출세하는데 치명적입니다. 모나지 않아야 하고, 어른 잘 모셔야 하고, 그래서 나중에 그 어른을 보좌하면서 어른의 후광을 입어 집행위원장 등 실무진부터 시작해서, 차차 위원장 급이 되는게 정통코스입니다.

어차피 진보는 비판하는 진영이니 실패에 대해 책임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기면 내탓, 지면 탄압 탓입니다. 그러니 능력은 진보진영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른 잘 모시고, 주례사 잘 하는 것, 한마디로 수꼴짓 잘하는 역설적인 능력이 출세의 지름길입니다.

이들이 변방에서 께작거릴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때 실제로 힘있는 자리가 수천개가 생겼을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리고 지금 진보 원로라고 계속 얼굴 들이미는 분들 중에는 그 시절의 단맛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이 분들이 자리를 내 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진보가 아무리 진보해도 진보진영의 대표자들은 늘 수구 꼰대들이 나서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깨야 합니다. 주례사 문화를 깨고, 장유유서 문화를 깨고, 비판과 진정성의 문화가 그 자리를 잡게 해야 합니다.

젊은 진보들이여! 혁명은 보수, 수구를 향하기 전에 먼저 진보진영 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진보진영의 꼰대들을 타도하십시오! 과거의 투쟁이 오늘의 존경의 근원이 될수는 없습니다. 존경은 매순간 행위에 따라 갱신되는 것입니다. 투쟁!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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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