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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을 아무리 핍박해도 교육혁신의 시대정신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곽노현 교육감의 선고공판이 내일이다. 저들은 이미 사퇴한 지 오래된 상대 후보를, 그래서 더 이상 매수할 후보직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선거도 끝나고, 이미 취임한지 반년도 더 지나서 매수했다는 대한민국 헌정사는 물론 세계 헌정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후 매수죄’라는 기상천외한 혐의로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사후 매수죄가 얼마나 형용모순인지, 그래서 법리상으로 얼마나 심각한 논쟁거리인지는 구태여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또 이렇게 논란거리인 법조항이 헌법재판소에서 이미 심리중이고, 또 그 기간도 꽤 지나서 조만간에 판결이 나올 상황인데도 굳이 먼저 선고를 하겠다고 나서는 대법원의 불합리한 조치에 대한 비판도 이미 충분히 여러 매체에서 많은 법률가들이 설파했으니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바는 만약 곽노현 교육감이 그 직을 상실할 경우를 기다리며 웃음을 감추고 있는 세력들에게 그들의 기대는 결코 충족되지 않을 것임을 찬찬히 일러두고자 하는 것이다. 

곽노현 교육감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력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첫번째로 떠올릴 수 있는 집단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혹은 보수 후보의 승리를 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 사건을 진보세력에 대한 도덕적 스캔들로 비화시키고, 그래서 서울 교육감 선거와 동시에 치루어질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만들고자 할 것이다. 

 두번째로 떠올릴 수 있는 집단은 교육계의 기득권자들인 보수 관료, 교총, 그리고 사학 재단 관계자들이다. 이들은 그 동안 눈엣 가시 같았던 곽노현 식의 교육개혁이 중단되고, 보수 교육감이 다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지금까지 바뀌었던, 그리고 앞으로 바뀌어 갈 교육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리고자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떠올릴 수 있는 집단은 교육운동계 혹은 전교조의 기득권자들이다. 이들은 그 동안 교육운동의 담론을 독점하면서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교육은 물론 교육과 무관한 영역에서까지 각종 이익과 영광을 누렸던 운동권 명망가들이다. 곽노현 교육감은 전교조나 교육 운동판의 명망가들 보다는 같은 전교조 교사라도 정치권 기웃대지 않고 교육에만 매진해왔던 전교조 비주류들을 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운동권 특유의 회전문 인사를 통해 실력에 비해 과도한 영향력을 뽐내었던 명망가들에게 지난 2년은 답답하고 초조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제 다시 교육운동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세 집단의 바람은 모두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곽노현 교육감이 재판에서 승리한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설사 패배한다 하더라도 세 집단은 결코 자기들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보수진영의 꿈들부터 깨워주기로 하자. ‘사후 매수죄’라는 그 이름부터 모순적인 죄로 곽노현 교육감을 얽어맨 뒤, 이것을 야권의 도덕 스캔들로 비화시켜 대통령 선거에 활용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려면 어떤 형태로건 매수 행위가 있었어야 한다. 즉 돈을 나중에 주더라도 적어도 후보 사퇴 전에 어떤 형태로든 약속이나 언질이 있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종의 후불거래가 성립되기 때문에 명백한 후보 매수가 성립된다. 하지만 1심과 2심 모두 곽노현 교육감은 상대 후보에게 어떤 매수행위도 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그렇다면 곽노현 교육감은 설사 그 직을 상실한다 할지라도 뭔가 문제가 있는 법률 조항의 희생양 혹은 어떤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비추어질 뿐이다. 이는 야권의 결집을 위한 소재는 될지언정 도덕적 스캔들의 소재는 되지 못한다. 

또 곽노현 교육감을 제거함으로써 그동안 진행된 교육개혁을 뒤로 돌리려는 보수 세력과 기득권세력의 희망 역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소위 곽노현 표 교육개혁은 곽노현 개인의 소신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개별학습과 경쟁을 통한 지식 습득의 낡은 교육 대신 협력과 소통을 통한 전면적인 발달의 새로운 교육이라는 이 시대 정신은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경쟁교육을 부추긴 주범인 OECD PISA조차 협력적 문제해결 능력을 운운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수세력들이 동성애·임신을 조장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해 가며 반대했던 학생 인권 역시 곽노현 개인의 소신이 아니라 시대정신이다. 학생인권 조례는 세계 아동·청소년 권리협약의 정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학생들을 각종 억압과 학습노동으로부터 자유롭고, 충분한 놀이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이 생각 역시 세계의 시대정신인 것이다. 그러니 온 세계의 흐름을 한줌의 보수 세력의 힘으로 막아보겠다는 시도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희극적이다. 

게다가 현재 추진되고 있고, 앞으로도 추진되어야 할 각종 교육개혁 정책들과 서울형 혁신학교에는 곽노현 한 사람의 꿈과 희망이 아니라 수많은 교육자들과 교육운동가들의 꿈과 희망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른바 곽노현 표 교육혁신 정책들은 곽노현 개인의 소산이 아니다. 이것들은 속세의 출세와 영리는 물론 운동권 단체, 전교조에서의 출세조차 거부하고 오직 아이들의 행복만을 꿈꿔왔던 그런 무수한 교사, 학생, 학부모들의 얽히고 설킨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곽노현 한 사람을 제거한다고 해서 중단되지 않으며, 심지어 곽노현 교육감 스스로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 이런 거대한 흐름을 기껏 권한대행 수준에서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당장 이대영 부교육감부터 믿지 않을 것이다. 재보궐 선거 역시 이 시대정신의 흐름에 누가 편승하며, 누가 거스르느냐를 심판하는 선거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교육개혁, 교육혁신을 막거나 되돌리려는 집단의 꿈은 영원한 헛꿈으로 남고 말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달려오는 수레 앞에서 힘자랑을 하려는 사마귀의 꼴이 되고 말 것이니, 망신을 자초하지 말고 조용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도 더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전교조 주류 혹은 운동권 명망가들의 꿈 역시 헛꿈이 되고 말 것이다. 현명한 시민들은 곽노현 교육감의 교육혁신이 난관에 부딪칠 때, 또 작년에 곽노현 교육감이 옥고를 치루는 등 간난신고를 겪고, 올해 초 다시 직무에 복귀한 뒤에도 조중동과 보수단체를 상대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할 때 그 훌륭하신 진보교육 명망가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거기에 없었다. 

교육개혁이나 교육혁신은 단지 기존의 교육제도만 혁신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교육운동마저도 혁신한다. 이 도도한 시대정신의 물결을 선도할 수 있는 사람이 진보에 속한다. 그 물결에 뒤떨어진 자라면 아무리 그 동안 교육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할지라도 더 이상 진보가 아니며, 만약 그 물결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교육운동의 경력 많음을 내세워 발언권을 얻고자 한다면, 다만 꼰대에 불과할 것이다. 곽노현 교육감이 물꼬를 튼 교육혁신의 물결은 낡은 교육 기득권층 뿐 아니라 교육운동 기득권층까지 모두 정리해 버릴 것이다. 기꺼이 그 기득권을 버리고 여기에 동참할 명망가들이야 말로 진정한 교육운동의 원로이며 진보의 증인이 될 것이다. 

자, 이렇게 곽노현 교육감을 얽어 맴으로써 얻을 것이 있으리라 기대한 세력들의 바램이 모두 헛꿈임을 충분히 밝혔다. 헛꿈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도 충분히 밝혔다. 그러니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교육계의 기득권을 누려온 집단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곽노현 교육감의 무죄를 요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시대정신의 물결이 성난 파도가 되어 자신들을 쓸어버리는 참변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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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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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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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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