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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장군의 딸 수치, 박정희 장군의 딸 근혜

 최근에 개봉한 영화 "더 레이디"가 상영관의 교묘한 시간배치에도 불구하고(보기 어려운 시간만 골라가며 배치) 입소문을 빠르게 타고 있다. 그런데 이 입소문 중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 입소문이 있어서 부득불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 소문이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미안마(버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를 연결짓는 어처구니 없는 입소문이다.

물론 박근혜 입장에서야 "강철 난초"라느니 "여성 만델라"라느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여성의 이미지에 자신을 슬쩍 얹어 가는 것이 엄청난 이득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세계의 존경을 받고 있는 아웅산 수치 여사 입장은 뭐가 되겠는가?

영화속의 한 장면을 보자. 시위대에게 발포하려는 군인들의 총구를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는 모습이다. 자, 따져보자. 박근혜 후보의 인생은 총을 겨눈 이 군인들과 수치 등 뒤에서 초조하게 바라보는 민주화 운동세력들 중 어느쪽이었나? 바로 답이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공교롭게 아버지가 장군이었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가 암살당했다는 점, 그리고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정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꾸 이 둘을 비교하는 정신나간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장군인 아버지부터 그 결이 다르다.

1.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장군 vs 독립군과 싸운 장군/ 쿠데타에 희생된 장군 vs 쿠데타로 권력을 차지한 장군



수치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은 버마 독립운동의 영웅이다. 여러 소수민족과 지방세력으로 나뉘어져 영국의 지배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던 버마인들을 단결시켜 영국군과 싸웠다. 그런데 처음 영국군과 싸울때 이를 지원하던 일본군이 영국을 몰아내자마자 버마를 지배하려 하자, 이번에는 다시 일본군과 싸웠다. 이렇게 거의 평생을 싸웠으나 정작 조국 독립을 6개월 앞두고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총탄을 맞고 동지 7명과 함께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아웅산 장군은 소수민족까지 총 망라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버마 민족의 순혈주의를 고집하던 종족주의자들이 그를 암살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버마인들은 아웅산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무사히 나라를 출범시켰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을 버마 화폐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며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군부정권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자 아웅산 장군의 초상화를 화폐에서 삭제하기 위해 아예 아무 인물이 나오지 않는 화폐를 발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인 박정희 장군은?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 앞잡이인 만주군 장교로서 만주벌판을 누볐다. 흔히 그의 역사적 라이벌로 거론되는 장준하 선생이 일본군 노릇이 싫다면서 일본군 부대를 탈영해서 천리길을 걸어 대한광복군에 입대했던 바로 그 시절의 일이다. 그리고는 해방 이후 어느새 좌파로 변신했다가, 다시 극우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는 등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다 급기야는 군사정변을 일으켜서 권력을 움켜 잡았다. 

이 두 장군이 같은 장군인가?

2. UN에서 일하고 두 아이의 자상한 어머니인 여성 vs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알수 없는 여성

아웅산 수치 여사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뒤, 인도에서 성장했고 영국에서 배웠다. 옥스포드 대학을 3등으로 졸업했으며, 정치학, 철학,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뒤에는 UN사무국, 부탄 외무부 등에 근무한 전문여성이다. 그러다가 학벌도 별로고 돈도 없지만 인품에 반한 마이클 아이리스와 결혼 한 뒤 두 아이의 어머니와 한 남자의 아내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수치 여사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자상하고 우아한 미소는 결코 연출이 아니라 바로 이런 어머니로서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아들과 함께 한 아래의 사진을 보라.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삶"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그 초인적인 정신력의 근원도 바로 이 "삶"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싶다.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사망 이후 도대체 무엇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수가 없다. 전두환이 준 6억원(당시 강남구의 33평 아파트가 1억 5천만원이었음)을 덥썩 받았다고 스스로 밝혔으니, 대충 수수께끼는 밝혀진 셈인가? 거의 대부분의 회의를 결석한 국회에서 의원세비 받는것도 쏠쏠했을 것이고. 물론 가정을 꾸린적도 없고, 심지어 동생과도 불화하여 거의 칼부림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국민들 앞에서는 늘 자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게 연출이 아니면 뭐가 연출인가?

3. 국민의 염원에 의해 정치인이 된 여성 vs 자신의 정치를 위해 국민을 호출하는 여성

아웅산 수치 여사는 10여년을 가정주부로 영국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왔고, 그 와중에 우리나라 518에 해당되는 8888 민주항쟁을 맞이한다. 군부는 민주화 시위대를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대었고 수많은 대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공포의 상황에서 버마 민중은 버마 독립의 상징이자 신격화된 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이 현재 버마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 후광의 우산 속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고자 했다. 수치 여사에게 이것은 잔인한 선택인데, 영국에 두고 온 남편과 아들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 댓가로 언제 이마에 총알이 박혀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삶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치는 그런 민중의 염원에 의해 거의 등떠밀리듯 나서게 된 정치가로서의 삶을 받아들인다.(어떤 정신 나간 NL잡종은 이게 영국,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서 공작지령을 받고 한 일이라고 우겨댄다. 어떤 미친 간첩이 남편과 아들들과 20년을 떨어지고 15년을 감금당하고, 남편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는 삶을 감수한단 말인가? 지들이 한 번 해 보라고 하자.). 버마 군사독재정권은 여사에게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만 하면 무사히 돌려보내겠지만, 남아있으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협박한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댓가로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감금 당한다.

이런 이야기로만 보면 정말 강인한 여성으로 보이지만, 영화 "레이디"에서 묘사된 아웅산 수치 여사는 총소리만 들려도 자지러질 듯이 놀라는 겁많고 유약한 여성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라"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끊임없이 치밀어 오는 그 공포와 싸우면서 억지로 용기를 내고 그 고통들을 겪었다. 이런 모습이 강인하고 용감한 성품의 소유자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 영화가 아닌 실제 아웅산 수치 여사의 모습도 그 굳센 의지가 엿보이는 눈매를 제외하면 참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무슨 근거로 자신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정당성을 주장하는지 알 수 없다. 박근혜 후보의 정치적 자산은 도대체 뭔가? 그 아버지의 딸? 하지만 이미 그 아버지의 함량도 저리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감히 두 여성을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4. 독재자에게 단호하고 국민에게 자상한 여성 vs 독재자에게 침묵하고 국민에게 발끈하는 여성

아웅산 수치 여사의 이미지는 매우 온화하다. 버마 국민들 중 그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군사독재자들 뿐이었다. 2007년에는 수천명의 승려들이 감금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몰려들었고, 독재정권은 그녀의 집에 접근하는 모든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 여자 한 사람을 이렇게 두려워한 군사정권이 또 있을까 싶다.하지만 국민들과 함께 있을때 그녀의 모습은 항상 격의 없고 소탈하며 자상하다. 이렇게 사심없는 웃음을 보여준 정치인은 내가 알기론 우리나라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 외에는 없다. 국민 앞에서는 이런 부드러운 웃음을, 그리고 독재자 앞에서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수치는 독재자 앞에서 단호하기는 했지만 발끈하거나 난폭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내가 배우고 반성해야 할 점이다. 단호하게 투쟁하되 어떤 경우에도 난폭해지지 않는 것... 어렵다.

반면 박근혜 후보는 발끈해라는 탐탁지 않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발끈하는 대상 중 가장 빈번한 대상은 기자나 언론인이다. 반면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박근혜 후보는 아웅산 수치 여사 못지 않게 우아하고 정중하다. 결국 권력자 앞에서는 정중하고 국민앞에서는 발끈한 셈이 된다. 나는 박근혜 후보가 1212 때, 518 때, 610 때, 그리고 최근 이명박 정부 치하에서 독재자에 맞서는 단 하나의 워딩도 한 것을 본적 없다. 그러면서 민주화 운동의 헤모글로빈 낭자한 성과물인 이 대통령 직선제, 자신의 아버지가 폐지했으나 국민의 힘으로 되찾은 이 제도의 과실만 날로 먹으려는 것 처럼 보여서 참으로 불쾌하고 뻔뻔해 보이기까지 한다.
적어도 대통령 직선제의 혜택을 보려면 대통령 선거를 폐지했던 자신의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하며, 이후 전두환 독재의 여러 비극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회한이라도 한마디 던져야 한다. 하지만 이분은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면 발끈한다.


이렇게 아웅산 수치와 박근혜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아웅산 수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체포되는 독재정권의 억압때문에 국민들이 "더 레이디"라고 불렸던 것이며,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었기 때문에 공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수 없어서 "영애"(레이디)라고 불렸던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아웅산 수치는 독립 영웅의 딸로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가족과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버리고 15년의 감금생활까지 견뎌낸 여성이며, 박근혜는 독립군 잡던 군인의 딸로서 조국의 민주주의가 유린된 독재정권의 과실을 누렸으며, 민주화를 위해 아무것도 기여한 바는 없지만 어쨌든 권력을 잡겠다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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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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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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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