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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통령과의 대화(8) 원래 경쟁이란 신자유주의 경쟁교육에서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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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통령과의 대화(8) 원래 경쟁이란 신자유주의 경쟁교육에서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교수: 예고한 대로, 이번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교육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가 하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 , 송 선생님 아주 빨리 손을 드시네요.
송혁재: 사실, 제가 이 주제를 다루자고 제안한 이유를 좀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사실 교육 경쟁력을 토론 주제로 삼고자 한 것은 교육에 경쟁력이란 말 붙이는 것을 그만두자고 말하기 위해섭니다.
우부친: 이 세상이 어차피 경쟁 판인데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역시 학교 선생님들은 너무 경쟁 안전지대에 계셔서 그런지 몰라도, 세상이 얼마나 살기 힘든 곳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송혁재: 그렇다고 해서 이 경쟁 판이 좋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싫습니다. 아버님도 싫으시죠? 그런데 이런 세상을 그냥 자식들에게도 물려주자고요? 우리는 몰라도 우리 다음 세대는 경쟁보다는 협력이 중요한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그리고 그게 바로 공교육이 할 일이고.
우부친: 경쟁보다 협력... 말은 아름답죠. 하지만 그런 교육 받고 학교 졸업하면요? 바로 경쟁 판에서 나가떨어지는데요?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호구로 만들고 싶겠습니까?
송혁재: 그러니까 경쟁보다 협력이 대접받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정치가를 뽑았어야죠.
이홍주: (불쑥 뛰어들며) 그렇다 해도 그게 하루 이틀에 된답니까? 결국 우리 자녀들이 살아야 할 세상이 치열한 경쟁 사회라는 건 바뀌지 않아요. 그러니 어릴 때부터 경쟁을 자꾸 해 버릇해야 실력이 늘고 경쟁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애들이 살아갈 세상이 너 아니면 내가 죽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라면, 그걸 학생 때부터 미리 겪으면 좋잖아요? 오히려 안전한 경쟁 연습이잖습니까? 학교 경쟁에서 실패한다고 당장 길바닥에 나 앉거나 하진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왜 자꾸 협력을 들먹일까요? 혹시 본인들이 경쟁하기 싫어서 아닙니까? 왜 선생님들은 경쟁 안합니까? 선생님들도 경쟁해서 실력 없는 분들을 좀 걸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래야 교육이 제대로 되고, 그래야 사교육으로 몰려드는 학부모들의 발걸음을 잡을 것 아닙니까?
송혁재: (발끈 하면서 카랑카랑하게) 이 보세요. 핀란드 교육 못 보셨어요?
이홍주: 여기가 핀란드입니까? 여긴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니 거 견적 안 맞는 말씀 하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이 땅 얘기 좀 하자고요.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라고요? 네 듣기는 좋죠. 하지만 이걸 어쩌죠? 나한테는 그 말이 마치 경쟁력 없는 교사들, 무사 안일한 교사들이 협력이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를 통해 서로서로 감싸고 넘어가려는 핑계로 밖에 들리지를 않습니다.
송혁재: (완전 격노하여) 아니, 이 뉴 라이트 수구 꼴통!
이홍주: (같이 격노하며) 그래, 잘 하면 치겠네? 역시 전교조답네.
나교수: (다소 난감하게) 아이고, 다들 진정하시고요.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여러 분이 경쟁이나 경쟁력이란 말을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원교수님. 철학자로서 개념을 좀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정규: 그렇게 해 볼까요? 먼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통일해야 논쟁이 가능한 법이니까요. 일단 사전적 의미의 경쟁은 그저 같은 목적에 대하여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겨루는 과정이 경쟁이지 겨룸의 결과까지 경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경쟁의 사전적 의미는 겨루는 과정에 해당되지,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는 냉혹한 승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경쟁이라는 말을 사전적인 의미와는 좀 거리가 멀게 사용해 왔습니다. 과정보다는 승패의 결과를 중심으로 경쟁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죠. 예를 들면(우부친을 가리키며) 아버님께서는 경쟁자, 경쟁상대가 있습니까?
우부친: 물론이죠.
원정규: 그럼 그 경쟁자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이 따라 나옵니까?
우부친: 그 자식한테 한 방 먹이고 내가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죠.
원정규: 어이쿠, 이거 아주 적나라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솔직한 말씀 고맙습니다. .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그 동안 경쟁을 이기느냐 지느냐를 다투는 그런 의미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런 용법으로 경쟁을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경쟁 그러면 승자에게는 보상이 패자에게는 파멸이 기다리는 그런 상황이 연상되는 것은 당연하죠.
특히 150여 년 전 사회 진화론자들은 적자생존, 약육강식등의 말을 퍼뜨리면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한 경쟁의 결과라면서 합리화했습니다. 식민지가 된 나라는 경쟁에서 패했으니 망한 것이 당연하다, 심지어 패배한 쪽이 잘못이다라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죠. 여기에 덧붙여 생존경쟁”, “무한경쟁따위의 말까지 사용되면서 우리는 경쟁”, “경쟁력이라는 말 앞에서 완전히 주눅 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며, 안 그러면 죽는다는 식의 논리가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경쟁이라는 말은 원래부터 그렇게 삭막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닙니다.
송혁재: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툴 경에 다툴 쟁자가 합쳐진 말 아닙니까? 다투고 다투는 것이니 이 얼마나 삭막한 단어입니까?
원정규: , 물론 한자 풀이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경쟁이라는 단어가 19세기까지는 우리말에 없던 단어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경()과 쟁()은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경은 주로 제한된 자원(특히 어떤 지위나 관직)을 차지하고자 서로 다투는 상황에 사용되었으며, 쟁은 서로 시기하여 다투는 상황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경합, 투쟁 이런 단어는 있어도 경쟁이란 단어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경쟁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competition을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죠.
송혁재: 그렇다면 competition이라는 단어에 살벌한 의미가 들어있었겠군요.
원정규: 하하.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competiot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conpetere인데, con함께’, petere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직역하면 함께 가다가 되겠죠. 물론 이때 같이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속도를 견주는 경우는 있겠지만, 이는 먼저 도착하기 위함이지, 상대방을 탈락시킴으로써 자신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의 속도를 견주어 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쌍방 모두가 더 빨리 도착하게 될 수도 있는데, 바로 이런 상황이 우리가 경쟁이라고 번역하는 competition인 것입니다.
송혁재: 하지만 먼저 도착한 쪽은 이득을 보고, 나중에 도착한 쪽은 결국 손해를 보잖아요?
원정규: 아뇨. 어느 쪽이 먼저 도착했건 간에 두 사람 모두 원래 목표했던 시간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윈윈 입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는 이미 더 빨리 도달한다는 목표가 달성된 이상 큰 의미가 없고요. 즉 경쟁은 자신의 경쟁자와 목표·성공을 공유하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경쟁은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부친: (막 반발하려는 송혁재의 말을 가로채며) , 그래서 유럽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도 활짝 웃는군요? 우리 선수들은 막 우는데?
원정규: 그렇습니다. 이기고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죠. 그런 마음 덕분에 다른 선수들과 경쟁한 것이지만, 비록 졌다 하더라도 경쟁을 한 덕분에 자기 최고 기록을 깨거나 애초 목표보다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보다 더 잘한 선수는 경쟁자이자 동시에 자신의 목표 달성을 도와준 조력자가 된 셈이죠.
우부친: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라이벌 덕분에 나도 더 분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뭘 해 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 아닙니까?
원정규: 그렇습니다. , 방금 라이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흔히 경쟁자로 번역되는 이 rival이라는 말의 어원도 흥미롭습니다. 라이벌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river을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에는 같은 자원, 즉 물을 두고 서로 다툰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내 강이 네 강이고, 네 강이 내 강이기 때문에 이들은 재해 예방과 강물의 합리적 활용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가 됩니다. 예컨대 서로 승진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 관계의 장교들이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이들은 적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경쟁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다툼과 협력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쟁의 반대말로 협력을 대비시키는 것은 방향이 조금 어긋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혁재: , 거 말 장난 좀 그만 합시다. 어원이야 뭐가 되었건 간에 오늘날 경쟁이라는 말은 서로 다투어서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고, 패자를 낙오자로 만드는 그런 시스템을 합리화 하는데 쓰이는 게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경쟁교육 그만 두고 협력 교육으로 가자는 건데, 지금 교수님 말씀은 제 귀에는 마치 경쟁교육 그만두고 제대로 경쟁교육하자 이러는 것처럼 들립니다.
원정규: 솔직히 저는 경쟁교육과 구별되는 협력교육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교육에서 일체의 선발기능을 배제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교육에서 순위를 매기는 일을 일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까?
송혁재: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입시제도 철폐를 주장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일정한 대학 수학능력을 가진 학생들만 선발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대학의 서열을 동등하게 하여 거주지든, 선착순이든 배정하자는 것입니다.
원정규: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학 수학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야 할 것 아닙니까? 공대 교수가 2차함수가 뭔지, 방정식이 뭔지도 모르는 학생들 앞에서 뭘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송혁재: 그거야 그렇죠.
원정규: 그리고 대학에 가기를 원한다고 해서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대학에 가고싶어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학에서 배울수 있는 학생을 가려내는 선발과정은 불가피하단 말입니다. 또 독일 같은 경우는 애초에 대학 진학이 가능한 김나지움에 들어갈수 있는 학생을 엄격하게 선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3밖에 못 들어가는 김나지움에 들어가기 위해 협력을 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설마 선생님이 하시고자 하는 경쟁 철폐, 협력교육이 김나지움에 못 들어갈 친구 둘이 들어갈 수 있는 친구 한 명을 도와준다는 의미는 아니겠죠?
송혁재: 누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다는 겁니까? 저 역시 교육의 선발 기능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선발 기능이 지나친 경쟁으로 과열되어 부작용을 만들어 내니까 문제라는 것이죠.
원정규: 그러니까 결국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는 거죠? 그 과열된 경쟁 말입니다.
송혁재: 그런 셈입니다.
원정규: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경쟁교육 철폐라는 것은 지나치고 과열된 경쟁교육 철폐라는 뜻이지 교육에서 경쟁 자체를 철폐한다는 것은 아니죠?
송혁재: (미심쩍어 하며 마지못해)그렇습니다.
원정규: 마찬가지로 제가 교육에서 경쟁의 의미를 바로잡자고 말하는 것은 경쟁에도 협력의 요소가 들어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경쟁과 협력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경쟁합니다. 공통의 목표에 합의하고, 그 공통의 목표를 함께 달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협력이지만, 그 협력 과정에서 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경쟁입니다.
이렇게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협력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다툼, 협동의 반대편에 있는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갈등이나 투쟁이라고 불러야겠죠.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교육을 경쟁교육이라는 말 보다는 갈등 교육이라는 말로 부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자모: 저어, 경쟁과 갈등의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정규: 정치가들의 예를 들어 봅시다. 정치가들은 국가의 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 공동의 목표에 누가 더 많이 기여하는가를 놓고 서로 경쟁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경쟁을 할 때 국가는 활기를 찾고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가들이 누가 더 많은 기여를 하는가, 누가 국민의 인정을 더 많이 받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파멸시킴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공통의 목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서로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것에만 전념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경쟁이 아니라 싸움이라고 해야겠죠.
송혁재:(이홍주를 노려보며) 그것도 개싸움이죠.
오자모: 그렇다면 경쟁에서 승패는 큰 의미가 없겠네요?
원정규: 그렇습니다. ·서양 모두를 따져 보아도 경쟁이라는 말에는 단지 서로 견주어 본다는 정도의 의미가 들어있을 뿐, 상대방을 물리친다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경쟁할까요? 홀로 달리는 것보다 함께 달리는 것이 기록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경쟁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활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자모: 그럼, 학교의 경쟁력이 있다, 없다, 교사의 경쟁력을 높이자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데요, 경쟁력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죠?
원정규: 우리는 이미 경쟁의 의미를 바로잡았습니다. 그렇다면 경쟁력의 의미도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죠? 경쟁력은 문자 그대로 경쟁할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견주어볼만한 정도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경쟁력을 상대방을 제압하고 더 유리한 위치에 서서 유용한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 한 마디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이란 뜻으로 써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뜻이라면 경쟁력이 아니라 투쟁력 내지는 전투력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오자모: 그렇다면 겨뤄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원정규: 그 말이 아주 좋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경쟁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자극이 될 정도의 능력, 이런 정도의 뜻으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즉 경쟁력은 상대와 견주었을 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지 상대를 물리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 경쟁력이라는 말의 뜻도 달라져야 합니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볼만한 수준이라는 의미지 다른 나라들을 물리치는 능력이 아닙니다.
송혁재: 좋습니다. , 경쟁이라는 게 그런 좋은 뜻이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지금 사용되는 경쟁이라는 말이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시죠?
원정규: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쟁이 없는 세상을 현실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경쟁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경쟁이라는 용어에 슬그머니 왜곡되고 잔혹하고 냉혹한 의미를 밀어 넣어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사용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쟁 없는 세상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반문하면서, 슬그머니 이 세상이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상인 것이 당연하며, 심지어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홍주: (거만하게) , 거 말씀 한 번 참 잘도 하십니다. 하지만 현실은요? 현실은 약육강식의 정글입니다. 세계는 조금만 한 눈 팔면 뒤떨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세계를 주름잡던 포드 자동차나, 소니 전자의 운명을 보세요. 그러니 경쟁의 의미가 왜곡되었건 말건 간에 현재의 정글 같은 세계 경제 질서에서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왜곡되고 잔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거기 뛰어들어 이겨야 하고, 또 이길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이 경쟁 맛을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경쟁도 해 본 놈이 그 맛을 알고, 이겨 본 놈이 승리의 기쁨을 안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경쟁 교육을 더 강화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될 싹 안 될 싹을 가려내고, 그래서 될 쪽에게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편이 국가 경쟁력도 높이고, 결국 안 될 쪽에게도 이득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원정규: , 죄송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위 안 될 싹은 어떻게 되는 거죠?
이홍주: 노동해야죠. 하지만 그들이 노동을 하려면 고용이 창출되어야 하고, 고용이 창출되려면 유능한 기업가와 전문가가 많이 나와야 하죠. 그러니 수월성 교육이야말로 모두를 이롭게 하는 교육입니다.
원정규: 그러니까 어릴 때 부터 아주 치열하게 경쟁을 붙여서 소수만 살아남아 고급의 교육을 받게 하고 나머지 탈락자들은 직업교육을 받도록 하던가 하자, 그런 말씀이신가요?
이홍주: 그렇습니다. 그러니 당신네 친북좌파들 주장하는 평등교육은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려서 결국 고용이 축소되게 만드니 가난하고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만드는 불평등 심화교육이란 말입니다.
교육 대통령: (나교수를 보며) 사회적 평등이나 국가 경쟁력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니 슬슬 주제가 원 교수님 전공에서 제 전공으로 넘어 온 것 같습니다. 이건 사회학자 출신이 철학자보다는 더 답하기 쉬울 것 같거든요.
나교수:(웃음을 지으며) 그러네요. 원 교수님. 이제 당선인께 짐을 좀 넘기시는 게 어떨까요?
원정규: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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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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