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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재를 읽자! 곽노현 교육감은 끌려가고, 그 진영은 선거에서 패했으나 생각은 살아남는다

곽노현 교육감이 영어의 몸이 된 상태에서 곽노현 교유감의 잔당(?)들이 고군분투했으나, 기존 운동권 주류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송순재 교수라는 교육철학자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소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제 교육혁신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송순재 교수가 쓰거나 옮긴 책들을 공유하고, 함께 교육혁신의 상상력을 키우고 그 폭과 품을 넓혀 나갈것을 권합니다. 이렇게 하나 둘 넓어지고 깊어진 우리의 생각이 모여서 저 완강한 주류, 보수 교육론을 물리치고 교육철학이 있는 교육혁신이라는 새 기원을 열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누가 알아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교과부가 해체되고, 국가교육위원회가 만들어진다면 어떤 분들이 그 위원이 되어야 겠습니까? 곽노현 위원장, 송순재 위원의 꿈을 꾸어 봅니다.





1) 상상력으로 교육에 말걸기: 공간, 소리, 색채에 대한 교육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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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표적인 대안교육 이론가인 저자가 그동안 「우리교육」 「좋은 교육」 등에 단편적으로 발표해왔던 글들을 각 주제별로 모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이다. 교사들과 모임을 함께하면서 ‘교사로 산다는 것’과 ‘학교를 단위로 한 변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집중해온 저자의 교육학적 고민과 생각의 지평이 어디까지 확대되고 심화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국내외의 사례와 동서고금의 문헌,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를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각 주제와 관련시켜 교육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교육의 근본 과제는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2)사유하는 교사(한스 쇼이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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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엮은 교사 입문서이다. 교사라는 위치에 대해 교육학적인 안목에서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주어진 문제를 과학적, 이론적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한층 단순화시켜 제시한 사건들을 통해 교육적 과정을 고찰하고, 과정에서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사건들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3) 덴마크 자유교육: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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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유럽 여러 나라 특히 스웨덴, 핀란드 등지의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성이나 인간존중 혹은 한 나라의 풍토에 고유하게 뿌리박아 성장한 자유교육이나 민주적 시민교육이라는 점에서, 또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독창적이며 근세사에서 북유럽 인접 국가들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덴마크 교육은 남다르다. 저자는 이러한 덴마크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자유교육과 시민대학의 사상적 원천이 되었던 그룬트비와 자유학교와 시민대학의 실제적 구현자인 콜을 만나 덴마크의 교육 내용을 책으로 담아냈다.


에 학교의 교장이었던 에냐 리겔은 학교 혁신의 과정과 경험을 풍부하고 현실감 있게 전해주는 동시에 믿음과 용기를 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4)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야누쉬 코르착)

학생인권조례 논란이 뜨겁다. 그 학생인권조례의 근원인 유엔 아동청소년 권리협약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야누쉬 코르착의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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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착은 어린이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의 기본권을 말한다. 바로 죽음에 대한 권리, 오늘 하루에 대한 권리, 원래 자기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권리이다. 그는 가정에서, 또 학교의 기숙사와 여름 거주지, 고아원의 일상을 탐구하면서 어린이가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이 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한다. 서로를 돌보고 자치 회의와 법정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며 시민으로 성숙해나가는 과정은 '어린이의 공화국'이 왜 필요한지, 또 가까운 곳에서 건설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코르착의 대표작이라 할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미술 전시회장에서 인상적 그림을 지날 때 쉬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코르착의 사상, 특히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의 철학 앞에서 멈춰 서게 만들고 있다.

예스 24 인터넷 서점엔 없네요. 알라딘이나 교보문고에는 있어요


5) 프레네 교육학에 기초한 학교 만들기(디틀린데 바이예)
프레네교육학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이루어진 교육개혁학으로 존 듀이학교, 몬테소리학교, 발도르프 학교와 함께 대안학교의 큰 흐름을 이룬 프레네 학교의 기반이다. 프레네학교는 공교육 외부의 대안학교를 세우는 대신 공교육 체제 내에서 학교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학교를 명시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혁신학교의 중요한 모범이자 동시에 진보성의 선명함을 보태줄 수 있는 중요한 규준이다.



6)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상상을 현실로 만든 혁신학교 이야기(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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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만들기’라는 이 시대의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볼 때 헬레네 랑에 학교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하나의 완결된 모형을 한순간에 이루어냈다기보다는 여러 교육이론과 착상들을 한데 모으고 시도해보면서 ‘자기 자신만의 작품’이 되도록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혁신학교를 꿈꾸는 교사와 부모, 교육관계자들에게 이 책의 저자이자 헬레네 랑


그리고 비교는 되지 않지만 , 블로그 주인장의 책도 소개합니다 ㅋ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