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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곽노현, 굿바이 전교조

나는 1992년에 중학교에 발령받았다. 그때만 해도 전교조 가입하면 신세 망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전교조 신문도 몰래몰래 보았고, 조합원 이름 소개할때도 이*희 이런식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전교조에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될 무렵 대학생시절부터 그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해서 엄청 싸웠다. 서울지부 창립식때 전경들이 학교를 포위하고 지도부인 이수호, 이부영 선생님을 내어 놓지 않으면 모두 연행하겠다고 엄포를 놓을때, 이분들을 모시고 캄캄한 밤길에 관악산 산길로 탈출시키기도 했다. 도중에 만난 전경 척후조는 쇠파이프로 쫓아내버렸다. 그 와중에 바지가 다 찢어져서 완전 노숙자 꼴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발령도 받기도 전에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그런데 발령받고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도 포섭하러 오지 않았다. 화가났다. 아니 이렇게 조직 확대에 소극적이라니 하면서 내발로 수소문해서 지회까지 찾아갔다. 갔더니 나 말고도 제발로 먼저 찾아온 젊은 교사가 몇 더 있었다. 그런 조직이 전교조였다.

하지만 전교조는 이후 뭔가 이상한 길을 갔다. 그리고 제발로 찾아올 정도의 젊은 조합원들의 혈기는 수렴되지 않았다. 이상한 위계가 있었고, 몇몇 활동가들의 묘한 카르텔이 지배하는 과두정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물론 나도 그런 과두정의 구성원 중 하나였으니, 그러니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2006년 말, 전교조가 싸늘해진 여론, 조합원들의 실망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지 않았으면 나같은 비판적인 성향의 인물을 카르텔에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교조, 그리고 그속에서 타성에 젖어버린 지도부를 나 같은 몇몇 새로운 젊은 세대가 어찌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교조는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나를 기만했고, 나를 이용한 뒤 버렸다. 그래도 차마 조합원의 지위를 버리지는 못한 것은 1989년부터의 저 질긴 인연, 그리고 1999년 이전까지 비합법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해서다.

그렇게 실망하고 있던 상황에서 곽노현 교육감을 만났다. 그는 전교조 지회장보다도 덜 권위적이었다. 나의 말을 경청했고, 비판을 달게 들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나는 전교조에서도 하지 못했던 교육개혁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교원업무 정상화, 교육청 정책사업의 폐지, 요즘 개나소나 말하는 적극적복지로서의 교육, 학교폭력의 방관자 중심 접근 도입,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연극의 적극적 활용 등 꿈만 꾸던 일들이 정말로 이루어졌다. 선비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 전교조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지만, 곽교육감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었고, 전교조는 말만 듣고 실행하지 않았지만, 곽교육감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내가 그 동안 소원했던 전교조 활동가들을 다시 만나고, 교류했던것도 곽교육감을 돕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교총이 반발하고 있는 교육감이니 전교조와의 관계라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곽교육감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재선거로 아사리 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곽교육감 진영과 전교조, 민주노총 진영이 각자 후보를 내세웠다. 나는 1989년부터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곽교육감 진영을 지지했다. 수십년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과 영영 안면몰수할 각오를 하고서. 그리고 결국 곽교육감 진영은 패배했다. 사람들은 흔히 진보진영은 그게 그거일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김종인과 박근혜가 비슷할 것이라고 보는 것 만큼이나 잘못된 생각이다. 곽노현은 김상곤과 크게 다르며, 또 전교조, 민주노총의 운동권 주류와는 편의상 같이 진보진영이라 불러줄 뿐, 그 결 자체가 아예 다르다. 언젠가 남경국 박사가 말한것 처럼, 진보교육감이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은 너무 안이하다. 곽노현은 대체하기가 매우 어려운 유니크한 존재였다. 따라서 곽노현 교육감의 정책은 진보진영 아무나가 가서 잇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진보진영이 되건, 보수쪽이 되건 서울교육청에서 곽노현의 꿈은 종언을 고했다. 곽노현의 꿈이 좌절된 순간, 내가 더 이상 기존 운동권과 관계를 유지할 이유도 사라졌다. 매달 내는 회비가 아까웠던게 이미 몇년 전 일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1989년에 쇠파이프 들고 관악산으로 탈출시켰던 두분이 교육감 예비후보로 나왔다. 그리고 그분들은 모두 전교조 위원장이었음 보다는 김대중, 노무현, 박원순과 관계가 있음을 더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이건 내 인생, 내 청춘, 내 빛나는 대학시절에 대한, 제발로 지회를 찾아갔던 젊은교사시절에 대한 배신이며 모욕이다. 그 분들조차 떳떳하게 내세우기 부끄러워하는 전교조라면, 위원장은 커녕 지회장도 한번 못해본 내가 이걸 붙들고 늘어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내가 경찰들과 육박전할 각오로 지켜드렸던 두분이 그렇게 지켜낸 조직의 수장이었던 과거를 스스로 감추고자 하는데, 내가 무슨 까닭으로 그 조직에 회비를 낸단 말인가? 끊는다. 다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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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