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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쇄신을 바란다면, 먼저 민주당을 알고, 그 다음에 무엇을 바꾸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라

안희정 충남지사는 이명박이 당선되고 나서 친노를 폐족이라 칭하며 용서를 구했다. 물론 그가 실패했다고 주장한 것은 조중동의 말처럼 "국정을 망쳤기 때문" 이 아니라 "기대한만큼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진보개혁진영의 단결마저 무너져서 정권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참여정부, 혹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있다. 이명박의 경우는 통상적인 수준의 국정마저도 농단해 버렸기에 실패한 정부이지만, 참여정부는 엄밀히 말하면 실패한 정부가 아니라 "개혁에 실패한 정부"다. 그런데 진보진영 특유의 자학 성향이 이걸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 폐족이다.

그냥 "5년만에 개혁이 되리라 믿은 것은 너무 순진했다. 그리고 권력 앞에서는 진보, 개혁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쉽게 변한다는 것, 그리고 국민이 원하는 개혁의 우선순위와 운동세력이 원하는 개혁의 우선순위, 또 경제가 원하는 개혁의 우선순위 간의 조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 정도만 말했어도 그만인 것을 무슨 을사늑약이라도 맺고 오는 사람처럼 반성을 오버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폐족이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지금 그 시절보다 더 영전해서 충남감사 대감이 되어 있으니, 참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참여정부와 민주당이 비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민주당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민주당을 비판하고 민주당이 바뀌려고 해도 그 비판의 방향과 영역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오랜 세월 정말 끈질기게 살아남아온 민주당은 문재인 후보의 캠프이름처럼 담쟁이, 아니 잡초같은 정당이라 그 정체성도 모호하다.

안철수의 민주당 쇄신론이 허공에 뜬 공허한 구호로 끝난것도, 민주당의 이런 복잡한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최근 1년간 보여준 민주당의 모습을 보고 민주당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80년대때 이른바 사회과학 학습을 한 사람이라면 결코 범하지 않을 오류였다. 그러니 안철수와 또 새정치, 정치쇄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추상적인 민주당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파악된 구체적인 민주당을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가 열라 복잡하고 기니, 인내심을 갖기 바란다. 아니면 적절히 몇 편으로 잘라 보겠다. 이것도 뭐, 일종의 사회수업이다.


민주당의 뿌리

이승만 독재시절을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게 여당인 자유당의 횡포, 그리고 맨날 얻어터지는 야당 민주당이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는것과 달리 민주당은 이승만정권 내내 있었던 당이 아니라 이미 이승만 정권 말기로 들어선 1955년에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창당된 당이다. 그 창당 과정을 보면 다음 그림과 같이 무지하게 복잡하다.

이승만 정권 시절의 민주당

일단 민주당에서 제일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은 민주국민당 계열이다. 이들을 일컬어 민주당 구파라 부른다. 이들의 뿌리는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있다. 한민당은 엄밀히 말하면 친일지주, 친일자본가들이 해방직후 가장 크게 떠오르던 좌파 여운형, 민족주의 김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정당이다. 이들이 여운형, 김구의 대항마로 이승만과 연대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야당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이들 중 그나마 진보적이었던 송진우, 장덕수 등이 연달아 암살당하면서 참, 그저 그런 정당이 되었다. 김구를 누르면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한 정당도 한민당이다.

그러다 이승만이 자기 친위 정당인 자유당을 창당하자 하루아침에 배신을 당했다. 그래서 이승만에게 배신당한 또 다른 구여당인 대한국민당과 연대해서 민국당을 만들었다. 민국당은 그러니 이승만에 대항하는 야당이라기 보다는 이승만에게 버림받은 구여당이다. 물론 대한민국 건국초기에는 지금처럼야당과 여당이 홍어조 처럼 싸우던 시절이 아니었다. 한민당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좌파인 조봉암 같은 사람도 이승만 정권에서 장관으로 임명되곤 했으니, 사실 요즘보다 훨씬 나은면이 있다.

사형당하는 진보정치인 조봉암
그러다 여야의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한것은 이승만이 임기를 마치고 나서도 헌법을 뜯어고쳐가며 대통령을 계속 해먹으려 할때 부터였다.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정말 어이없는 사건인 사사오입개헌 을 계기로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민국당은 이제 이승만과 대립하는 그야말로 야당이 되었으며, 재야 세력과 연대하여 "야권 단일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진보세력이 배제되면서 보수야권만의 단일화를 이루어 만들어진 정당이 바로 민주당이다(1955년). 그리고 한민당에서 민국당을 거쳐온 세력을 민주당 구파, 나중에 재야세력까지 포괄할때 들어온 세력이 민주당 신파다. 한편 진보세력은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의 창당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625 전쟁 직후기도 하고 해서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심지어 진보당도 요즘의 진보정의당이나 통합진보당보다 훨씬 온건했다. 옛날 열린 우리당의 김근태계 정도 위치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런 진보당의 리더인 조봉암이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당하는 세상이었다.

조봉암 사형후 진보당은 지리멸렬해졌고 결국 보수야권 총단결체인 민주당이 이후 몇년간 이승만 독재와 싸워왔다. 그리고 419 혁명이 일어났고, 마침내 민주당이 정권(1960년)을 잡았으며, 구파인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윤보선은 신파인 장면을 총리로 임명하였는데, 당시 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였기 때문에 장관을 임명할 수 있는 장면 총리가 오히려 권한이 더 강했다. 그래서 알맹이 좋은 장관자리를 놓고 구파와 신파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틈을 타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민주당의 정권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박정희는 모든 자유당, 민주당 계열을 모조리 구태정치로 몰아붙이면서 국회의원, 정당인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안철수가 여야 가리지 않고 구태정치 쇄신하며, 쌈질하는 국회의원 줄이겠다고 말했을때 진보지식인들이 경악했던 이유가 다 있는것이며, 그런 말을 쉽게 한걸로 볼때 안철수는 아직 대한민국 정치사에 대한 의식이 충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서 2년이 지나 박정희가 정치활동을 허용했으나, 이미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골이 깊고, 힘도 빠져서 야권은 여러 정당이 지리멸렬하는 상황이 왔다. 하지만 이승만 시절보다는 비교적 단순한게 계속해서 민주당 구파와 신파가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형국이다.

이때 제일 먼저 민주당 재건에 나선 사람은 민주당 신파의 여장부인 박순천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구파의 민정당(전두환의 민정당 아님)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여전히 화합하지 않았으나, 1965년 굴욕적인 한일외교 조약 반대투쟁(63항쟁)을 계기로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당이 민중당이다. 그러나 63항쟁 도중, 선명야당을 내걸면서 국회의원직 총사퇴등 강경투쟁을 외쳤던 세력이 민중당의 소극적 투쟁에 반발하여 뛰쳐나가게 되는데 이들이 세운 정당이 신한당이다. 명분은 그러하지만 실제로는 민주당 신파인 박순천이 대표인 민중당에서 윤보선등 구파가 운신하기 쉽지 않아 일어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1967년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또다시 야권 단일후보를 만들기 위해 다시 뭉치게 되는데 이때 만들어진 당이 신민당이다.
유신 이전 박정희 시대의 야당

유신 직전의 신민당
이후 김영삼, 김대중이 활약하고, 유신과 참 힘겹게 싸웠던 그 야당이 바로 신민당이다. 그리고 신민당 이전까지만 해도 야당은 다만 권력에서 배제된 정당일뿐,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집합인 야당을 투쟁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유신 독재, 즉 박정희에 대한 반작용이다.

유신시대는 신민당이 끝까지 간다. 오늘날의 민주당의 전신인 야권이 이렇게 오랫동안 당이 깨지지도 않고, 이름도 바꾸지 않고 오래 유지된 것은 유신시대 뿐이다. 그만큼 박정희 독재가 가혹했기 때문에 꽁꽁 뭉쳐서 단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만 하나로 유지가 되었을 뿐, 그 내부에는 여러 계파가 나뉘어져 있었다.

그 놈의 신파, 구파는 뿌리깊게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신파의 리더는 이철승, 구파의 리더는 유진산이었다. 그리고 신파계열의 떠오르는 지도자 김대중, 구파계열의 신성 김영삼도 나름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선거가 문제였는데, 과거 여러 정당으로 나누어졌다가 야권단일후보를 만들때는 담판으로 결정 지었지만, 이제 야권이 당으로는 하나인데, 그 안에 계파가 나누어져 있다 보니 처음으로 내부경선이란 것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김영삼이 유리했다. 유진산이 일찌감치 민주당 구파의 좌장 자리를 젊은 김영삼에게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이철승도 출마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표를 나눠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영삼이 1차 투표에서 1위는 했으나, 과반을 득표하지 못했다는 것. 결국 결선투표에서 이철승이 김대중에게 신파를 넘겨버리면서 판세가 뒤집히고 말았다. 그리고 김대중이 197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되었다. 매우 근소한 차로 지고 말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체크 포인트.

1) 다 잡은 대권후보를 놓친 김영삼의 충격! 그런데 김영삼은 오래 칩거하지 않았다. 즉시 승복하고, 김대중의 선거운동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김대중이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게 된 것도, 김영삼이 열심히 영남권에서 뛰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뭐라 해도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 할만한 그릇이었다. 야권의 어느 후보도 새겨 들어야 한다.
2) 민주당 신파, 구파 계파에 호남, 영남 지역구도가 결합해 버렸다는 것(최악!). 이 악몽은 이제 수십년간,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유신 시대... 무시무시한 시대였다. 그리고 신민당은 그 전신인 한민당, 민주당 등이 보여주지 못했던 투쟁성을 강요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나라는 한 마디로 공포의 나라였다. 야당은 무론, 여당까지도 공포에 떨었다. 몇가지 적어볼까? 요즘 세대들은 상상도 못할 일들. 이걸 보면 박정희 향수를 느끼는 노인들을 경멸할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1) 대통령 선거가 없다. 1500여명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서 한다. 보통 현 대통령이 90% 이상의 득표로 당선된다. 대위원들이 모여서 90% 이상 찬성해서 지도자 뽑는 나라, 현재 우리나라 아주 가까이에 하나 있기는 하다. 딱 그 나라 꼴이다.
2)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3)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수도 있다. 
4)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을 국회가 해임결의하자, 여당(야당도 아니고) 대표 4명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수염도 뽑히고 불구자가 되어서 나온 뒤 정계를 은퇴한다. 
5) 그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낸 자가 그만둔 뒤 외국에서 반 박정희 활동을 하자, 정보부요원들을 풀어서 폐차장에서 압착시켜 죽였던가, 양계장에서 그라인더로 갈아서 죽였던가 한다. 
6)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을 요원들이 납치해서 배에 태운뒤 바다에서 집어던져 죽이려다 미국, 일본정부에게 들켜서 개망신 당하고, 김대중 구사일생한다. 
7) 야당 당수인 김영삼을 어거지로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한뒤 쫓아내버린다.
그 밖에도 유신시대의 어이없는 이야기 시리즈로 늘어놓으라면 책이 몇권 나온다. 딱 김정일 부칸에서나 들을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래서 bbc같은 외국 방송이 그 박정희 딸이 대통령 선거에 나온것을 신기하게 보도한다.

암흑기를 버티면서 비로소 신민당은 야당=저항, 희망 이란 공식에 얼추 맞춰들어갔다. 물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유신이 워낙 드세니...

그리고 10.26으로 박정희가 죽었으나 12.12., 5.17로 전두환이 또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5공화국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신민당은 또 "구태 정치" 로 몰려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민한당이란 어용 야당이 형식적으로 있는 가운데 전두환의 민정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가고, 김영삼은 집밖으로 못나오고 통신도 두절되는 사실상 감금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1985년 정치활동 금지가 해제되고(김영삼, 김대중은 여전히 금지) 옛 신민당 정치인들이 다시 뭉쳐서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신한민주당은 1987년 6월항쟁을 맞이하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는데, 이때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강경투쟁에 손을 모았다. 마침내 김영삼, 김대중 계열만 따로 튀어나와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신민당 내 온건파(결국 전두환 앞에 쫄은)는 소수파만 남아 있다가 민정당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리고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단일화를 염원하던 국민들을 배반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반목하다가 김대중이 뛰쳐나가서 평화민주당을 세우면서 다시 야당이 둘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각자 대통령으로 출마했으나, 결국 노태우에게 지고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당시 노태우의 별명이 36% 대통령인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가 얼마나 애석한 일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두개의 민주당(통민당과 평민당)은 각자 자기 지역에서 선전했다. 그리하여 1988년 선거에서 민정당이 원내 소수당이 되는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역사상 최대의 여소야대 국회를 국민들이 만들어 주었는데, 그만 김영삼이 놀라운 결정을 한다. 1990년에 바로 3당합당. 이로써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의 대부분의 의원들을 몰고 민정당과 합치면서 민주자유당(민자당)이 만들어졌다. 둘로 갈라졌던 민주당 중 하나만 남았고, 이로써 부산, 경남이 저항의 거점에서 보수의 거점으로 넘어가게되었다.


하지만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홍사덕 박찬종 등 일부 의원들이 3당 통합에 반대하면서 합류를 거부했고, 여기에 무소속의 이철 의원 등이 합류하면서 이른바 꼬마민주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들이 이들이 1991년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치면서 다시 당명을 민주당으로 정해서 정통성을 과시했다. 이때의 민주당을 통합민주당이라 부르는데, 이 통합민주당은 감히 대한민국 야당 역사상 최고의 정당이라 불릴만큼 역량있고 활기넘치는 정당이었다. 여기에는 꼬마민주당에서 건너온 젊은 피들이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때 김대중이 이들과 함께 대통령이 되었으면 아마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역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1992년 김영삼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다들 잘 아는 imf다.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선언을 한다. 하지만 김대중이 은퇴한 뒤에도 통합민주당은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3당 합당으로 2/3의 의석을 차지했던 민자당을 과반 컷트라인 수준으로 위축시켜 놓았고, 정책 능력도 훨씬 뛰어났다. 잠룡들이 등장했고, 상대적으로 민자당에는 이렇다할 차기 주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김대중이 다시 정계 복귀를 시도하면서 미래를 꿈꾸던 신진세력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갈등은 결국 다시 분당으로 이어져서 김대중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민주당을 버리고 재야운동권과 연대하여 새천년 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소수파로 남은 민주당은 1996년 총선에서 사실상 소멸되고, 생존다즐은 결국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 흡수되었다.

이 구도를 보면 계속해서 어디선가 신진 세력을 데려와서 키운 다음에는 원래 있던 세력과 반목이 일어나서 그들을 쫓아내고, 쫓겨난 신진은 결국 여당에 흡수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어쨌든 이 새정치 국민회의를 가지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 민주당)는 이번에는 386 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수혈(당시 용어로 젊은 피)해서 세를 불린 뒤 당명을 다시 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민주당의 진보색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 진보색을 바탕으로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민주당 내의 보혁갈등이 벌어졌다. 경우에 따라서 이 갈등은 과거 여야 갈등을 방불케 헀다. 물론 이때도 "구태정치 척결"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갈등은 끝내 또 다른 분당 사태로 이어졌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갈라진 것이다. 그리고 잔존 민주당은 노무현 탄핵을 위해 광주학살세력인 한나라당과 손을 잡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벌리게 되었다. 그들의 배신은 응징받아서 열린우리당은 민주당 계열에서 가장 큰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386운동권과 정동영, 천정배, 유시민 등 젊은 피들과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동교동계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았다.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성향상 보수야당의 진보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옛 민주당 성향 의원들의 반발로 개혁입법을 거의 해내지 못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 대선을 맞이해서 민주당의 탈당파, 그리고 한나라당의 탈당파(손학규 계)를 끌어모아서 외연을 확대한 것이 대통합 민주신당이다.

그러나 이 당은 대통령선거와 이듬해 총선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원내 87석의 소수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전에 갈라졌던 호남 민주당과 다시 통합하여 민주통합당이 된것이다.

여기까지가 지금 민주당이 있기까지의 긴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계속해서 여러 당파와 파벌의 이합집산의 역사다. 지금도 이 내부에는 여전히 파벌들이 존속하고 있고, 확인했지만, 이 파벌들의 뿌리는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쉽사리 근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파벌이 이합집산하는 정당이다 보니, 정당 전체의 가치나 목표보다는 파벌의 보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조폭적 전근대성을 가지고 있다. 파벌의 보스는 국회의원 공천권과 정치자금 분배권을 움켜쥐고서 소속 의원과 정치인들을 거의 제왕처럼 지배했다. 이것이 바로 민주당의 가장 심각한 구태였다. 이렇게 보스가 소속 정치인을 지배하려다 보니, 비자금이 필요하게 된 것이고, 이게 끊임없는 정경유착의 고리가 되어왔다. 이런 계파정치, 보스정치의 문제점을 가장 강력하게 지적한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김영삼, 김대중과 달리 대통령이 된 이후 당에 대한 통제권을 일체 행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이 대통령의 뜻을 전혀 따르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 연출되었다.

반면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겸 당 총재를 겸하면서 공천권을 행사했다. 그러니 구태정치의 문제점과 해법에 대한 고민은 안철수가 처음이 아니다. 그리고 노련한 대통령도 극복하지 못한것을 정치 신인이 이 복잡한 역사를 가진 정당에게 열흘 남짓한 시간안에 고쳐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당돌한 요구였다.

이쯤 쓰고 나니 머리가 아프다. 출근해야 하는데, 잠은 언제 자나?
워낙 역사가 복잡한 정당이다 보니 중간에 틀린 곳도 많을 것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자.
대략 이렇게 알면 된다.

계보가 열라 복잡하다. 그래서 수많은 계파와 보스들이 이합집산한 과정이 바로 민주당의 역사다. 그래도 유신시절, 5공화국 시절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역사가 있고, 1997년 이후에는 나름 진보적인 색채가 입혀졌다. 거꾸로 말하면 1997년 이전에는 진보와는 거리가 만 정당이었다. 그래서 이 정당 내부에서도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이 있다.

다음에는 이런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민주당이 쇄신되어야 한다면 무엇을  왜 쇄신해야 하는지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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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 민주당은 무엇이 쇄신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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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