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혁명가들의 꿈은 언제나 이루어졌을까?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기가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뮤지컬 영화는 장사 안된다는 통념을 깨고 벌써 관객 500만명을 돌파하였다. 이 뜻밖의 흥행 돌풍에대해서 처음에는 스타, 시너지 등 마케팅 측면에서 이유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대선에서 패배한 48%를 중심으로 한 셀프 힐링 측면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고, 심지어 영화를 정치적 스탠스에 무리하게 대입시켜 약팔지 말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레미제라블 원작,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했던 다른 영화들을 참고해 보면, 이 영화를 그렇게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원작 소설에서도, 그리고 이후 제작된 영화들에서도, 프랑스에서 제작한 연속극에서도 1832년의 혁명은 하나의 배경으로 주어질 뿐이다. 장발장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한 이가 아니라 다만 방관자다. 그는 코제트의 연인을 구출하기 위해 순전 개인적 동기에 의해 바리케이트 안에 들어설 뿐이다. 사벨이 자살하고 오랜 추적에서 벗어남으로써 작품의 긴장은 해소되며, 그것이 엔딩이다. 그러나 1985년의 뮤지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혁명과 바리케이트에는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스포트 라이트가 보태어지며, 원작은 물론 그 어떤 장면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미래의 혁명이라는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놓았다.  혁명은 더 이상 객관적인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제목인 "불쌍한 사람들"의 염원과 꿈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낼 바리케이트 너머의 세상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2012년 영화에서는 청년 혁명가들의 위상도 대폭 확대되었다. 1998년 영화에서는 마리우스를 제외하면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고 단역으로 처리되기까지 했던 앙졸라가 심지어 마리우스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전체 넘버들 중 1막과 2막을 마무리하는 곡들 역시 혁명 노래들인 "One day more"와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이다. 그러니 이 작품의 주제를 혁명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눈에나 혁명은 보이지 않고, 듣기 좋은 말로 용서와 휴머니즘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은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한 사람들을 기만한다. 이 영화 엔딩에서 보여주는 거대한 바리케이트는 실패한 1832년 혁명이 아니라 마침내 루이 필립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1848년 2월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2월 혁명 이후 이들이 꿈꾸던 그런 세상은 왔을까? 불행히도 역사는 이들의 꿈을 기만했다.

여기서 잠깐 프랑스 혁명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1. 프랑스 대혁명(1789년)
교과서 시민혁명 단원에 나오는 그 유명한 혁명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내걸고 의회를 탄압한 국왕 루이 16세의 권력을 내려 놓은 혁명이다.

2. 프랑스 대혁명에서 나폴레옹까지
프랑스 혁명 세력들은 공화정을 주장하는 급진파(자코뱅)와 입헌군주정을 주장하는 온건파(지롱드)로 나누어졌다. 이후 유명한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어, 조금이라도 왕당파 혹은 귀족옹호자의 기미가 보이면 목이 잘리는 혼란기가 왔지만,  자코뱅의 지도자인 로베스삐에르 자신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면서 테러정지는 막을 내린다. 한편 국왕의 처형을 본 이웃나라 왕들이 놀라 연합군을 형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뭉개기 위해 쳐들어오지만, 시민들은 의용군을 결성하여 이들을 물리치고, 이 전쟁에서 영웅이 된 나폴레옹이 권력을 차지한다.(군사 쿠데타!)

3. 나폴레옹 시대(1799-1815) : 너무 유명한 시대니 설명 생략

4.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1815-1830)
나폴레옹을 패망시킨 유럽의 왕국 연합들은 빈 동맹을 맺고, 혁명 따위가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부르봉 왕가의 복원이 가장 중요했다. 이들은 망명중이던 루이16세의 동생을 불러다 루이 18세로서 프랑스 왕으로 복위 시켰다. 이를 부르봉 왕정복고라 부른다. 루이 18세가 죽은 뒤에는 그 동생인 샤를 10세(만화 베르사이유 장미에서 무서운 사람으로 등장하는 아르투아 공작)가 왕위에 올라서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고 절대왕정을 되돌리려 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혁명이 7월 혁명이다. 7월 혁명은 들라크라아가 그린 이 그림으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결과 샤를 10세는 추방 당하고,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필립이 "시민들이 추대한 왕"이라 불리며 왕위에 오른다. 절대왕정은 폐지되고 입헌군주정이 실시된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바로 시민왕 루이필립이 있던 오를레앙 왕정 시절이다.

5. 오를레앙 왕정(1830-1848)

그러나 오를레앙 왕정 시절에도 인민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입헌군주정을 실시하고 의회가 소집되어 국가권력을 행사하였으나, 이는  대자본가와 금융귀족들의 이해관계만 대변할 뿐이었으며,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구왕당파들마저 의회에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다. 

의원이 되기 위한 자격, 의원을 선출할 자격 역시 엄격히 제한되어 일정 수준 이상의 세금을 납부한 자에게만 부여되었다. 대다수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전혀 참정권을 갖지 못했다. 의회의 다수를 장악한 금융귀족 등 대자본가들의 약탈적 정책들로 인해 많은 농민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하였으며, 프랑스 전역에 불만이 들끓어 올랐다. 이것이 바로 영화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혁명의 원인이다. 그리고  1832년 혁명을 계기로 단지 시민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력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저 시민이라고만 칭하면서 이 부분을 명확히 다루지 않았다,

6. 2월 혁명(1848)
앙졸라와 그의 동료들이 목숨을 잃은 1832년 혁명 이후 16년이 지나서야 모든 인민의 완전한 참정권이라는 꿈이 이루어진다. 이전의 혁명들이 부르주아 시민들이 중심이 된 혁명이었다면, 이 혁명은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된 "레미제라블(불쌍한 자들)"의 혁명이다. 파리 곳곳에 1500개가 넘는 바라케이트가 세워졌으며, 루이 필립 국왕은 물러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이 영화 엔딩에서 예고하고 있는 거대한 바리케이트가 필경 이 2월 혁명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7. 2월혁명 이후
군주정의 완전한 폐지와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임시정부는 과감한 실업자 구제책인 국민작업장 설치, 노동3권의 인정, 그리고 노동자들의 참정권 인정 같은 급진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부르봉 왕당파, 오를레앙 왕당파가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기회주의자들인 나치오날 파가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며,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의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880석 중 100석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노동자의 대표자인 블랑키, 알베르도 낙선했다). 보수파가 압도적으로 장악한 의회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들을 하나 둘 후퇴시켰으며,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공화국 정부는 이 노동자들의 봉기에 대해 5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파견하여 무차별 학살하였다. 3000명의 노동자가 봉기 현장에 있었거나, 혹은 노동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사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결국 7월 혁명의 재방송이 되고 말았으니, 앙졸라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8. 루이 보나파르트
더욱 어이 없는 것은 그 이후다. 이렇게 피로 노동자들을 진압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왕당파도, 금융귀족도, 자유주의자도, 노동자 대표도 아닌 루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오직 하나, "나폴레옹의 조카!' 뿐이었다. 나폴레옹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중간계급, 그리고 농촌 주민들의 압도적인 몰표를 받은 것이다. 최근에 치루어진 어느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연상되지 않는가?

루이 보나파르트는 노동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자도 아니었으며,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임기 4년이 끝나갈 무렵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었고, 이듬해 황제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60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결과는 "도로 황제!"인 것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9. 나폴레옹 3세 시대(1852-1870)
나폴레옹 3세는 황제로서 그다지 큰 업적이 없다. 무능하였으나 각종 미디어 등을 활용한 인기 영합적 정책을 펼쳤다. 무리한 대외 확장 정책을 통해 러시아, 독일(프로이센) 등과 충돌하였고, 끝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는다. 포로가 된 뒤 그는 프로이센에게 항복하였고, 공화정을 선포한 임시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는 프로이센의 영향력하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0. 파리코뮌(1871)
격분한 파리의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황제의 항복, 그리고 프로이센의 앞잡이인 임시정부를 모두 거부하고, 자신들의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것이 파리 코뮌(1871)이다.
어이없게도 나폴레옹 3세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파리 코뮌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승전국인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위해 파리 시민들을 무력 진압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행하였다 (그들 말로는 파리 탈환). 1871년 5월 21일,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파리 시내에 진입한 정부군은 무장, 비무장을 가리지 않고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하였다.  이날 적게는 1만명, 많게는 5만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10만명이 체포되었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1789)으로 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동자 등 "레미제라블"은 철저히 소외되었으며 무지막지한 피를 흘려야 했다. 1832년 바리케이트에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1848년 6월에는 수천명이, 1871년 5월에는 수만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1871년이면 마리우스가 노인이 되었을 시기다. 앙졸라 등의 죽음 이후에도 반백년이 지나도록 프랑스에서는 저 영화의 엔딩 같은 벅찬 광경은 일어나지 않았고, 처절한 비극만 반복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너무도 힘들고 슬픈 기나긴 여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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