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은 먼저 익숙한 것들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1) 민족주의

이번 대선 평가도 대충 마무리 되어가는 모양이다.  중요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이털남에서 다 다루어졌으니 여기에 대해 추가로 왈가왈부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저런 팟캐스트에 나와서 이야기 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빼먹은 것들이 있다. 일부 출연자는 넌지시 암시하기도 했지만 역시 주변을 의식하여 과감하게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이털남이 아무리 돌직구를 던지라 요구해도, 돌직구 던졌다 망할 가능성은 보수보다 진보진영에서 더 크다. 돌직구 던지는게 더 꺼려지는 진영이라면 사실 진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하여간 그렇다.

진보진영이 이렇게 서로 말조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까닭은 이른바 진보 운동권 출신들은 몇가지 신화에 사로잡혀있고, 심지어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를 믿고 중독된 사람들은 이성적인 대화의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화와 중독대상을 거론하면 화를 낸다. 그러나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유능한 보수 vs 무능한 진보" 의 이 치명적인 이분법은 계속될 것이고 앞으로도 승리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독을 치료하는 첫단계는 중독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듣기싫고 기분나빠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일을 할 사람은 어차피 진영 내부에서 별로 인기도 없고, 조직적 관점도 없다고 비판받는(맙소사, 저 사람들은 인간관계 잘 유지하고 잘 어울리는게 조직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이다.  그럼 이제 진보가 벗어나야 할 중독을 차례로 소개해 나가겠다.

1. 민족주의, 그리고 국가주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물론 민족이나 국가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가 되어버리면 문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민족이나 국가가 판단의 준거가 되면서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사실 이건 한중일 모두의 문제다. 3개국의 역사책을 보면 모두 저마다 나름의 중화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를 자기민족을 선, 다른 민족을 악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일종의 춘추필법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문제는 어떠한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할 진보진영조차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일반인보다 더 중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중독되면 한국인 혹은 대한민국의 문제점이나 과오를 보지 못하거나, 보더라도 부정하거나, 심지어는 미화한다. 이를테면 서울의 지하철은 매우 불편하다. 일본이나 쿠알라룸푸르 보다는 편리하지만, 타이페이, 홍콩, 싱가포르, 심지어 방콕보다도 불편하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은 "비록 지옥철이지만 그래도 난 서울 지하철이 더 좋다."이렇게 말한다.

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10개에 싱가포르와 토쿄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왜 서울이 없냐? 서울이 제일 안전하다"라고 외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한 "계속 지옥철"일수밖에 없으며, 세계적으로 사기, 횡령, 우발적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로 머물러 있을수 밖에 없다. 즉  발전도 진보도 없다.

사실 이렇게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중독되는 증상은 민주시민의 훈련이 덜 된 나라에서, 삶이 고단할때 발생한다. 양차대전 사이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최근에는 미국에서조차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보진영의 나름 선진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반 시민들보다 더 중독증이 심하니, 그 모양이 몹시 찌질하다. 그렇게 스스로 눈가리고 귀가리다 보니 "박근혜는 친일파 딸" 이거 한방으로 이길수 있다고 정신승리하면서 '다까끼 마사오"하고 외쳐대고, 그 말한 이정희를 영웅취급했던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40,50대 진보단체 회원들까지 이렇게 부화뇌동 하는걸 보면 기가 막히다.

하지만 이미 시민들은, 적어도 40대 이상의 시민들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이미 상당수 시민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며, 냉철하게 자기 삶을 돌아본다. 중국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이미 삶 속에서 터득한 사람들이다. 민족주의적 소아병에 중독된 이른바 진보인사들보다 한참 더 나아가 있는 것이다.

사실 민족이나 국가에 중독되는 현상은 우리나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역시 그런 경향이 있다. 상당수 미국인들은 "여기가 미국이라 가능한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그 자긍심은 때론 중독의 경향까지 보인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미국은 진보진영이 그런 국가, 민족 중독증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제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더러운 전쟁을 할때, 이를 종식시킨 것은 바로 미국내의 치열한 반전운동이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미국에서 태어나"라는 노래를 통해 "여기가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찌질한 노동자의 삶"을 규탄했다.

아래 동영상을 3분 10초 부분부터 보기 바란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미드 "뉴스룸의 한 장면이다."



유명한 뉴스앵커인 윌리엄 맥커보이에게 한 대학생이 "미국이 가장 위대한 나라인 이유가 뭐냐?"라고 묻자 맥커보이는 "미국이 뭐가 위대하냐?"라며 독설을 퍼붇는다. 그 덕분에 인기가 떨어지고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이 앵커는 보수파다. 즉, 민족, 나라에 중독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눈, 내 민족, 내 나라의 치부까지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눈, 이게 배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하물며, 진보라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다.

이런 냉정한 시각을 갖추면 종군위안소가 설치되었던 자리에 한국인 종군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려는 계획을 싱가포르가 불허한 조치를 놓고 싱가포르에게 욕질하지 않고,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싱가포르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이른바 숙칭 대학살의 피해자로 누구보다도 일본이라면 이를 가는 나라다. 숙칭 대학살은 일본군이 단 일주일동안 싱가포르에서 3만명에서 많게는 9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대만행이다. 심지어 싱가포르의 국부인 리콴유 전 총리도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했을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이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에 한국인 전범도 상당수 섞여 있었고, 리콴유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인보다도 오히려 한국인이 더 잔학하게 굴었다고 한다. 그러니 싱가포르 눈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원수인 것이며, 수만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은 장소에 한국인 추모상을 만든다고 할때 이게 석연치 않은 것이다. 당시 싱가포르 대학살, 그리고 마닐라 대학살(10만명 추정)에 가담했다가 전범으로 체포되어 일본군과 함께 처형당한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시켜서 했다.", "안그러면 일본이 우리를 갈구기 때문에 가혹하게 할수밖에 없었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런 항변은 유태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의 항변과 내용이 같다.

그리고 1932년, 만주에서 중국마적들이 조선인을 죽인다는 오보(조선일보의 오보!)에 흥분한 조선인들이 화교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수백명을 죽이고, 곳곳에서 중국인 가게나 차이나 타운을 파괴한(특히 평양은 차이나 타운이 먼지가 되어 버림) 사실도 있다. 이 냉정하고 잔혹한 역사에 대해서 민족주의에 중독되면 "만주 침략을 앞둔 일본의 한, 중 모략 책동" 드립을 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 그런 모략을 했을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제까지 멀쩡히 이웃으로 살고 있던 중국인들을 마구잡이로 때려죽인 일을 어떻게 합리화 할 수 있는가?이건 관동대지진때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강간한다는 헛소문에 흥분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마구 학살한 관동대학살 사건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런 과거로 보건대, 당시 한국군들이 주로 싱가포르나 필리핀의 화교들을 살상하는 일에 별 가책이 없었거나 적극 가담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수 있는가?

일본의 관동대학살에 분노하면 우리는 일본에 대한 증오밖에 배우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인 등에게 가한 그리고 그 뒤에 베트남인들에게 가한 잔혹한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면, 우리는 그런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막는 장치를 만들수 있고, 또 일본에게 제대로 된 반성과 대비책을 요구할 수 있게된다.

일본에게 독일을 본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일본을 욕하는 쾌감 외에 우리에게 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독일을 본받아 화교들에게 사과하고 소수민족과 공존할수 있는 노력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일본의 만행을 "일본인"의 특성에 돌리면서 "우리는 안그래. 착한 한국인이까"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실제로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를 더 훌륭한 민족으로 만들어 나갈수 있다. 이게 진보다.

하지만 이런 시야 확대와 노력은 민족, 국가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진보적인 지식인은 이런 중독에서 깨어나 차갑고 맑은 시야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거기 편승하거나, 더 깊이 중독되어 있다면 이를 어떻게 진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지금 진보진영이라 불리는 사람들, 또 그쪽 후보 지지자들 사이에서 '외노자'라는 용어가 경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걱정스럽다. 적어도 우리는 1932년보다는 더 성숙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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