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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시장화 단숨에 이해하기(교육시장화의 네 바퀴)

대안교육전문지 민들레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이제 과월호가 꽤 지났기 때문에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교육 시장화의 네 바퀴
 
엄밀히 말하면 교육 상품화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한 축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해 2000년대 초반에는 거의 전 세계를 휩쓸었다. 비록 지금은 퇴조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이것이 남긴 교육계의 상흔은 아직 깊다. 상처를 차유하려면 먼저 상처를 낸 흉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상처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싸운 여러 나라 교원노조의 경험을 집대성한새로운 글로벌 질서에서 강철새장과 그 해체(Martrell, G. , 2005)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의 대부분은 이 책을 참고로 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교육의 사사화(privatization), 교육의 상품화, 경제·경영 기법의 도입, 표준화라는 네 축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진다. 이 네 축을 조금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교육의 사사화: 이른바 자율화에 관해서다.
이는 공립학교를 사립학교로 만든다는 수준의 의미가 아니라, 관료제의 폐단을 빌미 삼아 공공 부문을 비효율과 권위주의로 등치시키고, ‘민간 부문을 효율과 창의성으로 등치시키는 이데올로기다. 한 마디로 국가가 개입하면 구리고, 민간에게 맡길수록 참신하다가 된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공립학교는 구리고, 사교육 기관은 참신하다가 된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국민의 정부 이후부터 사교육이 창궐하기 시작하고,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같은 경우는 아예 학원을 학교가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상정하고, 사교육문제가 심각하다는 나라에서 유명학원 강사 출신 인사들이 진보진영에서조차 환영받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학생들의 취향과 수준이 다양한 만큼 획일적인 학교가 아니라 다양한 학교가 나와야 하며, 이렇게 학교가 다양해지려면 평준화 같은 국가주도의 학교체제는 해체되고 민간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이 길을 먼저 간 미국이나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 민간의 자율을 확대할 경우 늘어나는 학교는 이른바 귀족학교거나 엘리트 학교들이며, 버림받는 학교는 일반 국민들이 다니는 보통 공립학교들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도 이 이데올로기는 학교의 자율화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창궐하고 있다.
 
두 번째로 교육의 상품화: 학교 다양화와 선택권 강화라는 미사여구로 둔갑해 있다.
이는 교육을 일종의 서비스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상품은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되는 재화나 서비스다. 따라서 상품에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있다. 판매자는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기 위해 경쟁하며, 구매자는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기 위해 경쟁한다. 이 논리가 교육에 적용되면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상품 판매자, 경제학적 용어로는 공급자가 된다. 그리고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노동자이자 판매자가 된다. 역설적으로, “교사가 어떻게 노동자냐?”1990년대 전교조를 탄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교사를 노동자로 취급하게 된 셈이다.
교사가 노동자고 학교가 공급자라면 구매자, 즉 수요자가 있어야 한다. 수요자는 돈을 낼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학부모를 교육의 공동책임자가 아니라 서비스를 구입하는 구매자, 수요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수요자의 역할은 같은 품질을 가진 상품이라면 가장 저렴한 것을, 같은 가격의 상품이라면 가장 높은 품질의 것을 선택하여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때 문제는 품질의 기준이 사회적 가치 같은 것이 아니라 수요자의 기호, 수요자의 욕구라는 것이다. 학부모가 원하는 것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저렴한 교육상품이 학부모의 선택을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교육에서 교사의 전문성, 교육당국의 공공성을 말할 여지가 사라진다. 수요자인 학부모의 뜻을 거스르면서 사회적 가치에 의한 교육, 교사의 교육전문성에 입각한 교육을 말하면 공급자 중심주의라는 거센 질타를 받는다. ‘고객은 왕이다. 아무리 선행학습이 학생들의 정상적인 발달 속도를 교란시키고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궁극적으로는 학습 능력을 손상시킨다 할지라도, 그것을 원하는 학부모들이 많다면 학교는 그것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제 학교는, 교사는 공공기관, 전문가가 아니라 서로 학부모의 눈에 들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상품 공급자다. 선택 받으려면 튀어야 한다. 이 튀기 위한 몸부림을 정부는 점잖게 학교 다양화라는 말로 엉뚱하게 부르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학부모의 선택권 강화라고 듣기 좋게 부르고 있다.
학교는 특목고, 자율고, 자사고, 각종 특색학교, 자율형 공립고, 창의 인성학교 등등으로 다양화 되면서 그냥 일반적인 학교가 아니라 뭔가 다르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해야 한다. 심지어 혁신학교조차도 이런 다양화의 한 변종으로 간주되며, 일부 진보교육감은 혁신학교를 광고까지 한다. 그리고 학부모는 쇼핑센터에 늘어선 상품처럼 여러 학교들 중 하나를 고르고(고교 선택제), 방과후 학교 등에서는 여러 교사들 중 하나를 고르는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이 다양화와 선택권은 거짓된 다양성, 거짓된 자유다. 이는 마치 시장에서 다양한 상품들 중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행하는 것들 안에서의 자유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교육주체의 목적과 철학이 없는 교육 다양화와 선택권은 입시교육의 여러 다양한 버전, 자본과 권력의 목적에 복무하는 범위 내에서의 선택으로 제한된다. 이는 사실상 강요된 선택이 되고 만다. 진정한 교육 다양화와 선택권은 이러한 벽 너머까지 고려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주의자들은 진입장벽을 치고 이러한 다양한 교육의 진출을 가로막는다.
 
세 번째로 경제경영 기법의 도입: 이른바 효율화와 경쟁이다.
교육이 서비스 상품이라면, 이제 학교를 운영하고, 교사를 다루는 방식도 당연히 거기에 준하여 달라져야 한다. 학교는 기업이며 학교장은 교육자가 아니라 CEO이며, 학교는 교육의 원리가 아니라 경제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경제 원리의 첫 번째 항목은 효율화다. 이는 투입비용 대비 산출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산출이 아니라 비용 대비 산출이다. 그리고 이 비용에는 돈, 노력 뿐 아니라 시간도 포함된다. 투입된 비용에 대한 산출을 극대화 하는 방법은 산출을 늘리는 방법도 있지만 비용을 극소화하는 방법도 있다. 기업들은 불확실한 미래의 산출보다는 당장 눈 앞의 비용 줄이기를 선호한다. 이것을 기업가들은 경영 합리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교육의 경우 비용을 줄이려고 해도, 시스템 자체에 막대한 고정성 경상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 그나마 줄일 수 있는 것은 유동자본이라 불리는 각종 교육 기자재, 관리비, 그리고 교사와 직원들의 인건비다. 간단히 말하면 돈을 덜 주고 일을 더 시키는 방법을 찾는 쪽으로, 이른바 합리화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두 번째 원리인 경쟁이 도입된다. 돈 덜 주고 일 더 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승자에게 혜택을 더 많이 주는 경쟁보다는 패자의 몫을 삭감하여 승자에게 혜택으로 제공하는 경쟁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교육청에, 학교에, 그리고 교사에 대한 각종 평가체제가 도입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는 시도 교육청을 평가해서 그 결과에 따라 각종 교부금을 차등 지원하고, 교사들을 평가해서 성과급을 차등지급한다. 물론 아직 미국의 경우처럼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학교가 문을 닫거나 교장·교사가 해고될 수도 있는 수준까지는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학교에는 전교조나 교총이라는 강력한 이익단체가 있고, 공공영역이이라는 국민 정서가 여전히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어 속도는 느린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시장원리, 즉 경제 원리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일단 문이 열리면 시장원리는 물밀 듯이 학교에 들어서게 되어 있다.
학교를 시장에 완전히 내맡기지는 않더라도 학교나 교사를 시장원리, 기업원리에 따라 운영하고 관리하려는 시도는 국민의 저항감이 덜하다. 세계 어느 나라나 이를 위해 소위 철밥통프레임을 짜고, 불완전 고용에 시달리는 국민의 반감을 이용해 교사에 대한 마타도어를 동원했다. 이해찬으로부터 시작되어 문용린을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교사에 대한 이러한 마타도어는 거의 위험수준이었다. 물론 마타도어를 받아 마땅한 교사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런 무차별한 마타도어는 여러 가지 다양하고 진보적인 실천을 하던 교사들까지 한꺼번에 무력화 시켜버림으로써 학교 내부의 개혁동력을 억압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선생님, 저도 여러 가지 면에서 교사에 대한 마타도어가 있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떤 마타도어는 잘 안 먹히지만 어떤 마타도어는 아주 잘 먹힙니다. 불완전 고용에 시달리는 국민의 반감도 있긴 했지만, 교사들에 대한 마타도어는 국민들에게 잘 먹혔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교사들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먹혔을까?’ 교사들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외람되지만 선생님 글에서도 그 점이 언급되었으면 합니다.)
 
네 번째는 표준화·계량화다. 이는 경제 원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표준화 또는 계량화는 교육을 측정가능한 표준적인 행동과 산출물의 형태로 조작(operate)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교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바로 이해가 된다. 수요자인 학부모는 돈을 주고 어떤 학교의 교육을 구입할지 선택하게 될 텐데, 학교들 마다 교육내용을 표준적인 척도에 의해 수치화해놓으면 숫자만 보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를 평수로 비교하고, 자동차는 출력이나 연비로 비교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교육이 대단히 추상적이고 가치 함축적이고 복잡한 활동의 총체라서 표준화된 척도를 만들어내기도 또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계에 미국과 같은 처참한 경쟁체제가 정착되지 않은 것은 아직 이런 표준화 척도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교육을 특별히 더 가치 있는 영역으로 존중해서가 결코 아니다.
표준화 척도를 개발하려는 시도는 1998년 이래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그 결정판이 바로 전자화되어 운영되는 교무업무시스템’, 이른바 NEIS. NEIS에 입력되는 내용은 실로 방대하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전반을 관할하고 있다. NEIS의 입력 항목이 이렇게 방대해진 까닭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활동들을 매우 작은 단위 활동들로 세세히 쪼개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작은 행동으로 쪼개어 놓을수록 비교하기 용이해진다. 예컨대 청소를 누가 더 잘하느냐 보다는 누가 단위 시간 내에 더 많은 면적에 걸레질을 하느냐, 청소기를 더 빨리 돌리느냐 따위를 비교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다.
NEIS는 바로 교육이라는 총체적인 활동을 표준화된 수많은 단위 활동들로 쪼개어서, 여기에 이미 표준화된 입력 방식으로만 기입하도록 짜 놓은 전자처리 프로그램이다. 교사가 어떤 교육활동을 했더라도 그 결과는 NEIS의 분류 항목에 따라 NEIS의 입력요령에 따라 표준화된 형태로 입력된다. 여기에 입력될 수 없는 활동, 단위 행동으로 잘게 잘라낼 수 없는 전반적인 활동, 학생과의 교감 같은 것들은 결과적으로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버린다. 아무리 평소에 학생들과 퇴근시간 지나서까지 상담을 했어도 NEIS의 학생 상담 칸에 소정의 양식에 따라 입력하지 않으면 그건 상담이 아니다. 더 나아가 NEIS상의 입력 분류표에 포괄할 수 없는 활동들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다.
이미 시스템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면, 학생들이 NEIS에 입력된 이른바 스펙의 수량에 따라 입학사정관의 선택을 받듯, 머지않아 교사들이 여기에 입력된 실적의 수량에 따라 소위 교육 수요자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다. ‘학교정보 공시제시스템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교육 당국자가 공시 항목에 교사 개인별 실적하나면 더 추가하면 될 정도다. 여기에 교원평가까지 이미 실시되고 있다. 다만 전교조 뿐 아니라 한국교총도 여기에 격렬히 반발할 가능성이 있어서 힘에 의해 잠시 유보되어 있을 뿐이다.
교사만큼 이익단체의 힘이 강하지 않은 대학교수들은 이미 속절없이 이런 효율화·표준화·계량화의 칼날 앞에 노출되었다. 수치로 표시되는 강의평가가 보편화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교수의 연구실적 평가도 철저히 표준화·계량화 되었다. 외국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가장 점수가 높고, 국내 일반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고, 학술지들도 어떤 기준에 따라 등급과 점수가 부여되며, 논문이 인용된 횟수 등도 모두 점수로 계산된다. 그 외에 학생들의 강의평가, 각종 사회활동, 봉사활동 등 다양한 교수의 활동이 점수화되며, 이 모든 것들을 합산하면 총점과 평균이 나와서, 모든 교수들을 점수로 줄 세울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 줄 세우기 결과는 승진 및 보수에 실제 적용된다. 계급정년제가 있는 대학교수는 2년 혹은 3년마다 승진하지 못하면 그대로 해임될 수 있기 때문에 줄 세우기의 위력은 대단하다. 또 줄 세우기에 따라 연봉이 책정되기 때문에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비슷한 경력의 교수들 중에서도 연봉이 몇 억인 교수와 이천만원 남짓한 교수까지 갈라질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이런 표준화·계량화된 기준이 학문과 교육의 본성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기준 대로라면 논문 편수가 극히 적은 비트겐슈타인, 허버트 미드 같은 사람은 불과 3~4년 만에 교수직에서 탈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학문에서는 단 한편의 논문일지라도 그 내용과 그것이 가진 학문적 가치가 중요한 것인데, 이 표준·계량 척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한 주제를 평생에 걸쳐 천착하며 꼼꼼하게 논문을 쓰는 학자다운 교수는 해고의 위협에 시달릴 지격이 되었다. 교수들은 자신의 관심사, 흥미, 연구의 중요성과 무관하게 오직 논문 편수를 늘리기 위한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를 어느 교수는 논문 노가다라며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누군가가 체르니가 베토벤보다 작품수가 더 많기 때문에 더 훌륭한 음악가이며, 오페라도 한편 없고 교향곡도 겨우 4곡인 브람스는 퇴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일까? 하지만 시장원리가 적용된 대학에선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말이 현실이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학문의 자유와 교육의 중립성은 모두 공문구로 전락한다. 모든 권력은 이 표준과 기준을 만드는 자에게 집중된다. 그리고 이들은 경제학자, 경영학자들이다. 즉 경제학의 제국주의화가 관철되는 것이다.
표준화 검사의 대표주자로 일제고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고사는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품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도입 초기에는 시장이 관료주의보다는 더 자유로운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시장의 힘으로 우선 낡은 관료제부터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주장은 일부만 옳다. 신자유주의가 관료제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나, 국가 권력은 교육에 대한 통제권을 선선히 시장에 넘기지 않는다. 다만 교육에 대한 공적 책임만 시장에 떠넘겼을 뿐이다. 교육을 직접 통제하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번거롭다. 하지만 시장 원리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히려 교육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모든 학교에서 공통적으로 치르도록 되어 있는 표준화 검사’,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일제고사. 관공서까지 출근시간을 조정해야 하는 대입수능이 바로 대표적인 표준화 검사다.
물론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각 학교에는 자율권이 주어지며, 학부모들은 각 학교를 자유로이 시장 상품처럼 선택한다. 하지만 시장의 모든 상품에 그 가치를 표시하는 가격표가 붙어있듯이, 학교에도 공통의 가치척도가 필요한데, 바로 표준화 검사 점수다. 이 시험점수가 바로 가격표다. 학부모들은 각 학교의 점수를 보고 학교를 선택한다.
이런 상황에서 각 학교들은 아무리 폭넓은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할지라도 표준화 검사 시험점수를 높이기 위한 경쟁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게 된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고등학교들이 정상적인 교육과정까지 위반해가면서 알아서 대입수능 입시교육에 올인하는 것을 보면 이는 쉽게 확인된다. 정부는 구태여 개별 학교수준까지 통제할 필요가 없이, ‘표준화 검사의 문항만 통제하면 된다.
우리나라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대입수능 문제 출제과정에 모인 자부심 가득한 교사와 전문가들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것 보다 사실상 정부가 임명한 단 한사람만 통제하면 되는 묘안까지 등장했다. EBS 문제집 70퍼센트라는 기상천외한 기준이 그것이다. 이제 정부는 일선 학교들을 통제하기 위해 단 한사람, EBS 사장만 통제하면 된다. 효율의 극치가 아닌가? 최근 정부가 물의를 일으켜가면서까지 EBS사장을 낙하산 임명하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런 메커니즘을 알게 되면 왜 정부에서 그토록 고등학교의 학교별 수능점수를 공개시키려고 압력을 행사하며, 왜 소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한 교사들을 파면하면서까지 표집검사로도 충분한 학업성취도 조사를 모든 초·중학교에 일제고사로 치르게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교육 시장화를 통해 누가 무엇을 얻나?
 
지금까지 교육시장화를 움직이는 네 가지 원리가 학교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떠오르는 의문은 도대체 이걸 통해 누가 무엇을 얻는가 하는 것이다. 당파적으로 대답하면 교육시장화를 통해 이득을 얻는 집단은 자본가다. 그 이득은 직접적인 수준과 간접적인 수준에서 관철된다.
 
직접적인 이득, 즉 교육을 통한 이윤의 획득이다

자본은 축적을 멈추면 죽는다. 따라서 자본은 축적을 위해 점점 더 많은 시장을 요구한다.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던 곳을 시장화, 즉 식민지로 만듦으로써 이를 해결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배제된 영역은 더 이상 이윤이 창출될 가망이 없는 지역 외에는 없다. 더 이상 식민화 할 곳이 없다.
이때부터 시장화는 영토적 개념이 아니라 영역적 개념으로 바뀐다. 자본은 이전에는 이윤 창출의 영역으로, 시장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영역, 차가운 경제의 원리가 아닌 전통·전승·문화의 원리가 통용되던 영역을 하나하나 시장화 하면서 축적을 계속했다.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먼저 예술, 다음은 학문, 그리고 가장 마지막이 교육이다. 자본은 돈을 벌 목적으로 교육을 하는 행위를 정당화해 달라고 정부에게 압력을 행사했고, 성공했다. 영국, 미국, 그리고 일부지만 일본에서 이미 국가나 지자체가 기업가에게 학교를 넘기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이른바 사회적 기업가가 설립하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아무리 화려한 수사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표는 이윤이다.
하지만 교원조직과 시민사회의 저항이 심할 뿐 아니라 기대할 수 있는 이윤도 크지 않은 초·중등 교육은 자본 입장에서 매력이 크지 않다. 그러나 대학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나라 최대 대학인 서울대학이 국립대학에서 대학법인으로 바뀐 것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다. 서울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그 막대한 지적재산들이 더 이상 국가의 것, 즉 공공의 것이 아니라 학교의 것이 된 사건이며, 앞으로 서울대학교는 공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활동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업료 수입만 가능한 초중등 학교와 달리 대학은 막대한 지적재산권과 막강한 연구 인력을 거느리고 있다. 대학은 이들을 활용하여 로열티 수입을 올리거나, 각종 특허 기술들을 개발 판매하며, 심지어는 기업의 연구개발을 위탁 대행하기도 한다. 우리보다 이 흐름이 앞서간 많은 나라에서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 아니라 거대한 연구개발 기업으로 바뀌어나가고 있다. 미국에서 교수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제 첨단 과학· 공학 분야가 아닌 인문사회계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장식품에 불과하며, 보다 실용적인 대학에서는 아예 구조조정 대상이 된다. 또 경제·경영 교수들이 마치 기업의 이사진처럼 대학의 지도부를 형성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관철되었는지는 최근 10년간의 중앙대학교의 변천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간접적인 이득으로는 부유층의 감세 및 사회의 친 시장화가 있다

20세기의 역사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계속되는 양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는 그 양보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로, 이른바 복지사회의 정점이다. 이 양보는 자본가의 기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 대한 높은 세율에 의해 이루어졌다. 1980년대 이후 강력하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양보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자본의 반격이었다.
모든 신자유주의 정권이나 정치가가 이구동성 외치는 구호는 감세. 물론 감세의 혜택은 부자들이 대부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세금을 덜 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더 많은 돈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부지출을 무작정 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공공부조나 복지지출을 줄여서 그만큼의 세금을 덜 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 중 교육지출은 집중적인 공격대상이다. 이들의 눈에 교육지출은 쓸 만한 노동자가 될 소수의 학생에게만 집중되어야 하는데(이게 소위 말하는 수월성 교육), 쓸모없는 학생들까지 챙기고 있어서 지극히 낭비가 심하다. 이런 지출은 삭감해야 한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저항에 부딪치기 때문에 효율성, 선택과 집중 등의 수사가 동원되다. 그러면서 교육에 대한 공공 지출은 경쟁을 통해 될 성 싶은 곳에 더 집중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우수한 학교, 학생에게 혜택을 더 주는 방향 보다는 전체적으로 교육지출을 줄이고서, 쳐지는 학교에 대한 지출을 삭감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경우에서 보듯, 이 경쟁에서 패하여 공공지출 혜택에서 제외되는 학교는 한 결 같이 가난한 지역, 소수민족 지역의 학교다. 이것을 매우 거칠게 표현하면 부자들이 "내 아이와 나를 위해 일해 줄 인재들을 교육하는 학교에만 내 세금을 사용하라"는 요구다. 그럼 다른 학교는? 시장에 맡긴다. 그들 학교가 배제되고, 그들 학생이 소외되는 것은 그들의 교사, 그리고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 되는 시장에 맡긴다.
 
지금까지 교육에 적용되는 시장원리의 네 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어떻게 교육을 황폐화시키는지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 시장원리는 절대 노골적인 모습으로 교육에 들어오지 않는다. 항상 자율화, 다양화와 같은 매혹적인 탈을 쓰고 스며든다. 자율과 다양은 해방적 실천과 자본 사이의 칼 날 같은 경계이며, 상호 포섭이 이루어지는 전선이다. 교육운동가들은 빈틈만 보이면 파고드는 이런 시장원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단호한 거부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교육에 관철되는 시장원리는 게다가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시장원리가 관철된 학교에서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승자독식 경쟁의 당연함, 시장의 편재성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라게 된다. 이들은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어떤 불평등도 감수할 것이며, 오히려 퍼주기 복지에 반대하며 보수정당에 표를 주는 흥미로운 유권자로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교육 시장화의 가장 큰 효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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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