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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동경대학, 대만은 대만대학, 한국은 태산대학?

한국, 중국, 일본은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다. 그러다 보니 이 중 어느 나라에서 히트한 대중문화 상품은 다른 두 나라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같은 드라마가 세 나라 버전으로 각각 제작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일본 만화가 다다 카오루의 “장난스런 키스”다. 이 만화는 작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큰 인기를 끌었고,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에서 각각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줄거리가 같은 드라마다 보니 비슷한 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분석하기 아주 좋은 재료가 되기도 한다.

이리에 나오키
장즈슈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각 나라마다 이름만 다르고 그 외의 설정은 같은데(일본에서는 이리에 나오키, 대만에서는 장즈슈, 한국에서는 백승조), 아이큐 200의 천재이며 고등학교 3년을 만점으로 졸업할 정도의 우등생이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과 같은 대학에 다니기 위해 최고 명문대학 입학을 포기한다. 

이런 설정은 최고 명문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동아시아권 시청자들이 유럽이나 미국 시청자들보다 훨씬 깊게 공감한다. 입시경쟁은 마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과 같다. 아들이 하바드 대신 프린스턴 대학을 간다고 할 때 미국 학부모가 느끼는 충격과, 도쿄대 대신 메이지 대학 간다고 할 때 일본 학부모가 느끼는 충격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학부모 역시 일본 학부모에게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조금 더 살펴보면 한국판 드라마가 이 부분을 일본판, 대만판과 매우 다르게 처리했음을 알수 있다. 일본의 이리에 나오키가 포기한 일본 최고의 대학은 도쿄대학이다. 그리고 실제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은 도쿄대학이다. 장즈슈가 포기한 대만 최고의 대학은 대만대학이며, 마찬가지로 실제 대만 최고의 명문대는 대만대학이다. 그런데 한국의 백승조만 태산대학이란 대학을 포기한다. 한국에는 이런 이름의 대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일본과 대만 드라마에서는 실제 일본과 대만 최고 명문대학 이름을 극중 최고 명문대학 이름으로 사용했지만, 한국 드라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대학 이름을 사용했다.

비단 이 드라마 뿐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아예 대놓고 덜떨어진 폭주족들의 ‘도쿄대 도전기’라는 설정의 ‘드래곤 사쿠라’ 같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사실 이런 설정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만한 설정이다. 그러나 만약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면 필경 대학 이름만큼은 서울대학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는 대학으로 창씨개명 되었을 것이다. 대학 이름은 한국 드라마의 금기어인 세이다.실제 존재하는 대학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경우는 유시민이나, 박종철을 태산대학 학생 같은 식으로 부르는 것이 불가능한 사극뿐이다.

미국 드라마의 경우는 어떨까? 백악관을 무대로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의 활약을 그린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의 예를 들어보자. 이 드라마는 몇 회만 보면 등장인물들의 출신 대학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아주 상세하게 설정되어 있다.
제드 바틀렛 대통령은 노트르담 대학과 런던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다트머쓰 대학 교수였다. 다 실재하는 대학들이다. 영부인은 노트르담 대학 출신의 하바드 대학 교수다. 대변인과 비서실 차장이 서로 하바드 녀석, 버클리 녀석 그러면서 다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등장할 수 없는 설정이다.
웨스트 윙 주요 등장인물들: 위스콘신,  노트르담, 죠지타운, 하바드, 버클리, 프린스톤 등 실제 존재하는 대학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심지어 대통령의 측근이 “각하는 하버드, 예일에 다 합격했는데도 왜 노트르담 대학에 가셨나요?”하고 묻는 장면도 나온다. 이거 우리나라였다면 큰일 날 상황이다. 대사를 통해 하버드 대학과 노트르담 대학의 서열을 명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면 이 대사를 “각하는 서울대, 연세대 동시 합격했는데 왜 동국대 가셨나요?”로 바꿔보자. 그리고 이게 인기 드라마에 나온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드라마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이 이 칼럼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비유다 어쩐다 말들이 많을 것이다. 결국 이 대사는 자체 검열에 의해  “각하는 한국대, 민주대 동시 합격했는데 왜 정토대 가셨나요?” 이런 식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나 역시 대학 서열화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대학 서열화 반대, 학벌사회 반대가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아니라 일종의 위선의 표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문제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학벌사회 반대라는 그럴듯한 가치의 가면 아래, 실제로 내새끼만큼은 명문대학에 보내고 싶은 음험한 욕망이 감춰진 사회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욕망이 미덕의 가면아래 숨어있는 위선의 사회는 차라리 노골적인 욕망의 사회보다 위험하다.

이렇게 드라마에서조차 대학 서열이 드러나지 않게 대학 이름을 금기시 하는 나라라면 대 놓고 명문대학을 드라마에서도 드러내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대학 서열 의식이 낮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의 대학 서열의식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더 투철하다. 이런 이율배반 뒤에 은밀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진정 대학 서열이 드라마에 반영되는 것을 우려하는 나라라면 대학서열이라는 설정 자체를 드라마에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드라마의 현실은 가공의 대학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머지 오히려 부담없이 더 노골적인 대학 서열주의를 펼칠수 있다. "서울대학만 나오면 네 인생은 180도 달라지는거야"라는 대사는 부담스러워도, "태산대학만 나오면 돈, 명예,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이 네 것이 되는거야"라는 한층 더 오버스러운 대사는 부담이 없는 법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먼저 숨김이 없는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우선 내숭부터 제거해야 한다.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직면하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왜곡되고 굴절된 욕망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진보적 담론과 퇴행적 일상이라는 모순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고로, 서울대학만 나오면 무슨 크나큰 혜택이라도 있는 것 처럼 생각하는 분들에게 서울대학과 서울대 교수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당부드리고 싶다. 용감한 녀석들의 말대로 서울대를 열번을 나온다 한들, 어차피 안될 놈은 안된다. 그러니 자녀가 각자 자기 즐거운대로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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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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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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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