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3의 게시물 표시

곽노현 교육감의 출소를 보며 깊이 반성합니다. 그리고 다시 결심합니다.

오늘 곽노현 교육감이 출소하였습니다. 비록 무죄로 풀려난 것은 아니지만, 작년 내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교육감으로서 곽노현이 아니라 망년지우로서의 곽노현이 겪게 될 수감의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이라도 일단 먼저 끝냈다 하니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12년 하반기는 멘붕의 시기였습니다. "지는 것도 이젠 지쳤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미 411 총선 결과를 보며 갈 길이 어려울 것을 예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멘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멘붕하지 않고 과반수를 겨우 넘긴 새누리당이 18대의 초거대 한나라당 같은 위력은 없을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입법운동을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새누리당 의원을 한 두명만 설득하면 교육상임위를 통과시킬수 있을 정도로 야당 의석수도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교육개혁 입법안을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던 중 곽교육감이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멘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곽감이 비록 직은 상실하였으나 시민사회에서 정치적으로는 이미 사면된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요. 그의 정책을 제대로 계승하는 진영이 구축되면 보궐선거도 얼마든지 이길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대선 전망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래서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되면 위헌판결이 날것이라 보았고, 그 기세를 몰아 미리 준비한 교육개혁 정책을 쏟아 부으면 꿈꾸던 것들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진보, 노동단체의 무모한 욕심때문에 보궐선거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교사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학교 비정규직 분들도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게다가 그 보궐선거는 미묘한 영향을 주어 박빙이던 대선에도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선 결과가 나온 날, 2011년 9월부터 1년 반동안 분투하며 준비했던 모든 꿈과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 너무 괴로웠습니다. 멍하기도 하고. 그래서 페이스북에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독서토론 기록(1);칸트의 교육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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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에 세미나 정리한 글들도 조금씩 올려보려 합니다.



우리 모임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감상을 올려 봅니다. 다른 회원님들도 이 책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면 글을 올리시던가 트랙백 달아 주세요^^

===이하 논평==

우선 이 책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주지의 사실이지만 근대 교육학의 효시는 코메니우스지만, 그 속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갈등을 간파하고 그 화해를 꾀한 최초의 종합자는 루소다. 루소는 "개인적 자유를 신장하는 교육방법"을 통해 "공동체의 시민을 양성하는" 모순적 목표를 놓고 골몰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속에 개인적 자유의 교육, 즉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교육이 곧 공동체 구성원, 즉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의 교육은 도리어 잘못된 공동체와 그 문화로부터 아동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를 자연주의 교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루소의 교육방법은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1:1 교육이며 10여년을 함께 지내는 멘토에 의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래서는 현실적인 적용이 어렵다. 루소의 영향력을 크게 받은 손꼽히는 두 사람, 루소의 두 제자라고 불리는(실상 루소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던) 페스탈로치와 칸트는 공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한 번에 여러명을 모아놓고 하는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서도 루소가 꾀했던 인간으로서 완성됨으로써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는 이를 실천으로, 그리고 그가 세운 위페르돈 학교로, 또 그의 영향을 받은 데싸우 학교로 보여주었고, 칸트는 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 했다(비록 둘은 만난 적 없지만). 바로 이것이 이책을 읽는 이유다. 근대 공교육의 시작점에서 최초로 그 내적 모순과 긴장을 통합하려한 이론적인 시도라는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소설 형식이고, 페스탈로치…

추억돋는 클래식 덕질(3)- 나의 오페라 디바들

오페라, 발레에 푹 빠져 살아온 세월이 삼십년이 넘는다. 그 긴 세월 동안 여러 디바들을 좋아했다. 청소년기때, 청장년기때, 그리고 지금 여러 디바들이 나와 함께 세월의 다리를 건너갔다. 
1. 청소년기때의 디바: Edith Mathis
나의 청소년기때의 디바는 에디트 마티스였다. 주로 모차르트, 바하에서 강점이 있는 참 예쁜 목소리의 소프라노다. 안젤라 게오르규나 안나 넵트렙코보다 훨씬 이전에 활동한 날씬한 오페라 가수의 원조뻘 된다.  별처럼 빛나는 디바로 불리웠고, 괴테가 "모든 여성적인 것이 인류를 구원한다."라고 말할때 그 여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돈 지오반니의 체를리나, 그리고 마술피리의 파미나 처럼 실제로  순결하고 지혜로온 구원의 여인상을 맑은 소리로 들려주었다. 특히 마술피리에서는 대본을 보며 상상했던 파미나와 너무 싱크로율이 높아서 놀랄 정도였다.  중년 이후에는 바하, 헨델의 교회음악, 그리고 슈만, 브람스의 가곡으로 활동범위를 옮겨서 60대가 될때까지도 헤맑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  먼저 피가로의 결혼을 한 곡 들어 보고,(어제나 지금이나 에디트 마티스를 능가하는 수잔나는 없다)
피가로의 결혼 4막 수잔나 아리아

마술피리의 파미나와 파파게노의 2중창 하나 들어본다.
마술피리 1막 2중창

2. 청장년기때의 디바: Natalie Desay
나와 함께 늙어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소프라노다. 아직도 메트로폴리탄에서 맹활약 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생생해지는 소리와 달리 DVD등을 통해 본 그녀의 얼굴에는 어쩔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1990년대에는 나탈리 드세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무조건 CD를 구입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모차르트, 헨델, 그리고 벨리니까지. 물론 그 당시에는 화려한 외모의 안젤라 게오르규에 밀리고, 그리고 최근에는 역시 섹시한 외모의 안나 네트렙코나 디아나 담라우에게 다소 밀리는 감이 있지만, 오페라는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듣는 것이다. 
바로크, 콜로라튜라에서부터 벨칸…

추억이 새록거리는 클래식 덕질 (2)

제목을 클래식 덕질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지금의 나는 클덕, 클빠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영락없는 클덕이었다. 다만 빠하고는 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특정한 연주자나 성악가를 향해 팬질을 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 집에 LP를 감상할 수 있는 이른바 하이파이가 들어왔다. 드디어 카셋트 테이프에 FM방송 녹음해서 음악듣던 옹색함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LP판은 너무 비쌌다. 보통 한 장에 2800원 정도 했는데, 이는 짜장면 네그릇을 먹고도 남는 돈이었다. 당연히 이 귀한 LP를 그냥 들을 수는 없었다. LP를 사면 이것을 카셋트 테이프에 녹음했고, 주로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처음 구입한 LP는 빌헬름 켐프의 베토벤 소나타 전집, 카를 뵘의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 전집, 잉그리드 해블러의 모차르트 소나타 전집이었다. 용돈을 아끼고 아끼면 한달에 LP한 두장 살 정도의 여윳돈이 생겼다. 이걸 더 아끼기 위해 LP를 2000원이라는 놀라운 도매가격에 파는 청계천 일대의 음반 도매상을 뒤지고 다녔고, 특히 종로 3가의 원음사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모차르트 4중주, 그뤼미오의 모차르트 협주곡,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한 슈베르트 로자문데, 그리고 경이로운 목소리로 처음 들었을때 충격을 선사한 프리츠 분덜리히의 슈만 가곡 등이 그때 긁어 모은 애청판들이다. 이렇게 LP가 야금야금 쌓였다. 자꾸 음반 사오는 것을 부모님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단 집 앞에 있는 소화전 함에 감추어 두었다가, 밤에 식구들이 잠들면 꺼내왔다. 그런식으로 야금야금 늘어난 LP가 무더기가 되자 부모님도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들을 수 있는 LP판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른바 라이센스 판만 구입할 수 있었고, 외국에서 직수입한 판인 이른바 원판은 당시 돈으로 거의 만원을 넘게 주어야 만져볼 수 있었다. 그리고 라이센스 판은 매우 한정된 곡들만 발매되고 있었다. 오페라를 전곡…

마흔 여섯의 회한과 각오: 대한민국 학부모에게 드리는 교훈

내 나이 올해로 마흔 여섯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 산 날과 살 날이 반환점을 돌았다라고 하고 싶지만,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에 따르면 이미 남은 삶이 살아 온 삶보다 적게 남아있는 시점이다.

흔히 사십이 넘으면 얼굴에 인생이 나타난다고 한다. 거울을 본다. 살인 동안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통상적인 내 또래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에는 어떤 험한 기색도, 거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순탄히 살아왔다는 뜻일까? 내가 처음 발령받은 학교의 과학부장이 마흔 여섯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내 모습은 그때 보았던 마흔 여섯의 모습은 아니다. 훨씬 보존 상태가 좋다.
스펙도 나름 괜찮게 쌓아왔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로망인 서울대학을 재수 하지 않고 한 번에 들어갔다. 공중파 방송국에서 잠깐 기자 생활도 해 봤고, 우리나라 청년들의 로망인 임용고시도 단 한번 만에 합격해서 21년째 교사로 봉직하고 있다. 서울대학에서 계속 공부해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서울대학에서 6년간 비정규직이나마 ‘교수님’소리도 들었다. 일곱 편의 학술 논문을 썼고, 다섯 권의 학술 서적, 그리고 네 권의 청소년 도서를 출판했다. 각종 연수원 강의도 다니면서 교사들을 가르치는 위치에도 섰고, 심지어 서울대학교 교수들 앞에서 강의도 했다.
잘 살은 삶이 아닌가? 행복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있다. 인생을 낭비했다는 회한이 가시지 않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남들이 바라는 일, 부모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것이 아니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도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자연스레 글도 많이 쓰게 되어, 글짓기나 독후감과 관련한 상도 무척 많이 받았다. 학교 조회 시간에 내 글을 전교생 앞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이기도 했다. 4학년 때 까지는 각종 그리기 대회에서도 상을 많이 받았지만, 5학년이…

추억이 새록거리는 클래식 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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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클래식 매니아, 아니, 오덕분들이 꽤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트렌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이 클덕님들을 보면 소름이 끼칠정도로 디테일한 지식과 정보를 자랑한다. 사실 나는 40년 가까이 클래식 애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작품을 디테일한 정보로 기억하지 못한다.

예컨대 모차르트 41번 교향곡 1악장이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인지, 그냥 알레그로인지, 이런거 기억 못한다.  또 누가 지휘한 어느 교향악단의 몇년도 판, 이런거 기억 못한다. 그래서 사실 음악에 대해 의외로 할 말이 많지가 않다. 그러나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떤 연주든 훌륭한 연주는 귀를 기울이고, 그렇지 않은 연주에는 고통을 느낀다. 아마도 정보를 수집할 시간에도 음악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 세대는 클래식 덕질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정보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었고, 이를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외국정보를 차단했다. 해외여행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가되었고,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외국신문이나 잡지도 받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클래식 덕질의 핵심인 잘나가는 연주자나 성악가 지휘자들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국 우리같은 머글들은 국내 음반사들이 라이센스로 발매하는 음반에 나오는 연주자들 외에는 알 수가 없었고, 몇몇 특수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혹은 그들을 아는 사람들만이 이른바 원판(외국 직수입 음반)을 통해 머글들 귀에 생소한 이름의 연주자들, 혹은 이름만 들은 레전드들의 연주를 들을수 있었다. 아, 이들의 오만방자함이란 참으로 그냥 보아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요즘 클래식 덕님들 중에 이들의 정통을 계승한 것 처럼 보이는 님들이 제법 보여서 썩 맛이 상큼하지 않다.

사실 당시에는 국내 라이센스 음반조차 쉽게 구할수 있는게 아니었다. 매우 소량을 발매했기 때문에 절판되기 일쑤였고, 동네 레코드 점에서는 카세트 테이프가 고작이었다. LP판은 요즘의 …

PISA의 충격과 독일 교육의 논쟁

다음의 글은 카를 게바우어 가 편집한 "미래를 위한 학습 모형"이라는 책의 번역 전 검토 의견서입니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교육체제에 대해 얼마나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지만, 번역된 책이 아니라서 구해 볼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제 간단한 서평이 그 내용을 최대한 반영했으리라 믿어 봅니다.




-- 이하 서평---




독일이라는 나라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독일 교육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독일 교육의 체제가 꽤나 복잡하고, 또 우리나라 학제와는 상당히 다른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학제는 철저한 분리학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대학으로 진학할 아카데미 트랙 30%와 실업교육 트랙이 분리되는 독일 교육제도는 내신성적 98%인 학생까지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주로 김나지움이나 김나지움과 레알 슐레가 통합한 게잠트 슐레를 중심으로 독일 교육이 알려지면서, 독일교육의 지적이고 진지한 측면이 과대 대표되어왔다. 그러나 학생의 절반 이상이 진학하는 5년제 직업학교인 하우프트 슐레의 실상은 우리나라는 물론 독일인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교육제도를 독일인들의 논쟁의 중심으로 만들어 낸 사건이 바로 PISA다. 널리 알려진대로 독일은 PISA에서 그리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 독일의 교육전문가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피사의 지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핀란드, 우리나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조사단을 보내어 상당히 꼼꼼한 리뷰를 했다.

그 결과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나라들의 교육제도, 방법, 가치 등등이 모두 제각각이라서 이들 나라들에게서 피사에서 우수한 결과를 보여줄 특효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독일교육에 던져주는 두 가지 시사점을 찾았다.

1) 하나는 피사 우수 국가들은 학교 수업일이 길다는 것.  독일의 경우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