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9.

곽노현 교육감의 출소를 보며 깊이 반성합니다. 그리고 다시 결심합니다.

오늘 곽노현 교육감이 출소하였습니다. 비록 무죄로 풀려난 것은 아니지만, 작년 내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교육감으로서 곽노현이 아니라 망년지우로서의 곽노현이 겪게 될 수감의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이라도 일단 먼저 끝냈다 하니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12년 하반기는 멘붕의 시기였습니다. "지는 것도 이젠 지쳤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미 411 총선 결과를 보며 갈 길이 어려울 것을 예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멘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멘붕하지 않고 과반수를 겨우 넘긴 새누리당이 18대의 초거대 한나라당 같은 위력은 없을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입법운동을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새누리당 의원을 한 두명만 설득하면 교육상임위를 통과시킬수 있을 정도로 야당 의석수도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교육개혁 입법안을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던 중 곽교육감이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멘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곽감이 비록 직은 상실하였으나 시민사회에서 정치적으로는 이미 사면된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요. 그의 정책을 제대로 계승하는 진영이 구축되면 보궐선거도 얼마든지 이길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대선 전망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래서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되면 위헌판결이 날것이라 보았고, 그 기세를 몰아 미리 준비한 교육개혁 정책을 쏟아 부으면 꿈꾸던 것들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진보, 노동단체의 무모한 욕심때문에 보궐선거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교사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학교 비정규직 분들도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게다가 그 보궐선거는 미묘한 영향을 주어 박빙이던 대선에도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선 결과가 나온 날, 2011년 9월부터 1년 반동안 분투하며 준비했던 모든 꿈과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 너무 괴로웠습니다. 멍하기도 하고. 그래서 페이스북에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고 짧은 글을 올렸습니다. 멘붕의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알고 싶었습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하지만 살짝 멘붕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 글이 많은 교육운동가들에게 2차 멘붕가해의 역할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마저 멘붕의 조짐을 보이자 멘붕의 멘붕을 겪었던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멘붕의 위기가 오면 저의 대책없는 낙관주의, 계속해서 다음 일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위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이제 나는 뭘 해야 하나요?"하고 주저 앉는 모습을 보인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엄청난 항의도 들었습니다.

반성합니다. 흔히 교사는 아플 자유도 없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위해 아파도 안되니 자기 관리 잘 하라는 뜻이겠죠. 저는 이제 멘붕의 자유를 반납합니다. 저에게는 멘붕할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을 것이며, 실낱같은 전망을 찾을 것입니다. 정 안되면 저 혼자라도 자뻑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작년 12월 20일 새벽에 올린 저의 경솔한 멘트 때문에 실망하고 혹은 충격받았던 여러 트친, 페친님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더구나 오늘은 기쁜날이니까요.

블로그 주인이 쓴 책들 소개


2013. 3. 27.

독서토론 기록(1);칸트의 교육학 강의

몇해 전에 세미나 정리한 글들도 조금씩 올려보려 합니다.



우리 모임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감상을 올려 봅니다. 다른 회원님들도 이 책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면 글을 올리시던가 트랙백 달아 주세요^^

===이하 논평==

우선 이 책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주지의 사실이지만 근대 교육학의 효시는 코메니우스지만, 그 속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갈등을 간파하고 그 화해를 꾀한 최초의 종합자는 루소다. 루소는 "개인적 자유를 신장하는 교육방법"을 통해 "공동체의 시민을 양성하는" 모순적 목표를 놓고 골몰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속에 개인적 자유의 교육, 즉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교육이 곧 공동체 구성원, 즉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의 교육은 도리어 잘못된 공동체와 그 문화로부터 아동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를 자연주의 교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루소의 교육방법은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1:1 교육이며 10여년을 함께 지내는 멘토에 의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래서는 현실적인 적용이 어렵다. 루소의 영향력을 크게 받은 손꼽히는 두 사람, 루소의 두 제자라고 불리는(실상 루소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던) 페스탈로치와 칸트는 공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한 번에 여러명을 모아놓고 하는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서도 루소가 꾀했던 인간으로서 완성됨으로써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는 이를 실천으로, 그리고 그가 세운 위페르돈 학교로, 또 그의 영향을 받은 데싸우 학교로 보여주었고, 칸트는 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 했다(비록 둘은 만난 적 없지만). 바로 이것이 이책을 읽는 이유다. 근대 공교육의 시작점에서 최초로 그 내적 모순과 긴장을 통합하려한 이론적인 시도라는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소설 형식이고, 페스탈로치의 저작은 죄다 수기 형식이라....)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방대한 서론에 있다. 사실상 서론에서 할 말을 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바쁜 사람은 서론만 제대로 이해해도 충분하다. 본론에 나오는 각종 상세한 각론들은 사실상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낡거나 틀린것이 많다.

칸트는 루소의 두 가지 교육목표에 대한 고민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다른 방식의 교육 및 교육기관을 제시함으로써 넘어서고 있다. 즉, 자연적인 교육/ 실천적인 교육, 사교육/ 공교육이 그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같은 책에서 교육에 대한 분류를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여 혼동을 일으킨다. 이건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서론


서론에서 제일 먼저 분류한 교육은 양육, 훈육, 교수다.

1. 양육은 자신의 능력을 해가되지 않게 쓰도록 보살피는 것으로 유아기때 행해진다.

2. 훈육은 기율과 규율을 익힘으로써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장차 스스로 이성적 판단에 의해 본능을 조절할 준비를 갖추는 것으로 아동기에 행해진다. 훈육을 받음으로써 인간은 동물적 본성과 충동의 지배 받지 않고 인간성을 지킬수 있다. 그러나 훈육 단계에서 아동은 어떤 행동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게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를 법칙에 의거해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양육과 훈육은 주로 억제하는 것으로서 소극적 교육이라고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칸트는 양육/교육 의 분류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교육에는 훈육과 교수가 포함된다.

3 교수는 다시 지식교육과 도덕교육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목적에 대해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인류의 완전성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지식교육), 선으로 향하고자 하는 성향을 계발해야 한다(도덕교육).

칸트는 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기예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성취시키는 방향으로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기예다. 따라서 이는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방식의 모방학습으로는 불가하며 반드시 의도적인 탐구, 연구의 양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당장 투입된 예산의 효과에 대한 당장의 결과를 확인하기 곤란한 영역이므로 국가가 직접 관여하거나, 부모에게 마냥 맡길 것이 아니라 의식이 충분히 계몽된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실현되고 완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일반적인 네가지 목표를 상세히 제시힌다.
1) 야만성, 동물성을 버리고 충동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훈육이 담당)
2) 문화화 되어야 한다. 즉 신체와 마음의 능력을 기르고 키워야 한다.
3) 문명화 되어야 한다. 즉, 처세, 사교술, 실용적 분별력, 사회생활 요령등이 있어야 한다.
4) 도덕화되어야 한다. 즉 보편적인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씨를 길러야 한다.

1)의 결과 아동은 한 개인으로 완성되며, 2),3)의 결과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며, 4)의 결과 인류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각 연령별로 잘 배분되면, 루소가 고민한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과 시민으로서의 완성은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현재 교육은 2),3)에 너무 치중하여 4)가 너무 등한시되고 있다는 탄식도 빼놓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 네가지중 하나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실천이성, 즉 선험적인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칸트의 윤리학이 지탱될 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육방법의 측면에서 칸트는 이루어지는 장소에 따라 사교육/공교육, 그리고 주로 사용되는 방법에 따라 기계적 규제와 도덕적 규제로 나눈다. 사교육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의미와 달리 가정교육, 기타 면식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말한다. 공교육은 공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인데, 칸트는 공교육기관인 학교를 지식교수활동과 도덕교육활동의 기관으로 못박고 있다. 즉 훈육의 단계까지 마친 아동을 가정으로부터 인수받아 시민과 인류로 완성시키는 곳이 학교인 것이다. 이때 칸트는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보편타당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 우월한 방법으로 보고 있다. 사교육은 한 가정 안에서 발생한 오류와 실수가 계속 세대를 통해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 규제는 아동들이 반복에 의해 습관화되어 따르게 만드는 방식이다. 즉 순종과 복종에 의해 행동한다. 도덕적 교제는 아동들이 일정한 행위법칙에 따라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다. 똑 같이 규칙을 따르더라도 전자는 따르도록 지시되어 있으니까 따르며, 후자의 경우는 그것이 타당함을 알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이는 선의지를 결국 실천이성의 명령으로 본 주지적인 칸트의 윤리학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직면한 딜레마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은 행위규칙, 행위법칙이 가하는 규제와 구속을 자유의 능력과 어떻게 조화시킬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규제와 구속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어디까지나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복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칸트는 이것을 자유와 규율의 합성어인 자율로 부르고 있다. 교육에서 이것은 어떻게 나타날까? 학생들이 규제와 구속에 익숙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 향유할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개판과 기계적 복종 사이에 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이 모순적 목표가 동시에 달성된다고 보지 않았다. 앞에서 보았지만, 가정과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서 충분히 훈육된 다음(규제, 구속이 우선), 10세 이후부터 그 규제 구속의 이유를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교육이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를 칸트는 어릴때부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반드시 타인의 저항에 부딪침에 익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기에 서로 상대의 저항이 될 수 있음을 터득하고, 타인의 목적 성취를 허용할때 자신의 목적도 성취할 수 있음을 터득하도록 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될때, 이것이 인격교육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런데, 어릴때 타인의 저항을 경험하지 못한 귀족, 왕족 자제들은 결국 훈육이 제대로 되지 못해 이후 교육도 잘 안되어, 나이를 먹어도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라고 개탄한다.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공교육을 강조한다. 신분귀천 무관하게 보편적인 훈육과 교육을 받아야 이런 폐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 아동들이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저절로 타인의 저항, 제한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익힐수 있으니, 미래 시민을 기르는 가장 모범적인 교육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게 뭔소리인가 하겠지만, 당시에는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상당히 실험적인 모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18세기 칸트의 눈에도 한국의 교육은 낙후되고, 목적이 전치된 타락한 모습일테니 참으로 한심한 상황이 아닐수 없다. 칸트가 제시한 목표 네가지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기계적 방식만 행해지며, 도덕적 규제는 언감생심인 상황.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인류의 구성원은 커녕 한국의 구성원으로도 생각안하는 지독한 이기주의. 즉 칸트의 말을 빌리면 아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어른들이 다시 자기 아이를 키우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가정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권위가 이양된 공교육을 제안한 것인데, 저 아동같은 학부모가 여전히 입김을 수요자란 이름으로 가하고 있으니, 칸트가 보면 경을 칠 노릇이 아닐까?

본론

이제 본론이다. 그런데 서론에서 이미 개요를 다 이야기 했기 때문에 정작 본론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칸트는 나름 교육의 각 단계, 즉 양육, 훈육, 지식교수, 도덕교육에 해당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좀 시대에 맞지 않고, 때로는 이 책의 품위(?)와도 맞지 않는다. 특히 양육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인 부분들(이를테면 아기에게 무엇을 먹이고, 옷은 어떻게 입히고 등등)까지 세심하게 연구하고, 그 바탕 위에 교육학을 세우려 한 칸트의 자세를 배우자면 배워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 칸트는 교육과 교육이론이 자연적일수도 있고, 실천적일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자연적인 교육은 인간이 동물과 공유한 것과 관계하고, 실천적인 부분이 바로 인간이 인격적 존재가 될수 있는 교육이다.

칸트는 지난 발제에도 나왔듯이 이 실천적 교육을 다시 세 단계로 나눈다.

1) 문화화 하는 교육(지식교육): 시민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또 여기에 영향력을 끼치고 이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능력을 계발하고, 여기에 숙달, 숙련되게 함. 다소 기계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며 주요 무대는 학교. 실제 우리나라 학교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교육과정은 아직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2) 문명화 하는 교육(사회교육): 사회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실용적인 능력, 분별력, 예절 등을 익혀서 자신을 공동체에 적응시킬수 있는 능력을 키움. 이것은 일종의 사교와 관련된, 그리고 각종 의례 등과 관련된 교육으로 시민사회가 주된 교육의 장소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교육은 어디에서도 하고 있지 않다. 칸트는 지식과 도덕의 중간단계로 이 문명화 교육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3)도덕교육: 학생들의 도덕성, 품성과 성격을 함양하여 인류공동체 속에서 제자리를 찾게 하는 교육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자유로이 행위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실천적 교육이 어린이의 발달단계에 맞도록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훈육이 이루어져야 할 시기에 숙련이나 실용적 분별이 먼저 깨친 어린이는 교활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연적교육으로서 양육과 훈육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는 건너 뛰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나서 실천적 교육의 구체적인 사례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첫단계가 여러 능력들을 기르고 키우는 교육인데,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의 능력들, 정신의 능력들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학습이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그의 제자인 헤르바르트에 가서야 완성되는 부분이다. 다만 몇 가지 경구적인 충고들은 귀담아 들을만하다.

70절, 인간에게 가장 좋은 휴식은 일을 한 뒤 향유할 수 있는 휴식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일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아동교육은 일정한 규제와 강제, 즉 외부로부터의 의무를 함축하고 있는 방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지만, 비열한 노예근성이 나오게 해서는 안된다.

71절, 아동의 마음의 능력은 마음의 높은 능력들을 주로 고려하여 키워야 한다. 즉 기지와 재기는 지성의 능력을 고려하여 길러야 한다. 어떤 한 능력만 따로 길러서는 안되며, 다른 마음 능력들과 관계지워서 키워야 한다.

칸트는 저차 능력으로 기억력, 기지, 재치, 상상력 등을 들고 있으며, 고차능력으로 지성(일반적 원리 인식하는 능력), 판단력(이를 개별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이성(여러 일반적 원리들의 연결을 통찰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기억, 단지 상상은 의미가 없다.

결국 칸트가 제안하는 교수방법은 지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영역의 능력들이 유기적으로 발휘되는 통합적인 교수다. 물론 이는 기계적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학생들이 지성의 규칙을 사용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즉 지성의 규칙은 그 사용과 그 습득이 같은 과정이라야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칸트는 교육의 목적에 대한 체계적 개념화 뿐 아니라(이는 주로 서론에서 완결됨),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 개념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본론이 이것을 다루고는 있으나 미진함).

우선 지식(마음의 능력 기르는 교육)교육에 대한 방법론은 통합교수로 귀결되었고, 칸트는 다음으로 도뎍교육의 방법론으로 이행한다. 여기서 그는 습관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규칙에서 말미암아 선핸행위를 수행해야 한다는 그의 대표작인 "윤리형이상학의 정초"의 근본 원리를 재확인한다. 즉, 자기가 해야 할 행위의 정당한 이류를 알고, 이를 도덕적 의무 개념에서 추론, 정당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과 악의 행위 규칙에 따라 추론하여 행위할수 있을때 훈육과 구별되는 도덕교육이 성립되며, 이는 그의 앞서 도식에 따라 교육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그는 상벌에 의존하는 교육을 도덕교육을 훈육 수준으로 격하시킨다고 보아 거부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어 버릇을 망쳐서도, 혹은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노예근성을 배게 해서도 안된다. 그 바탕에서는 항상 일관된 원칙이 있어야 하며, 정당한 행위규칙의 정당성을 아동이 통찰할수 있도록 해야한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교사가 가장 조심해야 할 원칙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바로 보편성이다. 부모와 교사는 자신의 경향성,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보편적 원리 아래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아동들을 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칸트는 하나의 난제를 남겨 두는데, 이러한 도덕교육이 어릴때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훈육이 완료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어릴때도 처벌, 상이 아니라 원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운운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아동의 복종은 청소년의 복종과 다른데, 청소년은 의무에서 비롯된 복종을 한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이는 루소의 잔영으로 보인다. 그래서 훈육기 아동의 처벌을 인위적인 강제, 무력으로 보지는 않는다. 자연적인 결과가 가장 훌륭한 처벌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도덕적인 경멸과 수치감이 발전된 처벌이 되며, 마지막으로 의무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잡다할 정도로 많은 제안들이 있지만, 일일히 고려할만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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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5.

추억돋는 클래식 덕질(3)- 나의 오페라 디바들

오페라, 발레에 푹 빠져 살아온 세월이 삼십년이 넘는다. 그 긴 세월 동안 여러 디바들을 좋아했다. 청소년기때, 청장년기때, 그리고 지금 여러 디바들이 나와 함께 세월의 다리를 건너갔다. 

1. 청소년기때의 디바: Edith Mathis

나의 청소년기때의 디바는 에디트 마티스였다. 주로 모차르트, 바하에서 강점이 있는 참 예쁜 목소리의 소프라노다. 안젤라 게오르규나 안나 넵트렙코보다 훨씬 이전에 활동한 날씬한 오페라 가수의 원조뻘 된다. 
별처럼 빛나는 디바로 불리웠고, 괴테가 "모든 여성적인 것이 인류를 구원한다."라고 말할때 그 여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돈 지오반니의 체를리나, 그리고 마술피리의 파미나 처럼 실제로  순결하고 지혜로온 구원의 여인상을 맑은 소리로 들려주었다. 특히 마술피리에서는 대본을 보며 상상했던 파미나와 너무 싱크로율이 높아서 놀랄 정도였다. 
중년 이후에는 바하, 헨델의 교회음악, 그리고 슈만, 브람스의 가곡으로 활동범위를 옮겨서 60대가 될때까지도 헤맑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먼저 피가로의 결혼을 한 곡 들어 보고,(어제나 지금이나 에디트 마티스를 능가하는 수잔나는 없다)

피가로의 결혼 4막 수잔나 아리아

마술피리의 파미나와 파파게노의 2중창 하나 들어본다.



2. 청장년기때의 디바: Natalie Desay

나와 함께 늙어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소프라노다. 아직도 메트로폴리탄에서 맹활약 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생생해지는 소리와 달리 DVD등을 통해 본 그녀의 얼굴에는 어쩔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1990년대에는 나탈리 드세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무조건 CD를 구입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모차르트, 헨델, 그리고 벨리니까지. 물론 그 당시에는 화려한 외모의 안젤라 게오르규에 밀리고, 그리고 최근에는 역시 섹시한 외모의 안나 네트렙코나 디아나 담라우에게 다소 밀리는 감이 있지만, 오페라는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듣는 것이다. 

바로크, 콜로라튜라에서부터 벨칸토까지 여유있게 소화하는 나탈리 드세이는 한때 부당하게도 "조수미의 라이벌"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었다. 하지만 안된 말이지만 그건 한국인들의 오버다.

먼저,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아리아 하나 감상해 보고, 



그리고 그녀의 매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배역인 호프만 이야기의 인형 올림피아...


3. 가장 최근의 디바: Danielle de Nise

요즘 세대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바는 다니엘 드 니스다. 이 아름다운 소프라노는  독특하게도 르네상스, 바로크 등 고음악에 정통하다. 발레 솜씨도 뛰어나서 아치스와 갈라테이아에서는 피날레에서 전문 발레리노와 파드되를 추기도 했다. 헨델이 그녀의 장기인데, 헨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내가 놓칠리가 없다.

먼저 헨델의 "울게 하소서" 독창으로 들어보고



역시 헨델의 율리오 체사레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 아리아 하나 감상한다.


헨델 율리오 체사라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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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1.

추억이 새록거리는 클래식 덕질 (2)

제목을 클래식 덕질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지금의 나는 클덕, 클빠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영락없는 클덕이었다. 다만 빠하고는 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특정한 연주자나 성악가를 향해 팬질을 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 집에 LP를 감상할 수 있는 이른바 하이파이가 들어왔다. 드디어 카셋트 테이프에 FM방송 녹음해서 음악듣던 옹색함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LP판은 너무 비쌌다. 보통 한 장에 2800원 정도 했는데, 이는 짜장면 네그릇을 먹고도 남는 돈이었다. 당연히 이 귀한 LP를 그냥 들을 수는 없었다. LP를 사면 이것을 카셋트 테이프에 녹음했고, 주로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처음 구입한 LP는 빌헬름 켐프의 베토벤 소나타 전집, 카를 뵘의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 전집, 잉그리드 해블러의 모차르트 소나타 전집이었다. 용돈을 아끼고 아끼면 한달에 LP한 두장 살 정도의 여윳돈이 생겼다. 이걸 더 아끼기 위해 LP를 2000원이라는 놀라운 도매가격에 파는 청계천 일대의 음반 도매상을 뒤지고 다녔고, 특히 종로 3가의 원음사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모차르트 4중주, 그뤼미오의 모차르트 협주곡,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한 슈베르트 로자문데, 그리고 경이로운 목소리로 처음 들었을때 충격을 선사한 프리츠 분덜리히의 슈만 가곡 등이 그때 긁어 모은 애청판들이다. 이렇게 LP가 야금야금 쌓였다. 자꾸 음반 사오는 것을 부모님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단 집 앞에 있는 소화전 함에 감추어 두었다가, 밤에 식구들이 잠들면 꺼내왔다. 그런식으로 야금야금 늘어난 LP가 무더기가 되자 부모님도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들을 수 있는 LP판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른바 라이센스 판만 구입할 수 있었고, 외국에서 직수입한 판인 이른바 원판은 당시 돈으로 거의 만원을 넘게 주어야 만져볼 수 있었다. 그리고 라이센스 판은 매우 한정된 곡들만 발매되고 있었다. 오페라를 전곡을 듣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거의 대부분 하일라이트 판으로 나왔다. 심지어 피가로의 결혼, 리골레토 같은 거의 대중적인 오페라의 전곡판도 구하기 어려웠다. 요즘 클래식 팬의 필수 소장판인 게자 안다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집이 다 나오기 위해 3년을 기다렸을 정도다.

그러니 독일 원판을 원없이 들어볼 수 있는 곳인 독일문화원의 음악자료실은 나에게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거기서 들어본 판중 마음에 드는 것은 당시 클래식 라이센스 판을 많이 내던 '성음사'에서 발간한 '월간 레코드'라는 잡지에 기고하여 발매를 종용하기도 했다. 당시 내가 월간 레코드에 기고했던 글들이 제법 폼이 났는지, 팬 레터가 오기도 했다. 진주교대 2학년에 다니는 누나가 팬레터를 보내기도 했는데, 내가 클래식을 즐겨 듣고, 인문학 책 많이 읽는 대학생이라고 생각했는지,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고등학생임을 알고 그만 소식이 끊어졌다.

아버지가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인 친구를 통해, 당시 LP소장량이 전국에서 손꼽히던 서울대학교 음악감상실의 LP에서 녹음을 따오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C단조 대미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 같은 곡을 이런 식으로 처음 들었다. 놀랍게도 당시에는 이런 곡들을 음반으로 들을 수 없었다! 돈만 있으면 심지어 아마존을 통해 외국에서도 음반을 구입할 수 있는  요즘 클덕님들은, 돈이 있어도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던 당시 클덕들의  고생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명동에 있는 음악감상실 필하모니, 종로 1가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도 틈만 나면 가서 음악을 들었다. 학교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한다고 하면서 야자 빠지고, 집에는 야자다닌다고 하면서 독서실 값을 빼돌려서 심야의 호화로운 자유시간을 확보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다닌 곳이 음악감상실이라니! 지금 명동 CGV 근처에 있던 필하모니는 보유하고 있던 레코드 판이 입이 벌어질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머리가 벗겨진 두 영감님 디제이들이 몹시 불친절하고 고압적이었다.
반면 르네상스는 음반은 더 적었지만 친절한 디제이 누나들이 있었다. 남자 고등학생이 클래식 음악감상실에 출몰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누나들은 나를 금방 알아보게 되었고, 때로는 공짜로 출입하거나 음료수를 서비스 받기도 했다. 특히 디제이 누나가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슈베르트 교향곡 9번이라고 칠판에 써 놓았는데, 아무리 들어보아도 푸르트벵글러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서 문의한 이후 -그것은 바렌보임이었다- 더욱 대접이 좋아졌다.
그 외엔 나중에 생긴 대학로의 인켈 오디오 월드도 간혹 들렀다. 여기는 30대 아저씨 오덕님들이 자주 오는 곳인데, 스피커 앞에서 지휘하고 있는 아저씨, 베토벤 교향곡 7번의 피날레가 끝나자 스피커 앞에서 오열하는 아저씨 들로 득실거렸다. 여기에 비하면 요즘 말러리아 들은 덕질 축에 들지도 못한다.

때로는 당시 유일한 클래식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를 즐겼다.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이나 KBS교향악단의 정기공연에는 4층 꼭대기의 1000원짜리 좌석을 팔았다. 하지만 클래식 공연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올 턱이 없기 때문에 직원들이 와서 4층 문 닫으니 아래로 내려가라고 했고, 2층의 텅빈 좌석을 골라 앉을 수 있었다.

때때로 협연자로 세계적인 연주자가 오기도 해서 땡잡는 날도 있었다. 1000원짜리 표 사서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 들어갔더니, 그날 피아노 협연에 이마뉴엘 악스 라고 되어 있고, 심지어 연주곡이 브람스 협주곡 2번이라는! 그래서 1000원에 악스의 연주를 거의 한시간 가까이 들을 수 있는 대박을  경험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많이 들은 것은 카셋트 테이프였다. LP를 카셋트 테이프로 녹음한 것은 때마침 불어온 워크맨 열풍과 궁합이 잘 맞았다. 감히 워크맨은 사달라고 할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저렴한 산요 휴대용 카세트를 샀다. 당시 값으로 30000원이니, 요즘으로 치면 거의 2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품이었다. 소니 워크맨은 10만원을 거뜬히 넘어 20만원에 육박했는데, 당시 젊은 교사 봉급이 40만원선이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거의 맥북 값이다. 그래도 다니던 학교가 강남구 복판에 있는 학교라 우리반에만 해도 소니 워크맨, 아이와, 파나소닉 등이 즐비했다. 그래도 그 3만원짜리 카세트로 언제 어디서나 스테레오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정말이지 이런 이야기를 왜 계속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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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7.

마흔 여섯의 회한과 각오: 대한민국 학부모에게 드리는 교훈


내 나이 올해로 마흔 여섯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 산 날과 살 날이 반환점을 돌았다라고 하고 싶지만,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에 따르면 이미 남은 삶이 살아 온 삶보다 적게 남아있는 시점이다.

흔히 사십이 넘으면 얼굴에 인생이 나타난다고 한다. 거울을 본다. 살인 동안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통상적인 내 또래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에는 어떤 험한 기색도, 거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순탄히 살아왔다는 뜻일까? 내가 처음 발령받은 학교의 과학부장이 마흔 여섯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내 모습은 그때 보았던 마흔 여섯의 모습은 아니다. 훨씬 보존 상태가 좋다.
스펙도 나름 괜찮게 쌓아왔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로망인 서울대학을 재수 하지 않고 한 번에 들어갔다. 공중파 방송국에서 잠깐 기자 생활도 해 봤고, 우리나라 청년들의 로망인 임용고시도 단 한번 만에 합격해서 21년째 교사로 봉직하고 있다. 서울대학에서 계속 공부해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서울대학에서 6년간 비정규직이나마 ‘교수님’소리도 들었다. 일곱 편의 학술 논문을 썼고, 다섯 권의 학술 서적, 그리고 네 권의 청소년 도서를 출판했다. 각종 연수원 강의도 다니면서 교사들을 가르치는 위치에도 섰고, 심지어 서울대학교 교수들 앞에서 강의도 했다.
잘 살은 삶이 아닌가? 행복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있다. 인생을 낭비했다는 회한이 가시지 않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남들이 바라는 일, 부모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것이 아니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도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자연스레 글도 많이 쓰게 되어, 글짓기나 독후감과 관련한 상도 무척 많이 받았다. 학교 조회 시간에 내 글을 전교생 앞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이기도 했다. 4학년 때 까지는 각종 그리기 대회에서도 상을 많이 받았지만, 5학년이 되자 미술학원에서 그림 기술을 익힌 아이들을 더 이상 당해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글짓기만큼은 여전히 내 차지였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매달 뽑는 학교 독서왕은 으레 내 차지였다. 어떤 달에는 한 달에 80권이 넘는 책을 읽기도 했으니, 정말 어지간히도 많이 읽었다. 나중에는 더 읽을 책이 없어서 백과사전을 가가린에서부터 히아신스까지 읽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나의 자랑거리였으며, 글 솜씨는 나의 축복이었다.
당시 내 방에는 아버지가 대학시절 읽었던 각종 전집류들이 있었다. 내가 읽으라고 둔 것은 아니고,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한자가 1/3인 국한 혼용에다가 세로읽기로 인쇄된 책들이었지만 백과사전마저 다 읽어버린 나에게는 무궁무진한 샘물과도 같았다.
양장본으로 된 세계명작단편문학 전집이 그 중 가장 내 손길을 많이 받았다. 모옴, 하아디, 오우헨리, 사르트르, 카뮈, 토마스만, 헤세, 모빠상, 체호프, 투르게니에프, 고골리, 도스또예프스키, 똘스또이, 포우, 루신 등의 단편 소설집들이 있었다. 지금도 모빠상의 ‘목걸이’,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루신의 ‘아큐정전’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잊혀지지 않는다. 저금통을 깨서 산 ‘파우스트’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읽고 또 읽었다. 책장 구석에 쳐박혀 있던 ‘니체 전집’도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6학년의 독서목록으로는 좀 엉뚱하긴 하다. 어쨌든 그러면서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강하게 느꼈고, 실제로 썼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원고지에다가 썼는데, 몇 개의 단편을 썼지만, 실제로는 장편소설의 줄거리 요약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중학교에서 친 첫 번째 시험에서 반에서 14등을 했다. 전교 등수는 무려 200등대였다. 당시 전교생이 1200명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아주 못한 것은 아니지만, 중앙대학을 꼴찌들이나 가는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선생님들과의 사이도 험악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나의 엉뚱한 질문과 발표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중학교 선생님들은 그걸 도전으로 여겼다. 어쩌면 연합고사가 있던 시절, 문제-답 풀이 수업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교과서를 넘어서는 질문을 하고, 부정확한 수업 내용에 대해 반박을 하던 나는 칭찬대신 빳다를 맞았다.
초등학교까지는 칭찬의 대상이었던 것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꾸지람의 대상, 심지어는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다른 책을 보는 것도 모두 ‘공부 안하고 쓸 데 없는 짓’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책을 읽어서도 안되고, 음악을 들어서도 안되고, 그림을 그려서도 안되고, 피아노를 쳐도 안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교과서 읽고 정리해서 4지선다형의 답을 찾는 일은 내 적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나는 틈만 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부모님이 모두 잠들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약음기를 걸쳐놓고 조심스럽게 식구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피아노를 쳤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적이 올랐다. 내가 첫 시험을 망친 것은 책 때문도, 음악 때문도, 글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축농증 때문이었다. 코가 뚫리자 시험도 잘 봤다. 그걸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점수가 웬만큼 나와야 부모님의 잔소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어느 정도는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중학교 처음 들어가서 반에서 14등 정도 했으면, 그냥 끝까지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럼 결국 부모님도 포기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그만 전교 10등 이내로 들어가 버렸다. 그럼 만족을 모르는 부모는 이게 또 기준이 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 부모님의 견적은 중앙대는커녕 연고대도 재앙으로 느끼는 수준으로 상향조정되었다.
게다가 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처럼 설렁설렁 하면서 전교 10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정말 공부를 해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책을 읽고, 또 썼지만, 부모님은 귀신같이 내가 읽는 책들을 찾아서 압수했고, 내가 쓰던 원고지 뭉치를 찾아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심지어 “그렇게 책 읽고 글쓰는 것이 좋으면 학교 때려치우고, 청계천에 가서 서점 직원으로 취직하라”는 폭언까지 들었다.

결국 나는 꿈을 접고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다. 대학 들어갈 때 까지 모든 꿈을 유보하고, 일단 대학 들어가면 그때 다시 보자고 하는. 이거, 대한민국 학부모들이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한번은 해 보았을 명 대사 아닌가? 그러나 나의 부모를 포함한, 대한민국 부모님들은  한 번 접은 꿈은 다시 펼쳐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30년이 지나고 말았다. 한스러운 일이다. 
나는 중학교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부모님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나에게 경이로운 두뇌와, 그것을 받쳐줄수 있는 튼튼한 몸을 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부모님을 원망한다. 사실은 부모님에 맞서 더 고집 부리지 못하고 타협한 나를 원망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지금 나의 든든한 자산이 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중학교 들어가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 들이다. 나는 지금도 진보적인 교육자, 교육학자들 사이에서 글쟁이로 통하고 있다. 곽노현 교육감이 나를 아꼈던 것도, 내 글 솜씨 때문이지, 내 대입시험 성적 때문이 아니었다. 곳곳에 글을 기고했고, 그 글 덕에 알량하나마 제법 명성도 얻었고, 또 짭짤하게 돈도 벌었다. 글 솜씨 역시 피아노 솜씨와 마찬가지로 연마하고 다듬어야 하는 것인데, 중학교 이후 부모님 몰래 계속 써 버릇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날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나는 박학한 사람으로 통한다. 단지 시험 점수만 높았던 그냥 그런 서울대 출신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넒은 관심사와 풍부한 감수성이 나의 큰 자산이다. 이 역시 부모님 몰래 시험에 안 나오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연주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중학교 이후 부모님이 계속해서 강요했던 소위 공부는 지금 깨끗하게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다.

그래서 오히려 회한이 더 커진다. 지난 30년 동안 제대로 글쓰기를 배우고 익혔더라면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미국의 치밀한 소설작법 교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커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탁구를 치거나 농구를 하는 것처럼 일종의 기능을 요구한다. 마이클 조던이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저 동네 농구꾼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특별한 글쓰기 수업을 받지 않고, 심지어 학교 문예부 활동조차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필휘지로 글을 쓴다. 하지만 이것은 농구에 재능 있는 어느 뒷골목 흑인이 동네 농구골대에서 이런 저런 슬램덩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묘기는 부릴지언정 경기를 할 수는 없다. 경기를 하려면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야 하며, 전술을 익혀야 한다. 하지만 그 슬램 덩커의 나이가 마흔 여섯이라면? 이제 훈련을 받는다고 그가 과연 선수가 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나는 도전해 보려고 한다. 이제 5년만 더 지나면 50대다. 아이들하고 소통하며 수업하기는 벅찬 나이다. 내가 활기차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이다. 그 5년 안에 지난 30년을 되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이 각오를 밝힘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모든 학부모들에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내 인생에 감추어진 슬픔이 교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포스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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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4.

추억이 새록거리는 클래식 덕질

요즘 클래식 매니아, 아니, 오덕분들이 꽤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트렌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이 클덕님들을 보면 소름이 끼칠정도로 디테일한 지식과 정보를 자랑한다. 사실 나는 40년 가까이 클래식 애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작품을 디테일한 정보로 기억하지 못한다.

예컨대 모차르트 41번 교향곡 1악장이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인지, 그냥 알레그로인지, 이런거 기억 못한다.  또 누가 지휘한 어느 교향악단의 몇년도 판, 이런거 기억 못한다. 그래서 사실 음악에 대해 의외로 할 말이 많지가 않다. 그러나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떤 연주든 훌륭한 연주는 귀를 기울이고, 그렇지 않은 연주에는 고통을 느낀다. 아마도 정보를 수집할 시간에도 음악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 세대는 클래식 덕질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정보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었고, 이를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외국정보를 차단했다. 해외여행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가되었고,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외국신문이나 잡지도 받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클래식 덕질의 핵심인 잘나가는 연주자나 성악가 지휘자들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국 우리같은 머글들은 국내 음반사들이 라이센스로 발매하는 음반에 나오는 연주자들 외에는 알 수가 없었고, 몇몇 특수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혹은 그들을 아는 사람들만이 이른바 원판(외국 직수입 음반)을 통해 머글들 귀에 생소한 이름의 연주자들, 혹은 이름만 들은 레전드들의 연주를 들을수 있었다. 아, 이들의 오만방자함이란 참으로 그냥 보아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요즘 클래식 덕님들 중에 이들의 정통을 계승한 것 처럼 보이는 님들이 제법 보여서 썩 맛이 상큼하지 않다.

사실 당시에는 국내 라이센스 음반조차 쉽게 구할수 있는게 아니었다. 매우 소량을 발매했기 때문에 절판되기 일쑤였고, 동네 레코드 점에서는 카세트 테이프가 고작이었다. LP판은 요즘의 시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었고, 복제도 되지 않았다.

나 역시 동네 레코드 점 카세트 테이프들로 음악을 들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때 부모님을 졸라서 산 베토벤 교향곡 중 3, 5, 6, 7. 9번이 수록된 테이프 여섯개(9번은 테이프 두개)를 날이면 날마다 틀어놓고 심취하곤 했다. 그때는 엠피 플레이어는 커녕 워크맨도 없던 시절이라 낡은 카세트 녹음기(스테레오도 아닌)가 유일한 감상도구였다. 이른바 하이파이라고 불리는 오디오 컴포넌트는 사치품이었고, 헤드폰 역시 사치품이었다. 이어폰은 오늘날 같은 스테레오가 아니라 귀 하나에 꽂는 조악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냥 카세트 플레이어 틀어놓고 듣는게 최고였고, 그러다 보니 시끄럽다, 공부 왜 안하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우리집은 부유한 편이었기에 삼남매가 각자 자기 방과 자기 카세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베토벤 교향곡 카세트 테이프는 요제프 크립스가 런던 심포니를 지휘한 것으로, 당시 어린 마음에는 카라얀 같은 유명한 사람이 지휘자가 아니라서 불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그 이후 여러 베토벤 교향곡 음반을 들었지만, 그때 저 테이프가 준 감동을 다시 경험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이 테이프가 CD로 나온게 있는지 뒤지고 다니지만 구하지 못했다. 누가 요제프 크립스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CD 구할 수 있는 방법 가르쳐주면 정말 은인으로 생각하겠다.

그 이후 용돈을 아껴가며 카세트 테이프를 사 모았다. 오토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41번,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연주하고, 앙드레 클뤼땅뜨가 지휘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게자안다가 지휘하고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17, 21, 26번, 바두라스코다가 연주한 베토벤 소나타, 아바도가 지휘하고 굴다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 21번, 분덜리히가 노래한 슈만 가곡 등,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덮어놓고 구입한 카셋트 테입들이 지금와서 돌아보면 억 소리 나는 레전드급 명반들이었다. 어쩌면 어린 나이 클래식과의 첫만남이 이런 레전드급 명반이었던것은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감수성 예민한 어린시절 이런 음반들에 맞춰진 귀였기에, 이후 어지간한 음반이나 연주는 감동은 커녕 고통을 주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카세트 테이프 값도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클래식을 듣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저렴한 공테이프를 사서 FM방송을 녹음하는 것이었다.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명곡 해설사전"이란 책을 사서 거기에 나오는 명곡을 거의 외우다시피했고, 라디오에서 마침 그 책에서 나왔던 곡을 틀어주면 그것을 녹음해서 두고두고 들었다. 그런 식으로 중학교 2학년쯤 되니까, 바로크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상당한 레파토리가 순전히 FM방송 채록만으로 커버가 되었다.

웬만한 곡들을 다 들어보게 되자, 그 다음에는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의 버전으로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FM에서 명연주자 특집, 이런것 하면 공테이프를 끼워놓고 스탠바이 했다. 이때는 청취자 투표를 통해 10대 지휘자, 10대 피아니스트, 10대 바이올리니스트 이런거 뽑는게 유행이었다. 하여간 등수 매기는데 일가견 있는 한민족이다.

참고로 당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어렴풋한 기억에 지휘자는 1 카라얀, 2 번슈타인, 3 솔티, 4 뵘, 5 마젤, 6 오먼디... 이후 기억이 잘 안나고, 피아니스트는 1. 루빈슈타인, 2 호로비츠 3 폴리니 4 브렌델 5 아쉬케나지 6 리히터 7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는 1. 정경화(ㅎㅎ), 2 펄만 3 하이페츠 4 주커만 5 그뤼미오 6 셰링 .... 10 크레머 였던 것 같다. 하여간 순위는 모르겠고, 이들이 당시 인기 많던 연주자, 지휘자들이었다.

이제 라디오에서 이 이름이 들리기만 하면 즉시 녹음 대기모드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또 상당히 다양한 연주자들의 다양한 음악을 녹취해낼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이런 카셋트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것들을 차차 LP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용돈을 아껴서 LP를 구입했는데, 동네에는 있을 턱이 없기 때문에 종로 3가나 청계천에 있는 음반 도매상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요즘 세대는 시디가 걷어차일정도로 많이 나와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음반을 구하기 위해 몇시간을 발품 팔았으나 허탕치곤 했단 말을 전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 구한 바렌보임의 판은 연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갈증은 브렌델의 음반을 구하고서 어느정도 채워졌고, 게자 안다의 협주곡 전집(12장 LP)을 구하고서야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2013. 3. 2.

PISA의 충격과 독일 교육의 논쟁

다음의 글은 카를 게바우어 가 편집한 "미래를 위한 학습 모형"이라는 책의 번역 전 검토 의견서입니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교육체제에 대해 얼마나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지만, 번역된 책이 아니라서 구해 볼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제 간단한 서평이 그 내용을 최대한 반영했으리라 믿어 봅니다.




-- 이하 서평---




독일이라는 나라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독일 교육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독일 교육의 체제가 꽤나 복잡하고, 또 우리나라 학제와는 상당히 다른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학제는 철저한 분리학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대학으로 진학할 아카데미 트랙 30%와 실업교육 트랙이 분리되는 독일 교육제도는 내신성적 98%인 학생까지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주로 김나지움이나 김나지움과 레알 슐레가 통합한 게잠트 슐레를 중심으로 독일 교육이 알려지면서, 독일교육의 지적이고 진지한 측면이 과대 대표되어왔다. 그러나 학생의 절반 이상이 진학하는 5년제 직업학교인 하우프트 슐레의 실상은 우리나라는 물론 독일인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교육제도를 독일인들의 논쟁의 중심으로 만들어 낸 사건이 바로 PISA다. 널리 알려진대로 독일은 PISA에서 그리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 독일의 교육전문가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피사의 지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핀란드, 우리나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조사단을 보내어 상당히 꼼꼼한 리뷰를 했다.

그 결과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나라들의 교육제도, 방법, 가치 등등이 모두 제각각이라서 이들 나라들에게서 피사에서 우수한 결과를 보여줄 특효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독일교육에 던져주는 두 가지 시사점을 찾았다.

1) 하나는 피사 우수 국가들은 학교 수업일이 길다는 것
독일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오후수업이란 개념이 없는 반일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다른 하나는 모든 학생들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학교에 다니는 기간이 길다는 것
우리나라의 경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9년을 우열반이나 분리학급이 인정되지 않는 통합형 학급에서 공부하며, 특수교육대상자들도 일반학급에 편성된다. 반면 독일은 이런 통합형 교육을 받는 기간이 4년에 불과하며, 매우 이른 학년에 분리교육이 이루어진다.
독일의 학제는 이른바 능력과 적성에 따른 분리형 학제다. 학생들은 4학년까지만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며(우리 나라로는 초등 3학년 나이), 우리 나이로 11살부터 대학에 진학할 인문교양학교인 김나지움, 고등기술학교인 레알슐레, 그리고 직업학교인 하우프트 슐레에 진학한다.

게다가 진학하게 되는 학교에 따라 교육 기간도 다르다. 말로는 평등하다고 하지만 명백히 학교급이 갈라지는 것이다. 김나지움은 9년제이며, 우리나이로 고3때까지 다닌다. 레알 슐레는 6년제로 우리 나이로 중3때까지 다니며, 이후 전문적인 도제교육이나, 대학 진학 반으로 갈라진다. 이게 인문계와 실업계일까? 천만에. 여기까지는 초등학교 4학년 당시에 상위 1/3에 들어야 진학할 수 있는 학교다. 흔히 독일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우리나라 대학원 같고, 실업계 학교는 거의 공대를 방불케 한다면서 감탄하지만 이 학교들은 2/3에 달하는 보통 학생들에게는 해당 없는 일.

보통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는 하우프트 슐레로 직업학교로 불리는 학교인데, 우리 나이로 중2정도까지만 다니며, 이후는 실질적인 직업교육으로 충당된다. 이론적으로야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을 억지로 인문계에 진학시켜 수업시간에 2/3가 자고 있는 우리나라보다 합리적일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 나이로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어린 나이에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할 루트와 중 3 정도 나이에 학교가 종료되는 직업교육 루트가 거의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게바우어는 피사 우수국가들은 물론이려니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독일처럼 빠른 학년에 트랙이 분리되는 나라는 없다며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빨리 학업경로가 결정되어버리는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일단 불리한 처지에서 시작하는 학생은 이 격차를 미처 따라잡거나 돌이킬 틈도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게바우어는 독일의 학제가 너무도 불평등하며, 학생들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소진시킨다며 비판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로부터 독일 교육의 문제점과 지향점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10년여의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책은 이 논쟁을 이루는 다양한 문헌들 중 하나로, 앞에서 상술한 독일 교육의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교육개혁 실천 사례들을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매우 단순한 명제, “자녀가 학교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좋은 학습 성과와 학점을 받아서 집에 오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진정한 기쁨이다.”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이 기쁨의 지속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실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교는 많은 학생들은 학교의 첫 주가 지나기도 전에 이 기쁨은 끝나며, 많은 학생들은 학교로 되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학창시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실로 가는 경로와 재미없는 시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학생들의 행복과 배움의 기쁨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 중 상당수를 교사와 부모가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교육은 관료제의 미로 속에서 이런 노력을 하기 보다는 기쁨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탈락시키는 조기 선발제도에 안주해 왔다. 그러니 만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루어지는 피사에서 독일의 성적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만 15세라면, 실용기술교육이라는 미명하에 2/3나 되는 학생들이 사실상 학업, 배움의 기쁨에서 배제된지 7년이나 지난 시점이니 말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미 2/3가 “찌질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나 핀란드 같은 경우는 만15세까지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동질의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반문한다. “독일은 학생들에게 발달의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감스럽게도 답은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 너무도 빠른 나이에 아카데믹한 공부가 아니라 직업 교육을 선택하도록 하는 분리형 학제 때문이다. 이는 애초에 공부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 자질은 선천적이라는 그릇된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하우프트 슐레에 간 학생들 역시 김나지움에 간 학생들 못지않게 학업에 열정이 있고, 또 뒤늦게 지적인 능력이 만개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분리형 학제에서는 이를 감안하지 않는다.

결국 하우프트 슐레의 실상은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학습과 행동에서 어려움을 가진 학생들을 스스로 길러내는 꼴이다. 이들은 흥미가 마비되고 어떤 기회도 보지 못하는 학생들로 전락하기 쉽다. 직업이 공부보다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못해 직업으로 밀려난 학생들,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된 학생들은 이제 이해와 관심뿐 아니라 특별한 방식의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다. 그들은 자아 존중감을 높일 수 있는 특별한 격려와 조건이 필요하다.

반면 피사 최우수국인 핀란드는 그들의 교사헌장에서 보여주듯 모든 학생들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 헌장은 단 두 문장으로 “1. 모든 개개의 학생이 중요하다. 2.우리는 학생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는 핀란드 교육의 여러 구조와 제도들은 이 두 개의 단순한 명제에서 갈래쳐 나온다.

여기에 교육개혁의 열쇠가 있다. 독일은 학업능력이 불충분하고, 배움의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사라져 가고 있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12세-16세 사이의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배려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분리형 학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며, 하우프트 슐레의 교육과정과 교육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이 책은 독일인들이 교육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반성하고 고민하며 토론하는지 보여주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 교육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분리형 학제를 부러워하며 은근히 지향하던 일부 보수진영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보수진영은 9년간, 사실상 12년간 통합형 학급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분리형 학제를 만들고자 해왔다. 각종 특목고, 자사고의 신설, 평준화에 대한 공격,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런 저런 명목의 특목 중학교를 세우고자 했고, 중학교까지 국영수과 과목에 대한 우열반 수업을 강요했다. 그러나 거꾸로 독일인들은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분리형 학제를 문제삼고 있다. 그리고 9년간 통합형 학급에서 공부하는 우리나라를 부러워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으며, 이 책은 그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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