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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새록거리는 클래식 덕질

요즘 클래식 매니아, 아니, 오덕분들이 꽤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트렌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이 클덕님들을 보면 소름이 끼칠정도로 디테일한 지식과 정보를 자랑한다. 사실 나는 40년 가까이 클래식 애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작품을 디테일한 정보로 기억하지 못한다.

예컨대 모차르트 41번 교향곡 1악장이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인지, 그냥 알레그로인지, 이런거 기억 못한다.  또 누가 지휘한 어느 교향악단의 몇년도 판, 이런거 기억 못한다. 그래서 사실 음악에 대해 의외로 할 말이 많지가 않다. 그러나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떤 연주든 훌륭한 연주는 귀를 기울이고, 그렇지 않은 연주에는 고통을 느낀다. 아마도 정보를 수집할 시간에도 음악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 세대는 클래식 덕질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정보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었고, 이를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외국정보를 차단했다. 해외여행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가되었고,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외국신문이나 잡지도 받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클래식 덕질의 핵심인 잘나가는 연주자나 성악가 지휘자들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국 우리같은 머글들은 국내 음반사들이 라이센스로 발매하는 음반에 나오는 연주자들 외에는 알 수가 없었고, 몇몇 특수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혹은 그들을 아는 사람들만이 이른바 원판(외국 직수입 음반)을 통해 머글들 귀에 생소한 이름의 연주자들, 혹은 이름만 들은 레전드들의 연주를 들을수 있었다. 아, 이들의 오만방자함이란 참으로 그냥 보아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요즘 클래식 덕님들 중에 이들의 정통을 계승한 것 처럼 보이는 님들이 제법 보여서 썩 맛이 상큼하지 않다.

사실 당시에는 국내 라이센스 음반조차 쉽게 구할수 있는게 아니었다. 매우 소량을 발매했기 때문에 절판되기 일쑤였고, 동네 레코드 점에서는 카세트 테이프가 고작이었다. LP판은 요즘의 시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었고, 복제도 되지 않았다.

나 역시 동네 레코드 점 카세트 테이프들로 음악을 들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때 부모님을 졸라서 산 베토벤 교향곡 중 3, 5, 6, 7. 9번이 수록된 테이프 여섯개(9번은 테이프 두개)를 날이면 날마다 틀어놓고 심취하곤 했다. 그때는 엠피 플레이어는 커녕 워크맨도 없던 시절이라 낡은 카세트 녹음기(스테레오도 아닌)가 유일한 감상도구였다. 이른바 하이파이라고 불리는 오디오 컴포넌트는 사치품이었고, 헤드폰 역시 사치품이었다. 이어폰은 오늘날 같은 스테레오가 아니라 귀 하나에 꽂는 조악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냥 카세트 플레이어 틀어놓고 듣는게 최고였고, 그러다 보니 시끄럽다, 공부 왜 안하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우리집은 부유한 편이었기에 삼남매가 각자 자기 방과 자기 카세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베토벤 교향곡 카세트 테이프는 요제프 크립스가 런던 심포니를 지휘한 것으로, 당시 어린 마음에는 카라얀 같은 유명한 사람이 지휘자가 아니라서 불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그 이후 여러 베토벤 교향곡 음반을 들었지만, 그때 저 테이프가 준 감동을 다시 경험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이 테이프가 CD로 나온게 있는지 뒤지고 다니지만 구하지 못했다. 누가 요제프 크립스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CD 구할 수 있는 방법 가르쳐주면 정말 은인으로 생각하겠다.

그 이후 용돈을 아껴가며 카세트 테이프를 사 모았다. 오토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41번,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연주하고, 앙드레 클뤼땅뜨가 지휘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게자안다가 지휘하고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17, 21, 26번, 바두라스코다가 연주한 베토벤 소나타, 아바도가 지휘하고 굴다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 21번, 분덜리히가 노래한 슈만 가곡 등,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덮어놓고 구입한 카셋트 테입들이 지금와서 돌아보면 억 소리 나는 레전드급 명반들이었다. 어쩌면 어린 나이 클래식과의 첫만남이 이런 레전드급 명반이었던것은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감수성 예민한 어린시절 이런 음반들에 맞춰진 귀였기에, 이후 어지간한 음반이나 연주는 감동은 커녕 고통을 주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카세트 테이프 값도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클래식을 듣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저렴한 공테이프를 사서 FM방송을 녹음하는 것이었다.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명곡 해설사전"이란 책을 사서 거기에 나오는 명곡을 거의 외우다시피했고, 라디오에서 마침 그 책에서 나왔던 곡을 틀어주면 그것을 녹음해서 두고두고 들었다. 그런 식으로 중학교 2학년쯤 되니까, 바로크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상당한 레파토리가 순전히 FM방송 채록만으로 커버가 되었다.

웬만한 곡들을 다 들어보게 되자, 그 다음에는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의 버전으로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FM에서 명연주자 특집, 이런것 하면 공테이프를 끼워놓고 스탠바이 했다. 이때는 청취자 투표를 통해 10대 지휘자, 10대 피아니스트, 10대 바이올리니스트 이런거 뽑는게 유행이었다. 하여간 등수 매기는데 일가견 있는 한민족이다.

참고로 당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어렴풋한 기억에 지휘자는 1 카라얀, 2 번슈타인, 3 솔티, 4 뵘, 5 마젤, 6 오먼디... 이후 기억이 잘 안나고, 피아니스트는 1. 루빈슈타인, 2 호로비츠 3 폴리니 4 브렌델 5 아쉬케나지 6 리히터 7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는 1. 정경화(ㅎㅎ), 2 펄만 3 하이페츠 4 주커만 5 그뤼미오 6 셰링 .... 10 크레머 였던 것 같다. 하여간 순위는 모르겠고, 이들이 당시 인기 많던 연주자, 지휘자들이었다.

이제 라디오에서 이 이름이 들리기만 하면 즉시 녹음 대기모드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또 상당히 다양한 연주자들의 다양한 음악을 녹취해낼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이런 카셋트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것들을 차차 LP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용돈을 아껴서 LP를 구입했는데, 동네에는 있을 턱이 없기 때문에 종로 3가나 청계천에 있는 음반 도매상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요즘 세대는 시디가 걷어차일정도로 많이 나와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음반을 구하기 위해 몇시간을 발품 팔았으나 허탕치곤 했단 말을 전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 구한 바렌보임의 판은 연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갈증은 브렌델의 음반을 구하고서 어느정도 채워졌고, 게자 안다의 협주곡 전집(12장 LP)을 구하고서야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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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