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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여섯의 회한과 각오: 대한민국 학부모에게 드리는 교훈


내 나이 올해로 마흔 여섯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 산 날과 살 날이 반환점을 돌았다라고 하고 싶지만,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에 따르면 이미 남은 삶이 살아 온 삶보다 적게 남아있는 시점이다.

흔히 사십이 넘으면 얼굴에 인생이 나타난다고 한다. 거울을 본다. 살인 동안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통상적인 내 또래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에는 어떤 험한 기색도, 거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순탄히 살아왔다는 뜻일까? 내가 처음 발령받은 학교의 과학부장이 마흔 여섯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내 모습은 그때 보았던 마흔 여섯의 모습은 아니다. 훨씬 보존 상태가 좋다.
스펙도 나름 괜찮게 쌓아왔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로망인 서울대학을 재수 하지 않고 한 번에 들어갔다. 공중파 방송국에서 잠깐 기자 생활도 해 봤고, 우리나라 청년들의 로망인 임용고시도 단 한번 만에 합격해서 21년째 교사로 봉직하고 있다. 서울대학에서 계속 공부해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서울대학에서 6년간 비정규직이나마 ‘교수님’소리도 들었다. 일곱 편의 학술 논문을 썼고, 다섯 권의 학술 서적, 그리고 네 권의 청소년 도서를 출판했다. 각종 연수원 강의도 다니면서 교사들을 가르치는 위치에도 섰고, 심지어 서울대학교 교수들 앞에서 강의도 했다.
잘 살은 삶이 아닌가? 행복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있다. 인생을 낭비했다는 회한이 가시지 않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남들이 바라는 일, 부모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것이 아니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도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자연스레 글도 많이 쓰게 되어, 글짓기나 독후감과 관련한 상도 무척 많이 받았다. 학교 조회 시간에 내 글을 전교생 앞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이기도 했다. 4학년 때 까지는 각종 그리기 대회에서도 상을 많이 받았지만, 5학년이 되자 미술학원에서 그림 기술을 익힌 아이들을 더 이상 당해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글짓기만큼은 여전히 내 차지였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매달 뽑는 학교 독서왕은 으레 내 차지였다. 어떤 달에는 한 달에 80권이 넘는 책을 읽기도 했으니, 정말 어지간히도 많이 읽었다. 나중에는 더 읽을 책이 없어서 백과사전을 가가린에서부터 히아신스까지 읽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나의 자랑거리였으며, 글 솜씨는 나의 축복이었다.
당시 내 방에는 아버지가 대학시절 읽었던 각종 전집류들이 있었다. 내가 읽으라고 둔 것은 아니고,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한자가 1/3인 국한 혼용에다가 세로읽기로 인쇄된 책들이었지만 백과사전마저 다 읽어버린 나에게는 무궁무진한 샘물과도 같았다.
양장본으로 된 세계명작단편문학 전집이 그 중 가장 내 손길을 많이 받았다. 모옴, 하아디, 오우헨리, 사르트르, 카뮈, 토마스만, 헤세, 모빠상, 체호프, 투르게니에프, 고골리, 도스또예프스키, 똘스또이, 포우, 루신 등의 단편 소설집들이 있었다. 지금도 모빠상의 ‘목걸이’,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루신의 ‘아큐정전’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잊혀지지 않는다. 저금통을 깨서 산 ‘파우스트’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읽고 또 읽었다. 책장 구석에 쳐박혀 있던 ‘니체 전집’도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6학년의 독서목록으로는 좀 엉뚱하긴 하다. 어쨌든 그러면서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강하게 느꼈고, 실제로 썼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원고지에다가 썼는데, 몇 개의 단편을 썼지만, 실제로는 장편소설의 줄거리 요약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중학교에서 친 첫 번째 시험에서 반에서 14등을 했다. 전교 등수는 무려 200등대였다. 당시 전교생이 1200명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아주 못한 것은 아니지만, 중앙대학을 꼴찌들이나 가는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선생님들과의 사이도 험악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나의 엉뚱한 질문과 발표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중학교 선생님들은 그걸 도전으로 여겼다. 어쩌면 연합고사가 있던 시절, 문제-답 풀이 수업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교과서를 넘어서는 질문을 하고, 부정확한 수업 내용에 대해 반박을 하던 나는 칭찬대신 빳다를 맞았다.
초등학교까지는 칭찬의 대상이었던 것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꾸지람의 대상, 심지어는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다른 책을 보는 것도 모두 ‘공부 안하고 쓸 데 없는 짓’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책을 읽어서도 안되고, 음악을 들어서도 안되고, 그림을 그려서도 안되고, 피아노를 쳐도 안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교과서 읽고 정리해서 4지선다형의 답을 찾는 일은 내 적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나는 틈만 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부모님이 모두 잠들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약음기를 걸쳐놓고 조심스럽게 식구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피아노를 쳤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적이 올랐다. 내가 첫 시험을 망친 것은 책 때문도, 음악 때문도, 글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축농증 때문이었다. 코가 뚫리자 시험도 잘 봤다. 그걸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점수가 웬만큼 나와야 부모님의 잔소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어느 정도는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중학교 처음 들어가서 반에서 14등 정도 했으면, 그냥 끝까지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럼 결국 부모님도 포기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그만 전교 10등 이내로 들어가 버렸다. 그럼 만족을 모르는 부모는 이게 또 기준이 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 부모님의 견적은 중앙대는커녕 연고대도 재앙으로 느끼는 수준으로 상향조정되었다.
게다가 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처럼 설렁설렁 하면서 전교 10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정말 공부를 해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책을 읽고, 또 썼지만, 부모님은 귀신같이 내가 읽는 책들을 찾아서 압수했고, 내가 쓰던 원고지 뭉치를 찾아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심지어 “그렇게 책 읽고 글쓰는 것이 좋으면 학교 때려치우고, 청계천에 가서 서점 직원으로 취직하라”는 폭언까지 들었다.

결국 나는 꿈을 접고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다. 대학 들어갈 때 까지 모든 꿈을 유보하고, 일단 대학 들어가면 그때 다시 보자고 하는. 이거, 대한민국 학부모들이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한번은 해 보았을 명 대사 아닌가? 그러나 나의 부모를 포함한, 대한민국 부모님들은  한 번 접은 꿈은 다시 펼쳐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30년이 지나고 말았다. 한스러운 일이다. 
나는 중학교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부모님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나에게 경이로운 두뇌와, 그것을 받쳐줄수 있는 튼튼한 몸을 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부모님을 원망한다. 사실은 부모님에 맞서 더 고집 부리지 못하고 타협한 나를 원망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지금 나의 든든한 자산이 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중학교 들어가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 들이다. 나는 지금도 진보적인 교육자, 교육학자들 사이에서 글쟁이로 통하고 있다. 곽노현 교육감이 나를 아꼈던 것도, 내 글 솜씨 때문이지, 내 대입시험 성적 때문이 아니었다. 곳곳에 글을 기고했고, 그 글 덕에 알량하나마 제법 명성도 얻었고, 또 짭짤하게 돈도 벌었다. 글 솜씨 역시 피아노 솜씨와 마찬가지로 연마하고 다듬어야 하는 것인데, 중학교 이후 부모님 몰래 계속 써 버릇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날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나는 박학한 사람으로 통한다. 단지 시험 점수만 높았던 그냥 그런 서울대 출신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넒은 관심사와 풍부한 감수성이 나의 큰 자산이다. 이 역시 부모님 몰래 시험에 안 나오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연주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중학교 이후 부모님이 계속해서 강요했던 소위 공부는 지금 깨끗하게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다.

그래서 오히려 회한이 더 커진다. 지난 30년 동안 제대로 글쓰기를 배우고 익혔더라면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미국의 치밀한 소설작법 교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커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탁구를 치거나 농구를 하는 것처럼 일종의 기능을 요구한다. 마이클 조던이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저 동네 농구꾼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특별한 글쓰기 수업을 받지 않고, 심지어 학교 문예부 활동조차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필휘지로 글을 쓴다. 하지만 이것은 농구에 재능 있는 어느 뒷골목 흑인이 동네 농구골대에서 이런 저런 슬램덩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묘기는 부릴지언정 경기를 할 수는 없다. 경기를 하려면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야 하며, 전술을 익혀야 한다. 하지만 그 슬램 덩커의 나이가 마흔 여섯이라면? 이제 훈련을 받는다고 그가 과연 선수가 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나는 도전해 보려고 한다. 이제 5년만 더 지나면 50대다. 아이들하고 소통하며 수업하기는 벅찬 나이다. 내가 활기차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이다. 그 5년 안에 지난 30년을 되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이 각오를 밝힘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모든 학부모들에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내 인생에 감추어진 슬픔이 교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포스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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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