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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A의 충격과 독일 교육의 논쟁

다음의 글은 카를 게바우어 가 편집한 "미래를 위한 학습 모형"이라는 책의 번역 전 검토 의견서입니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교육체제에 대해 얼마나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지만, 번역된 책이 아니라서 구해 볼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제 간단한 서평이 그 내용을 최대한 반영했으리라 믿어 봅니다.




-- 이하 서평---




독일이라는 나라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독일 교육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독일 교육의 체제가 꽤나 복잡하고, 또 우리나라 학제와는 상당히 다른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학제는 철저한 분리학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대학으로 진학할 아카데미 트랙 30%와 실업교육 트랙이 분리되는 독일 교육제도는 내신성적 98%인 학생까지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주로 김나지움이나 김나지움과 레알 슐레가 통합한 게잠트 슐레를 중심으로 독일 교육이 알려지면서, 독일교육의 지적이고 진지한 측면이 과대 대표되어왔다. 그러나 학생의 절반 이상이 진학하는 5년제 직업학교인 하우프트 슐레의 실상은 우리나라는 물론 독일인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교육제도를 독일인들의 논쟁의 중심으로 만들어 낸 사건이 바로 PISA다. 널리 알려진대로 독일은 PISA에서 그리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 독일의 교육전문가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피사의 지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핀란드, 우리나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조사단을 보내어 상당히 꼼꼼한 리뷰를 했다.

그 결과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나라들의 교육제도, 방법, 가치 등등이 모두 제각각이라서 이들 나라들에게서 피사에서 우수한 결과를 보여줄 특효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독일교육에 던져주는 두 가지 시사점을 찾았다.

1) 하나는 피사 우수 국가들은 학교 수업일이 길다는 것
독일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오후수업이란 개념이 없는 반일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다른 하나는 모든 학생들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학교에 다니는 기간이 길다는 것
우리나라의 경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9년을 우열반이나 분리학급이 인정되지 않는 통합형 학급에서 공부하며, 특수교육대상자들도 일반학급에 편성된다. 반면 독일은 이런 통합형 교육을 받는 기간이 4년에 불과하며, 매우 이른 학년에 분리교육이 이루어진다.
독일의 학제는 이른바 능력과 적성에 따른 분리형 학제다. 학생들은 4학년까지만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며(우리 나라로는 초등 3학년 나이), 우리 나이로 11살부터 대학에 진학할 인문교양학교인 김나지움, 고등기술학교인 레알슐레, 그리고 직업학교인 하우프트 슐레에 진학한다.

게다가 진학하게 되는 학교에 따라 교육 기간도 다르다. 말로는 평등하다고 하지만 명백히 학교급이 갈라지는 것이다. 김나지움은 9년제이며, 우리나이로 고3때까지 다닌다. 레알 슐레는 6년제로 우리 나이로 중3때까지 다니며, 이후 전문적인 도제교육이나, 대학 진학 반으로 갈라진다. 이게 인문계와 실업계일까? 천만에. 여기까지는 초등학교 4학년 당시에 상위 1/3에 들어야 진학할 수 있는 학교다. 흔히 독일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우리나라 대학원 같고, 실업계 학교는 거의 공대를 방불케 한다면서 감탄하지만 이 학교들은 2/3에 달하는 보통 학생들에게는 해당 없는 일.

보통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는 하우프트 슐레로 직업학교로 불리는 학교인데, 우리 나이로 중2정도까지만 다니며, 이후는 실질적인 직업교육으로 충당된다. 이론적으로야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을 억지로 인문계에 진학시켜 수업시간에 2/3가 자고 있는 우리나라보다 합리적일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 나이로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어린 나이에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할 루트와 중 3 정도 나이에 학교가 종료되는 직업교육 루트가 거의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게바우어는 피사 우수국가들은 물론이려니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독일처럼 빠른 학년에 트랙이 분리되는 나라는 없다며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빨리 학업경로가 결정되어버리는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일단 불리한 처지에서 시작하는 학생은 이 격차를 미처 따라잡거나 돌이킬 틈도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게바우어는 독일의 학제가 너무도 불평등하며, 학생들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소진시킨다며 비판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로부터 독일 교육의 문제점과 지향점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10년여의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책은 이 논쟁을 이루는 다양한 문헌들 중 하나로, 앞에서 상술한 독일 교육의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교육개혁 실천 사례들을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매우 단순한 명제, “자녀가 학교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좋은 학습 성과와 학점을 받아서 집에 오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진정한 기쁨이다.”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이 기쁨의 지속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실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교는 많은 학생들은 학교의 첫 주가 지나기도 전에 이 기쁨은 끝나며, 많은 학생들은 학교로 되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학창시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실로 가는 경로와 재미없는 시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학생들의 행복과 배움의 기쁨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 중 상당수를 교사와 부모가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교육은 관료제의 미로 속에서 이런 노력을 하기 보다는 기쁨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탈락시키는 조기 선발제도에 안주해 왔다. 그러니 만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루어지는 피사에서 독일의 성적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만 15세라면, 실용기술교육이라는 미명하에 2/3나 되는 학생들이 사실상 학업, 배움의 기쁨에서 배제된지 7년이나 지난 시점이니 말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미 2/3가 “찌질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나 핀란드 같은 경우는 만15세까지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동질의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반문한다. “독일은 학생들에게 발달의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감스럽게도 답은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 너무도 빠른 나이에 아카데믹한 공부가 아니라 직업 교육을 선택하도록 하는 분리형 학제 때문이다. 이는 애초에 공부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 자질은 선천적이라는 그릇된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하우프트 슐레에 간 학생들 역시 김나지움에 간 학생들 못지않게 학업에 열정이 있고, 또 뒤늦게 지적인 능력이 만개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분리형 학제에서는 이를 감안하지 않는다.

결국 하우프트 슐레의 실상은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학습과 행동에서 어려움을 가진 학생들을 스스로 길러내는 꼴이다. 이들은 흥미가 마비되고 어떤 기회도 보지 못하는 학생들로 전락하기 쉽다. 직업이 공부보다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못해 직업으로 밀려난 학생들,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된 학생들은 이제 이해와 관심뿐 아니라 특별한 방식의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다. 그들은 자아 존중감을 높일 수 있는 특별한 격려와 조건이 필요하다.

반면 피사 최우수국인 핀란드는 그들의 교사헌장에서 보여주듯 모든 학생들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 헌장은 단 두 문장으로 “1. 모든 개개의 학생이 중요하다. 2.우리는 학생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는 핀란드 교육의 여러 구조와 제도들은 이 두 개의 단순한 명제에서 갈래쳐 나온다.

여기에 교육개혁의 열쇠가 있다. 독일은 학업능력이 불충분하고, 배움의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사라져 가고 있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12세-16세 사이의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배려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분리형 학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며, 하우프트 슐레의 교육과정과 교육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이 책은 독일인들이 교육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반성하고 고민하며 토론하는지 보여주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 교육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분리형 학제를 부러워하며 은근히 지향하던 일부 보수진영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보수진영은 9년간, 사실상 12년간 통합형 학급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분리형 학제를 만들고자 해왔다. 각종 특목고, 자사고의 신설, 평준화에 대한 공격,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런 저런 명목의 특목 중학교를 세우고자 했고, 중학교까지 국영수과 과목에 대한 우열반 수업을 강요했다. 그러나 거꾸로 독일인들은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분리형 학제를 문제삼고 있다. 그리고 9년간 통합형 학급에서 공부하는 우리나라를 부러워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으며, 이 책은 그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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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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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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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