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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새록거리는 클래식 덕질 이야기(3) 80년대와 클래식

나의 클래식 오덕질은 대학교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던 해는 1987년이며, 입학식때가 박종철 열사의 49제와 겹쳐서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흔히 87학번을 한 학기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한다. 87년에는 6월 항쟁의 여파로 동맹휴업과 시험거부가 빈발했고, 88년에는 여소야대 국면에서 민주화의 완성을 요구하느라, 1989년에는 노동자들의 투쟁, 전교조 등으로, 그리고 1990년에는 우리 스스로의 문제가 된 임용고시 등으로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클래식 덕질을 계속하였다. 지금 학생들은 까무라칠 얘기지만 3월에 모든 대학 남자 신입생들이 의무적으로 1주일간 입대하여 받는 군사훈련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입대 직전에 구입한 에리히 클라이버가 지휘한 피가로의 결혼을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월 8회 방문하는 과외를 하면 15-20만원을 받았는데, LP판 한장이 2500원이고, 웬만한 음악회가 만원을 넘지 않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거금이었다. 5-8만원이면 한 달 용돈으로 충분했고, 5만원은 저축하고 나머지 돈은 음반을 구입하거나 음악회 티켓을 구입했다. 그 당시 콘서트 홀은 세종문화회관과 호암아트홀이 전부였다. 새로 생긴 호암아트홀을 선호했다. 같은과 여학생과 안톤 쿠에르티 피아노 독주회를 갔는데, 나는 음악회가 익숙했기에 편안한 복장이었지만, 그녀는 매우 긴장된 시간으로 여겨서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나타나서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밖에도 알바비 모아서 전집 박스세트 구입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게자 안다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집(12장), 에셴바흐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7장), 칼 리히터가 지휘한 헨델의 메시아 전집이 그 무렵 최고의 득템이었다. 이래 저래 대학 시절에 수백장의 LP판을 긁어 모았다.(나중에 이걸 CD로 개비하느라 중복 지출된 돈도 엄청나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고등학교때 까지는 잡식성이었던 내 취향이 모차르트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대학교때는 거의 내내 모차르트만 듣다시피했다. 그리고 간간히 헨델, 베버, 슈만, 쇼팽을 들었다. 초등학교때 그렇게 좋아했던 베토벤은 거의 듣지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바흐는 잘 맞지 않았다. 현대음악도 조금씩 듣기는 했는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자주 들었고,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도 들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음악을 듣는다고 말하지 않고 모차르트를 듣는다라고 말할  오덕이 다시 더 치밀한 오덕이 된 셈이다.

혹자는 당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는데, 이렇게 클래식음악을 즐기는 취향이 어떻게 가능했냐고 반문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 질문이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이때가 이념적인 학생운동의 절정기이기는 했다. 우리는 선배 세대들의 낭만적인 학생운동은 노동계급의 관점이 결여된 소부르주아 자유주의로 난타했으며, 1988년부터 붐을 일으킨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중무장한 이념 세력으로 변모하였다.

'노동자', 이 말은 선이며 성스러운 단어였고, '부르주아' 이 말은 악이며 근절되어야 할 대상을 지칭했다. '지식인' 이 말은 기회주의자의 유사어로 경멸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하였다. 노동자 계급이 최고이며, 노동자 계급이 하는 일이 옳으며, 노동자 계급의 취향을 기준으로 미의 기준, 가치관 모든 것을 다 수정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고, 강의실 구석의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던 나의 취향은 그 열렬한 좌익투사(pd)들에게 오히려 칭찬의 대상이었지, 소부르주아 근성을 버리라는 요구 따위는 들은 바 없다.
또 나중에 소련 음반 수입이 허가되어 쇼스타코비치의 음반들이 대량 유입되었는데, 그 악명높은 pd지도부로부터 쇼스타코비치만 듣고 다른 부르주아 취향은 버리라는 어떤 비판도 요구도 받아본 바 없다.

얼마 전에 어떤 진보인사가 자신은 대학교때 감히 클래식 음악 듣는다는 말도 못 꺼내고, 그래서 이불 속에 숨겨놓고 듣곤 했다고  누가 쓴 것을 보았는데, 기가 막혔다. 내가 다닌 학교는 학생운동의 메카와 같은 곳이고, 그가 다닌 학교는 학생운동이 거의 없었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그가 대학교때 학군단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는데, 클래식 음악 듣는것이 반민중적 부르주아 취향이라 꺼린다고 하면서 군복을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일은 어떻게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80년대때 그 pd그룹 한복판에서 한때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외치고, 그러다가 투옥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늘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음악회를 갔으며, 당시 나의 동지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취향을 가지고 문제삼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는 음악회를 가면서 저렴한 좌석을 '프롤레타리아 지정석' 이런식으로 지칭하는 일따위는 하지 않는다. 나는 클래식을 즐기는 것이 부르주아적 취향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마르크스도 밥은 굶어도 딸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켰으며, 무너져가는 다락방에 살면서도  목돈이 생기자 생필품이 아니라 피아노를 샀다. 마르크스의 딸들은 노동자들의 모임에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으며, 이때 연주된 음악은 노동가요, 혁명음악 따위가 아니라 모차르트였다. 누군가가 여기에 대해 문제제기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그룬트리세' 서설에 옛시대의 예술작품을 즐기는 취향은 그냥 취향이라고 설명했다. 이걸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을 어린이 시절로 퇴행하려는 시도라고 문제삼는것 만큼이나 어리석으니까. 불행히도 마르크스는 이 이상의 미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80년대 당시 극렬 운동권이었던 나에게 클래식은 들으면 좋은것이며, 모든 계급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꿈꾸던 세상은 클래식 같은 부르주아 취향을 가진 자가 뽕짝 취향의 자를 무시하지 못하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부르주아 취향을 얼마든지 누릴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이런 신념은 지금도 그대로이며, 이게 나중에 곽노현 교육감의 문예체 교육론과 만나기도 한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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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