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아이언 맨 3에 대한 발비평문을 보고 절감한 진보의 발달지체

아이언맨3를 보았다. 보기 전에 이 영화를 3세계를 선한 미국이 신무기 기술로 보호한다는 철저한 미국중심주의가 관철된 기분나쁜 영화라는 비평을 보았기에 볼까 말까 망설였다.(비평문 원문링크). 하지만 오락은 오락일뿐이란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은 이 비평은 태어나서 영화비평이라고 본 글 중 가장 엉터리라는 것이며, 진보를 자처하는 그 교수(하여간 교수가 문제다)의 그 안이하고 무지한 상황이 우리나라 진보진영(그런게 있다면)의 발달지체의 한 징표처럼 보여서 몹시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이다.

그 비평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간략히 소개한 뒤 나의 반박을 붙여 놓겠다.

1. 아이언맨 3는 슈퍼 히어로 영화중 가장 위험하다. 아이언맨 1을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영화”라고 비판 한 바 있는데, 야만적인 제3세계를 선인(善人)인 미국인이 보호하고, 제3세계의 폭력과 독재도 미국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그 오만한 이데올로기, 미국 중심의 무기 개발 논리가 뿌리 깊게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 이 문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아이언맨 3는 가장 위험하다. 왜냐하면 아이언맨 1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게 말이 되나? 사실 아이언맨 1은 나도 보면서 살짝 불쾌감을 느낀부분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언맨 3과 아이언맨 1은 다른 영화다. 아이언맨 1을 비판할때 썼던 문구를 재활용하면서 아이언맨 3을 비판하는 그 지적 해이는 도대체 곱게 봐 넘기기가 어렵다.

2.  <아이언맨> 시리즈도 펜타곤의 시청각특별위원회와의 협업으로 만들었다. 아주 단순하게 보면, 이 영화는 신무기 개발을 옹호하는 영화이다.... 악당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비밀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렇게 포장된 것일 뿐이다.

=>> 이 분 도대체 영화를 보고 쓴 글인지 의심된다. 안보고 썼다면 도덕적으로 교수 자격이 없고, 보고 썼다면 지적으로 교수 자격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신무기 집착증에 대해 성찰적이다. 철저한 오락영화에서 이 정도 성찰도 담아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했지만, 도리어 그 신무기 때문에 에어포스 원이 폭파당하고 대통령이 화형대에 매달린다.
최신형 수트인 '아이언 패트리어트'를 보며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며 활짝 웃으며 에어포스 원으로 맞아들이는 장면은 역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여기서 멈추겠다. 하여튼 세상 만사에서 "반미자주 투쟁"의 코드를 찾아내는 지독하게 왜곡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한 이 영화를 몇 번을 봐도 "신무기 개발이 해법이다."류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신무기, 힘에 의존하려는 자신들에게 있다는 메시지가 느껴질 뿐이다.  

테러리스트를 찾아 중동지역을 헤매고 다니면서 멀쩡한 농가나 공장에 요란하게 쳐들어갔다가 머쓱해 하는 로드중령의 모습 역시 악의 축을 찾아 외부에 힘을 과시했던 미국의 그 동안의 모습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다. 정작 테러리스트는 미국의 부유한 지역인 플로리다에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똘추 과학자였던 그 테러리스트에게 힘을 실어주고 키워준 것은 펜타곤과 부통령이었으며, 바로 신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그 동안의 정책이 그런 괴물을 길러냈던 것이다.


3. <아이언맨3>의 악당은 참 흥미롭다. 악당 만다린의 의상과 그의 주변에 있는 기린(麒麟:중국 신화 중의 동물)이 모두 중국적인 것이다. 중동과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공포가 이런 형식으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 악당 만다린이 오사마 빈라덴이 중국풍 옷 입은 모습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대사에 나온다. "미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너희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모습으로 연출했다."라고. 즉 이 영화의 악당은 중국과 중동을 이유없이 무서워하는 미국인들을 이용하여 연출된 캐릭터다. 실제로는 중국, 중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만다린은 중국, 중동에 대한 미국의 공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근거없는 그 공포를 희화화 하고, 그 근거없는 공포때문에 엉뚱한 적을 설정하고, 결국 내부의 적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4.  <아이언맨3>가 지금 우리에게 위험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한국에서 열광적으로 <아이언맨3>를 관람하고 있을 때 남북은 핵 전쟁의 위험이 빠졌고, 동시에 미국의 무기를 또다시 수입하는 상황이 마치 정말 영화처럼 재현되었다. 

=>> 이쯤 되면 **도 풍년이다. 이 영화 어디에 무기를 또다시 수입하는 상황이 나오는가? 스포일러 때문에 이쯤해서 덮지만 이 영화의 결론은 정 반대로 달려간다. 심지어 극도로 강력한 악당(슈트를 입고도 당해내지 못하던 악당)마저 자기가 개발한 기술에 의해 처참하게 죽는다.  누구든 무기를 개발하고 외부의 적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자는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최신무기에 의해 에어포스원이 폭파되고 무수한 백악관 스탭들이 죽음을 맞이하듯. 주인공 역시 끝없는 불안증에 시달린다. 그 불안증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그 불안증을 제거하기 위해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 이걸 본다면 이 영화가 신무기 만만세, 미국 만만세라는 따위의 말은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5. 아시아에 대한 미국인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나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의 이미지도 미국 영화에서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에게 한국인은 중동인과 얼마나 다른 존재일까? 비슷한 유색인종 아닐까? 상황이 이럼에도 왜 우리는 이토록 <아이언맨>에 열광하는가?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 영화에서 대통령을 구하고 미국을 구한 영웅의 피부 색깔이나 보고 말하자. 새까맣지 아니한가? 유색인종 운운이라니 얼마나 난데없나? 중동인인지 중국인인지 헷갈리던 악당 역시 다만 그렇게 분장했을 뿐이다. 가장 사악한 악당들은 금발머리 휘날리는 백인들이다. 적어도 영화 교수라면 꼼꼼하게 보고 좀 평론하자. 


1990년대부터 이른바 진보적인 영화 평론가들의 비평 코드는 늘 같았다. 이들의 수백편의 평론문을 다음 몇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다. 
" 헐리우드 영화는 일단 까고 본다. 헐리우드 영화는 상업주의 혹은 미국중심주의 두 가지 코드 중 어느 하나에 몰아놓고 깐다. 프랑스 영화는 예술영화이며, 일본 영화는 성찰적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평론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혹 벗어나면 진정성을 의심받고 수꼴로 몰릴 분위기였다. 문제는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걸 평론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영화가 플롯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으며,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고, 액션 장면을 어떻게 구성하며, 배우는 어떻게 연기하고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보기 어렵다. 물론 영화 속에서 교묘한 정치코드를 찾아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정치평론이 아니라 영화평론인 다음에야 어느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헐리우드 영화를 아무리 비하해도 그들이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지배전략 때문이 아니라 뛰어난 플롯 구사능력과 연출능력 때문이다. 배울건 배워야 한다.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고서, 다만 선입관과 반감에 기반한 평론을 쓴다면 백편을 써도 발전이 없을 것이다. 늘 80년대의 운동권 사투리만 상투적으로 내뱉는 중증 발달지체에 머무를 뿐.

<추신>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나 역시 "미국 만만세"에 동조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신무기의 위력 때문이 아니라, 영화속에서 에어포스원이 폭파되고 대통령이 대롱대롱 매달리는 장면을 거침없이 만들수 있는 그 자유 때문이다. 우리에겐 너무도 요원한 경지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