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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눈으로 바라본 노동절 단상: 노동이 없는 교육, 교육이 없는 노동

(이글은 원래 칼럼 기고문이나, 데스크를 통과하지 못한듯 하여 게재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노동절이란 계기와 관련된 글이기에 더 늦게 올라가야 의미가 없을듯하여 블로그에 먼저 올립니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노동절의 공식 명칭은 ‘근로자의 날’이다. 이 근로자라는 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부지런한 노동자의 날’이 된다. 괴이한 노릇이다. 부지런하지 않은 노동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날이 되는 것이다. 이 괴이한 단어에는 노동에 대한 뿌리깊은 천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노동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으나, 노동을 ‘부지런하게’ 하면, 그 ‘부지런함’ 만큼은 평가해 줄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근심’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이 ‘부지런함’은 ‘고달프고 괴로움’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그러니 근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부지런함’이 아니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꾹 참는 부지런함’ 까지 요구된다. 꾹 참는 부지런함으로 칭찬받는 미덕은 노예의 미덕이지 결코 주인의 미덕이 아니다. 이래저래 근로자라는 말은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의미의 총합이다.

문제는 이 노동 천시의 풍토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인식이 바뀌려면 어린 시절부터 건전한 노동관과 의식을 익혀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초중등 교육은 노동 실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노동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노동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에서 노동은 사회과의 ‘근로자와 기업가의 자세’라는 소단원에서 잠깐 등장할 뿐이다. 반면 가장 최근에 개정된 교육과정에서는 재테크가 당당하게 대단원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노동 없는 교육인 셈이다.

이렇게 노동 없이 재테크만 있는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배울까? 그 과정과 원천이야 뭐가 되었건 이런 저런 재주로 돈을 벌기만 하고 불리기만 하면 된다고 배울 수밖에 없다. 기업의 이윤도 가계의 소득도 노동을 원천으로 하고, 학생들의 대부분이 졸업하면 어떤 형태로든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데도, 우리나라 교육은 여기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는다. 그냥 돈은 거기 있으며, 재테크로 잘 굴리면 되는 것이며, 이걸 경제랍시고 배운다. 이렇게 배운 아이들이니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떤 일, 어떤 가치를 말하는 대신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렇게 노동 없는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졸업하면 자신들이 노동을 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노동 일선에 뛰어들게 된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정규 시간제 노동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배우지 않았다. 근로계약이 무엇인지, 근로기준법이 무엇인지, 노동 3권이 무엇인지 배우지 않았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노동시장에 던져진 젊은이들은 냉혹한 자본의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 되어 이리저리 내몰리며 한 무더기의 노동으로 소진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배우지 못한 탓에 이들은 이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따져보지 못하며, 그것을 오롯이 자기 탓으로 돌린다. 이들은 노동이 가치 생산의 원천임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 없이 돈 벌수 있다는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이를 이용하여 온갖 편법 다단계 업체가 기승을 부린다. 온 사회가 젊은이들을 부려먹으려, 다시 그 대가로 쥐어 준 쥐꼬리만한 임금을 털어먹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우리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위로도, 혹은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따위의 판타지도 아니다.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노동을 배우는 것이며, 노동의 의미와 노동의 권리를 배우는 것이며, 이러한 권리를 찾기 위해 어떤 절차와 행동이 필요한지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어디에서도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노동 없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에 노동이 없다면, 우리나라 노동에는 교육이 없다. 이것 역시 심각한 문제다. 노동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듀이, 셀레스탱 프레네 같은 위대한 교육학자들은 일과 놀이와 배움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일하면서 배우고 놀이하면서 배운다. 그리고 이러한 배움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이 확장되는 경험이 바로 행복이다.

그런데 기업이 노동자들을 단기간만 부리다가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풍토에서, 또 그렇게 취업과 해고를 반복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풍토에서 노동은 배움의 계기가 되지 못한다. 노동이 배움의 계기가 되려면 비슷한 분야에서 상당히 긴 시간동안 꾸준히 일하면서 자신을 연마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년을 일해도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한낱 최저임금 대상자로만 취급받는 상황에서 꾸준히 한 분야를 정진하며 전문가로 성장해 간다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

기업도 교육에 돈을 쓰지 않는다. 기업은 직원들을 단기간 부리다가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교육비를 투자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나라 노동에는 교육이 없으며, 노동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며, 따라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노동을 통해 행복해질 기회가 없다.

노동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행위이며, 또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게 될 행위이다. 교육은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행위이며,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행위이다. 교육은 마땅히 학생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노동의 가치를 가르치고, 노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노동은 마땅히 그 속에서 노동자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교육이 노동을 준비하고, 노동이 교육의 계기를 마련할 때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한 삶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행복 교육이 별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닌 셈이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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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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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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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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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