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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들이 판치는 교육부의 또 다른 대형 사고: 일진에게 학교폭력 단속권을?

대한민국 교육부는 참으로 해괴한 곳이다. 다른 전문 분야 부처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예컨대 국방부의 경우 장관, 차관 이하 대부분의 중요한 직책이 군인이나 군인출신으로 되어 있다. 법무부는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들이 주요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부는 교사, 교수, 교육전문가 출신이 아니라 "행정고시 출신 관료"들이 주요 직책을 꿰어차고 있다. 이런 해괴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은 교육부 외에는 재경부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들 고시출신들의 문제점은 교육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제를 안다고 착각하는" 모피아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그나마 모피아들은 아무리 뻘짓을 해도 시중의 기업이나 은행이 그 짓거리를 그대로 따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교육부의 행시관료들의 뻘짓은 각종 시행지침이 되어 학교에 내려온다. 뻘짓이 반드시 현실화 되는 것이다. 

이주호 장관시절 수많은 뻘짓을 한 이 관료들이 올해는 어째 잠잠하나 했더니 마침내 대형사고를 쳤다. 물론 아직 실시예정이니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이들의 그들의 행태를 보면 일단 언론에 뿌렸으면 무조건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부작용은 시행해 가면서 고치겠다고 우기면서.

바로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학교폭력 우범지대에 대한 단속권을 주어 학교폭력을 줄여 나가겠다는 기상천외한 방침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정책을 내어 놓게 된 동기는 나무랄 것이 없다.  "그동안 학교폭력 대책이 가해학생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처벌하는 등 징계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처벌보다는 "선도 위주"로 정책 전환을 하겠다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 선도가 오히려 완장을 채워서 권력의 맛을 보게 하는 것이라니 그 발상은 혹시 이 담당자가  "*사부 일체" 시리즈 오타쿠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여기에 대한 우려는 이미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고, 상식적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니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교육부 담당자라는 사람들이 아직도 학교폭력의 개념 정리조차 되지 않고, 그 교육적 해결책에 대한 마인드도 없다는 참담한 현실이다.

이들이 자신있게 내어 놓은 이 "창조적"인 정책의 논리는 이른바 일진들에게 일정정도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면 이들이 책임의식과 규범의식을 갖게 되어 학내에 질서가 잡힌다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학교폭력은 학교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그 사각지대에서 힘센 무법자들이 설쳐대면서 일어나는 현상, 즉 몇몇 깡패나 양아치들의 범법행위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범죄자들이 준법정신이 부족해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19세기적 사고방식의 학교판 변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오늘날의 범죄사회학 범죄심리학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범죄자는 수많은 사회적, 심리적 변인의 복합적 영향 속에서 탄생한다. 도덕성의 부족, 준법성의 부족은 범죄의 원인이 아니라 그 역시 일종의 결과이거나 혹은 매개변수에 불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교폭력 역시 많은 연구들을 통해 도덕성의 문제보다 복합적인 문제임이 밝혀지고 있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대체로 고도의 스트레스 상태, 지나친 긴장상태, 자아존중감의 손상,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의 강화, 그리고 타인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부족 등의 요인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가해자가 된다. 고도의 스트레스와 긴장상태에서 인간이 공격적이 된다는 것은 이미 심리학의 상식이다. 

또한 학교 동료들의 유형, 무형의 동조화 현상이 이들을 더욱 부추겨 폭력을 강화 지속시킨다는 것이 최근 학교폭력 관련 연구의 정설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적 조치는 1) 학교 동료들이 가해자들에게 동조하지 않게 함으로써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가 환영받거나 지지받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것, 2)가해자들이 처한 심리적 위기를 발견하여 해결해 주는 것, 3) 가해자 뿐 아니라 학교 동료들 모두 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이를 느끼게 하는 것의 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들에게 완장을 채워서 폭력 우범지역을 순찰하게 하겠다는 발상에는 이런 교육적 고민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세계적 흐름에도 전혀 맡지 않는다.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확인하려는 권력욕이 학교폭력 가해자의 주요 가해 원인인데, 이를 교정하는 대신 이것을 이용해서 이른바 질서를 잡으려는 발상은 조폭의 폭력성을 발산시켜서 정치적 반대파를 진압시키는데 활용했던 이승만 정권의 만행까지 연상시킨다.

게다가 효과라도 있으면 좋겠으나, 그것도 아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심각한 양상을 보여주는 학교폭력은 일진, 짱 등의 횡포가 아니다. 남학생들의 경우는 어떤 형식으로든 매겨진 서열 구조에서 최 하위에 속한 학생들이 겪는 "장난이라고 주장되는" 짖궂은 말과 행동들이 학교폭력의 전형적인 양상이며, 여학생들의 경우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교우관계망 속에서 별난 아이로 인식되어 고립되는 학생들에 대한 사회적 무시가 가장 심각한 학교폭력이다. 이들은 학업스트레스, 지나친 경쟁이 고조시키는 긴장감 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더욱 이러한 서열구조와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학교폭력은 서열구조가 가지는 폭력성 자체가 해소되고, 학생들이 스트레스, 긴장, 자기현시욕, 지배욕 등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해결되기가 어렵다. 

그런데 가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완장을 채워서 그들을 서열 피라미드의 첨탑을 만들어주겠다는 발상이 이런 섬세한 목표 달성을 위해 전문적으로 설계된 교육적 방책으로 보이는가? 도리어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면 서열이 상승하는 상을 받는다는 잘못된 신호를 던져주기 십상이다. 그리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여학생들의 학교 폭력에는 완전 속수 무책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남학생들의 폭력 역시 노출되지 않는 저강도 폭력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폭력은 주동자를 찾기도 어렵고, 사실상 학급 전체가 서로를 강화시키며 공동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학교폭력에서 순찰해야 할 우범지역이란 곳은 없다.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별명 한 번 더 부르는 것도 폭력이며, 이걸 학급 친구들이 일제히 부르면 심각한 학교 폭력이다. 그 밖에 각종 메신저나 SNS를 이용한 사회적 폭력 역시 그 파괴력은 주먹으로 두드려 맞는 것 보다 더 심각하다. 주먹은 신체를 통해 정신을 파괴하지만 이런 종류의 폭력은 정신을 직접 파괴한다. 게다가 이런 저강도의 집단 폭력은 뚜렷한 가해자가 없기 때문에 완장을 채울 짱을 찾기도 어렵다. 

그런데 교육부 관계자는  "현장 실사를 나가보니 일진에게 단속권을 주면 학교폭력이 더 판을 친다는 우려와는 달리 학교폭력이 오히려 줄어들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가 생각하는 학교폭력이 무엇인지 최근 학교폭력에 대한 국제적 수준의 논문들을 읽어 보았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게다가 이 관계자는 "학생에게 지위를 부여해 책임의식을 갖도록 해 학생 스스로가 학교폭력은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걸 몰라서 폭력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알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 특히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가해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진술이 "장난이었다. 그렇게 힘들어 할 줄은 몰랐다."이다. 가해자들의 대다수도 학교폭력이 나쁜일이라는 것은 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인식이 아니라 학교폭력은 좋지 않다는 인식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느낄수 있는 공감능력과 감수성이며, 넘치는 것은 이유 모를 분노와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스트레스와 긴장이다. 관료들에게 권한다. 굳이 가해자들에게 뭔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이수하도록 해서 실적을 올리고 싶다면 차라리 합창단이나 밴드부를 편성하도록 하자. 혹은 각 학교 일진들끼리 팀을 짜서 축구리그를 돌리자. 그 편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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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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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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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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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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