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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들을 추방하고 있는 야바위꾼들의 학교


교사의 일은 겉 보기에는 지루하고 때로는 째째하다. 어린 학생들과 일상 생활을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겉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그 내밀한 부분은 바깥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다이나믹하고 변화무쌍하다. 배움이 일어나는 현장이며 변화무쌍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동과 청소년과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는 무덤덤하게 넘어갈 아주 작은 단초만 가지고도 학생들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바뀔 수 있고, 어른들은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넘어갔을 작은 단서만 가지고서도 학생들은 엄청난 규모의 앎과 상상을 초월한 창조적 산물을 내어놓곤 한다.


교사의 일이란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런 작은 단초들을 마련하기 위한 소소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코웃음이 나올정도로 사소한 그런 아이디어들 말이다. 그래서 훌륭한 교사는 겉에서 보면 아무것도 안하는 교사로 보인다. 그저 교실만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것 처럼 보인다. 교실 풍경을 봐도 아이들이 뭔가 하고 있고, 그 사이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유유자적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교사는 선생이 없어도 아이들이 충분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없으면 제대로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존재다.


따라서 이런 교사는 뭐 하나 양적으로 환산하여 바깥으로 내세울 실적이 없다. 이들의 진정한 실적은 학생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실적을 굳이 확인하고자 한다면 학생들과 함께 2주 정도 생활하면서 이들이 학생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보면 된다.


그러나 양적지표를 매겨서 순위를 매기고자 하는 관료주의자들이 이런 노력을 할 턱이 없다. 결국 이런 훌륭한 교사들은 점점 학교에서 무시 당하고 모욕 당한다. 대체로 아이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고 교육에만 매진하는 교사들일수록 각종 성과급이나 평가에서는 최하등급에 가까운 등급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 역시 성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비교육적인 일에 열과 성을 쏟는것도 견디기 어렵다. 결국 이들은 점점 학교를 떠나고 싶어한다. 학교가 이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반면 정해진 교과서의 정해진 내용을 학생들에게 쑤셔 넣는 것을 수업이라고 생각하는 교사들에게 교육은 행복한 작업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이 된다. 하루의 수업은 퇴근시간까지 견디고 버텨야 할 고역이고, 한 학기의 수업은 방학이 올때까지 견디고 버텨야 할 고역이 된다. 이런 교사들의 삶의 목표는 이 지긋지긋한 노동을 벗어나는 것, 즉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최소로 줄이는 것이 된다. 학생들과 함께하지 않는 자리로 옮기는 것을 '승진'으로 여기고,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자신의 지위가 '상승'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런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 즉 수업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들이 국어 교사라면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으며 기쁨을 나누는 일상적인 수업보다는 거창한 '시쓰기 대회'를 개최하거나 '학생 1명당 1년에 시집 한권 쓰기 프로젝트' 같은 프로그램을 펼치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천박한 교육관료집단의 시선은 학생들과 조용히 시를 음미하는 교사가 아니라 시쓰기 대회, 시집 펴내기 프로젝트 등을 펼치는 교사에게 스폿라이트를 집중한다. 이렇게 교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교사가 아니기를 열망하는 교사들의 경쟁으로 인해 학교는 수업 이외의 온갖 폼나고 뭔가 보여주는 사업과 프로젝트로 몸살을 앓는다. 그리고 정작 이런 사업과 프로젝트의 자잘한 실무는 교실에서 행복을 느끼고자 했던 교사들에게 분담된다.


최근 들어 고경력 교사들이 선망하는 자리가 된 상담교사직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학생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것이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임무다. 그런데 이런 상담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겉 보기에는 아무 일 안하는 것 처럼 보이는 상담교사가 최고의 상담교사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어느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아이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적절한 조치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담교사가 학교에서 존재감을 자꾸 드러내는 것은 마치 정부에서 국정원이 자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만큼이나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교실에서 탈출하는 방편으로 이 자리를 선택한 교사들은 일상적인 상담과 만남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거대한 프로그램을 계속 들여온다. 각종 상담 프로그램, 진로활동 프로그램을 들여와서 뭔가를 보여주며 홍보용 사진을 찍는다. 물론 외부의 시선은 묵묵히 아이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상담교사 보다는 이런 저런 상담,진로 프로그램과 행사를 개최하는 상담교사를 유능하다고 평가한다. 이제 학교에는 이런 행사들까지 추가된다. 물론 자잘한 실무는 교실에서 행복을 느끼고자 했던 교사들에게 분담된다.

이는 학교 관리자나 행정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사들의 수업이 훨씬 편리해지고 학생들의 생활의 질이 높아지도록 학교의 시스템과 시설, 기자재 등을 손질하는 일을 한다면 그 일은 매우 즐겁고 창발적이다. 밖에서 보면 째째해 보이겠지만 말이다. . 식당 배식대의 작은 변화에도 학생들의 행복이 크게 달라질수 있고, 각종 물품 구입을 조금만 더 신경쓰면 같은 예산으로 훨씬 좋은 기자재를 사용할 수 있고, 냉난방 시스템을 조금만 손보면 전기요금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시원하고 따뜻한 여름과 겨울을 보낼 수 있다.


교사가 신나게 가르칠 수 있고, 학생이 행복할 수 있도록 티나지 않게 소소하게 학교 시설과 시스템을 손 보는 것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관리자라면 학교 구석구석을 손 보고 다니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바깥에서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관리자는 든 자리가 나지 않는다. 이런 관리자가 있는 학교는 겉 보기에는 평온하고 평범하다. 그냥 모든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며, 얼른 보면 살짝 나태해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진정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런 소박하고 평범한 역할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관리자는 일상적인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뭔가 대외적으로 내세울 큰 행사를 열고 싶어한다. 그런 행사에서 개최자로 나서서 폼나게 한 말씀을 던지고 싶어한다. 그런 행사에 참석하는 고위관료, 유명인사들에게 폼나게 인사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학교는 또 행사와 프로젝트의 폭격이 쏟아진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일상적인 교육활동이 그만큼 위축된다. 관리자가 이런 행사와 프로젝트를 중요시하면 교사들도 수업은 제때 제때 교실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런 행사와 프로젝트에 매달릴 것이다. 이렇게 학교가 망가져 간다.

이렇게 자기가 하는 작고 소소한 일을 창조적으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거창한 일을 벌인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작고 사소한 아이디어들을 고민하는 사람 덕분에 학교가 움직인다. 그런데 저 거창한 일들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학교를 움직이는 소중한 인력이 위축되고 좌절하고 마침내 학교를 증오하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치명적인 손실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학교는 거의 이 지경까지 와 있다. 이제 이들을 잃어버린 학교는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이들의 존재감을 뼈져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든자리는 안나도 난자리는 크게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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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