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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선거부정 사태가 주는 교훈: 사람중심 철학의 파탄

작금의 국정원 사태는 이른바 민주정부 10년동안 우리나라에 민주적 제도와 장치가 얼마나  허약했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실 이명박이 처음 취임할때만 해도 큰 우려는 없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이 너무 설익은 것임을 증명하는데는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민주정부 10년동안 쌓아 놓았다고 자부했던 보루들, 시민의 참여와 견제, 언론의 자유, 투명하고 공정한 행정 같은 것들이 단 2년만에 거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때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불이었던 대한민국은 단 2년만에 언론 자유 수준이 중국이나 아프리카 빈국 수준인 나라가 되어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980년대를 풍미했고, 운동권의 주류사상으로 자리잡은 이른바 ‘사람중심 철학’때문에 소중한 10년을 허송세월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으로 잘못알려진 이 사상은 황장엽이 주창하고 김영환(강철)이 보급한 것으로서, ‘모든 것은 사람의 문제다’라는 명제로 복잡한 세상을 단칼에 정리해버린 사상이다. 그 출발이야 황장엽이었을지 몰라도, 어쨌든 이것은 은연중에 한국의 진보진영의 머리속에서 자가발전해온 사상이다.

그 결과 한국의 진보진영은 권력기구가 어떤 성격과 기능을 가진 것인가를 치열하게 분석하고 무력화하거나 견제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보다는 그 자리를 이른바 우리편이 많이 차지하도록 하는 쪽을 중요시하였다. 이른바 관점이 좋은 사람을 권력기구에 앉히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김대중-노무현 10년 정권을 거치면서 급기야 저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고 암투를 벌이는 지경으로까지 타락하였다. 이는 결국 누가 앉아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허무주의와, 이명박 정부에서 그쪽 사람으로 수장을 교체하기가 무섭게 한국 사회가 빠르게 권위주의 정권 시절로 회귀하게 된 근본 원인이다.

국정원과 공영 방송의 작금의 상황은 그 극명한 사례다. 국정원과 공영방송은 원래 민주주의를 위해 복무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다. 따라서 민주적 원리에 의해 작동하도록 개조하거나 파괴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진보 10 동안 그런 제도적 개혁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사람만 바꾸었다. 오히려 거꾸로 바꾼 사람들이 기존의 억압기구를 이용해 진보를 강요하는 ‘진보 독재’를 구현하려 한 면도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때 국정원에 호남인맥이 대거 등용되었다.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어가는데 이들이 나름 활약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활약하려 했다면, 국정원을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기관으로 재구성한 다음에 했어야 했다. 국정원이 군사정권 시절해 행하던 짓거리를 꿈도 꾸지 못하게끔 완전히 해체 재구성 한 다음에 했어야 했다. 

당연히 이들은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10년동안 그 억압기구들을 완전히 일소하고 새로 만든다는 각오를 가지고 치밀한 로드맵을 구성해서 차근차근 법부터 개정해 나갔어야 했다. 국정원의 구성과 업무가 법률로 철저하게 규정되어 있다면, 국정원의 내국인 수사 및 조사 기능이 완전히 폐지되었다면, 국정원이 철저하게 시민 통제하에 대외 정보만 담당하게 규정되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을까?  MBC나 KBS의 데스크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면, 방송통신위원회의 권력이 적절히 시민통제를 받도록 분산되어 있었다면, 혹은 다양한 독립 언론이 기존 방송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언론 참극이 일어났을까? 

독재 50년 독재의 잔재를 각종 기구의 수장과 일꾼, 즉 사람을 바꾸어서 일소하려고 했으니, 겨우 10년의 흔적 정도야 이명박이 임명한 기관장들에게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1987년 이후 20년간 일궈왔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는 한 순간에 소멸되었다. 이렇게 소멸되고 나니 그 20년간 남은 것은 일부 진보 인사들이 꽤 높은 자리를 한 자리씩 했다는 것, 배가 불러서 야성을 상실했다는 것 뿐, 법과 제도는 여전히 심지어는 일제시대의 법을 답습한채 남아있었고, 그것이 진보진영을 향해 날카로운 반격의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애덤스는 미국 헌법을 기초할 때 인간에 대한 불신에 기초하여 제도를 구성하였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앉더라도 권력의 독점과 전횡이 불가능하게끔 헌법을 못 박아 버린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좋은 정치 나쁜 정치를 따지기 전에 권력의 독점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무조건 나쁜 정치로 보는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북한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과 무관하다. 그렇지 않다면 영국인들은 명예혁명을 통해 구태여 왕권을 박탈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세종대왕 같은 왕을 모실 기회는 사라졌지만, 연산군 같은 왕이 앉을 위험도 사라졌다.

이제 대한민국의 진보진영도 사람중심의 철학을 버리고, 제도중심의 정교한 접근을 취해야 한다. 인정에 기초하기 보다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충실한 공화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관계와 리더쉽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입만 열면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정부’를 외쳤지만, 대통령 혼자 그 시스템을 만들기는 역부족이었고, 측근들은 여전히 ‘사람 중심 철학’에 매몰되어 있었다. 심지어 노무현이 스킨쉽이 부족하니, 인간미가 없니, 자기편을 안 챙기느니 하는 말만 나왔다. 이제 그런 실패를 두번 해서는 안된다. 진보가 집권하는가 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권하기 전에 그런 시스템의 구상이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시스템을 차례로 구현할 입법 로드맵이 갖추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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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