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밀양 어르신이 아니라 밀양 시민이다.

우리나라는 존칭의 인플레이션이 심한 나라다. 객관적으로 부를 수 있는 호칭마저 비하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것보다 더 높임 말을 만들어야만 한다. 노인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제는 노인을 노인이라고 부르면 마치 비하하는 것 처럼 여긴다. 노인이 아니라 어르신이다.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노인은 다만 나이가 일정 기준 이상이 되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에는 어떤 상하질서의 개념도 들어 있지 않다.

노인에는 노년으로 인한 여러가지 불편을 감안하여 사회적으로 배려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젊은이가 노인들을 배려하는 까닭은 정철의 시조에서 말하는 것 처럼 "나는 젊었거는 돌인들 무거우랴" 정신이지 "웃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가벼운 짐도 무겁게 느낄수 있는 약한 입장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인과 마찬가지로 배려받을 권리가 있다.

반면 어르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 즉시 상하와 장유의 질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르신에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더 성숙하고, 더 지위가 높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제로 어르신이라는 말은 반세기 전 만 하더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위가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 들어서는 노인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속에는 어떻게든 나이에 따른 상하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사회일각의 의도가 숨어 있을수도 있다고 보면 지나친 억측일까? 

어쩃든 노인을 어르신으로 부르는 사회적 분위기가 수구 우익세력에게 더 유리한것만은 사실이다. 실제로 일부 우익단체 노인들의 행태는 열다섯살 먹은 양아치들보다도 더 저질이지만, 어르신으로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닐 수 있다. 어르신은 상하의 개념이기 때문에 아랫것들에게는 신경쓰지 않는다. 어르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랫것들이 잘못이다.

이런 점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와 관련하여 일부 진보인사들이 '어르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불쾌하다. 그들이 송전탑 때문에 분노하는 것은 어르신이 아니라 밀양 시민이기 때문이며, 분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도 어르신이라서가 아니라 시민이기 때문이다. 또 밀양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공권력의 강압이 폭거인 이유도 그 상대가 어르신이라서가 아니라 시민이기 때문이다. 

굳이 밀양 어르신들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 나이를 방패 삼아 공권력이 조금이라도 움찔하기를 바란다면, 혹은 저쪽 집단에게 뭔가 부담감을 주고 여론 전에서 유리하기를 바란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바라는 정부는 시민의 반대가 심할 경우 내려놓고 대화하는 정부이지 어르신을 공경하여 행정집행을 중단하는 정부가 아니다. 그런 정부는 가스통 할배들을 법대로 엄정히 처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밀양 어르신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밀양 시민이라는 말을 사용하자. 삼척동자부터 99세 노인까지 우리는 모두 시민으로서 평등한 것이며, 그것을 당당하게 일상 용어에서부터 구현할때 비로소 공화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인 것이다. 노인들이 살아온 인생을 존중받고, 또 여러 불리한 점에 대해 배려 받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가 계속 밀양 어르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가스통 어르신, 어버이연합 어르신이라는 말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우리반 학생만큼도 어른이 아님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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