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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4중주를 보며, 막장스런 인생에서 연꽃처럼 음악이 피어난다

우선 이 영화 제목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질부터 시작하자. "A late quartet" 이걸 정확히 번역하면 "후기 4중주곡"이다. A가 붙었기 때문에 그 중 한곡, 즉 이 영화에서 연주되는 베토벤의 op.131 이다. 그런데 이걸 마지막4중주라고 명명하니 마치 고별연주회 이런식으로 읽힌다. 물론 그렇게 읽히는게 흥행에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 영화에는 마지막 연주회가 나오긴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가 완전히 왜곡된다. 이 영화는 마지막 공연을 앞둔 노음악가의 모습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를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리고자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Late quartet, 즉 후기 4중주라고 하면 사전적으로는 어떤 작곡가의  4중주 작품들 중 인생의 후반기에 작곡한 것들이라는 뜻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게 그리 간단한 용어가 아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모두 후기4중주에서 자신만의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 대중에게 친근한 음악을 주로 작곡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조차 후기4중주곡들은 난해하며 대담하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위대한 작곡가들은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때 꼭 현악4중주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 중 후기현악4중주에 가장 각별한 의미를 두어야 하는 작곡가는 베토벤이다. 작곡가의 인생 마지막 여정에서 차지하는 현악사중주의 비중이 그의 위대한 두 선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가 탁월한 후기4중주들을 남긴것은 사실이지만 베토벤처럼 오직 현악사중주에 올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을 기다리던 말년의 베토벤은 오직 현악4중주만 줄기차게 작곡했다.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들 중  op,127,130, 131, 132, 133, 135(베토베의 마지막 작품)가 줄줄이 현악 4중주다. op.128, 129, 134가 빈다고? 128,129는 간단한 소품이며, 134는 133 사중주를 피아노로 편곡한 것이다. 그러니 베토벤은 말년에 문자 그대로 현악사중주에 몰빵 했다. 그러니 베토벤의 후기4중주가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큰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베토벤의 회고록이며 참회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루소가 글로 할 것을 베토벤은 악보로 했다. 그래서 이 작품들에는 꿈, 아름다움, 추함, 고통, 회환, 희망, 관조 등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주의할 점은 관조적으로 "인생의 모든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베토벤의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들은 전통적인 형식(4악장 구조), 화성 따위를 모두 무시하며, 대중의 이해따위는 구하지도 않는다. 베토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곡들을 썼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모차르트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차르트는 이 세상을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잠시 세상을 거쳐간 손님과 같았다. 그는 세상살이에 매우 서툴렀으며, 음악을 제외하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만사를 음악으로 환원했으며, 그냥 그 속에서 살다가 그 속으로 돌아갔다. 그가 남긴 여러 편지나 기록 중 음악이야기가 아닌 것은 찾기 어렵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국은 음악이야기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그의 삶의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어루만져주는 위로이며 애무이지, 결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는 베토벤의 후기4중주와 같은 삶의 편린과 흙냄새를 맡아보기 어렵다.

반면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에서는 인생의 말년에서 돌아보는 온갖 희로애락과 미와 추, 삶과 죽음 등에 대한 회고와 성찰이 두루두루 드러나고 있다. 점잖은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음악가들의 억눌린 욕망, 세속적인 욕구, 삶, 절망, 회한 이런 것들이 결국은 베토벤의 후기4중주 연주를 통해 승화된다. 거꾸로 이런 것들을 기꺼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충분히 고통받을 각오 없이는 베토벤의 후기4중주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충분히 세속적인 삶, 흙 속의 인간임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이 놀랍도록 진솔한 베토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다.

이 영화는 유명 현악4중주단인 '푸가'의 첼리스트이자 다른 세 멤버의 스승인 피터가 말로는 쉽게 했던 "자네들 보다 30살이나 많은 내가 어쩔수 없이 먼저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정말로 직면하면서 시작한다. 게다가 그는 10만명에 하나 걸린다는 희귀병 '파킨슨'병에 걸린다. 넉넉한 정신세계로 이건 극복하기 쉽지 않아서 그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이 정신적 지주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다른 세 멤버들 역시 그 동안 "음악"이라는 종교를 빙자하여 억누르고 감추어왔던 욕망과 욕구가 폭발한다. 이들은 자신들 역시 흙냄새 풍기는 사람이며, 유한자인 사람이 겪어야 할 간난신고, 아픔, 슬픔, 회한 따위를 짧은기간동안 집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것이 바로 베토벤 후기4중주를 연주하기 위한 레슨이 된다. 

이를 상징하는 장면은 다니엘의 변화다. '푸가'의 제1바이얼리니스트인 다니엘은 베토벤의 후기4중주를 연주하려면 우선 "삶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제자에게 악보대신 베토벤의 전기를 읽고 그의 삶을 이해하라는 과제를 낸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자신은 삶 속에서 베토벤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악보를 통해 분석만 한다는 것이다. 악보에 깨알같이 적힌 메모 없이는 감히 연주하지도 못하는 완벽주의자이며 냉철한 연주자가 제자에게는 이율배반적인 요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친구의 딸이기도 한 이 제자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막장도 이만저만한 막장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이 관계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자각조차 못한다. 동료이자 제자의 아버지인 친구의 주먹에 맞고도, 그리고 존경하는 스승의 "부끄러운 줄 알아라."하는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실상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악보와 악기의 편협한 세계에서만 살아온 중년의 음악가가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며, 사랑에 눈이 뒤집히는 경험을 한 것이다. 소위 눈깍지가 씌는 경험.

놀랍게도 그들의 관계가 부적절하며, 다니엘은 '푸가' 사중주단을 지켜야 할 소명이 있다는 것을 자각한것은 훨씬 어린 제자였다. 그리고 결국 제자의 결단에 의해 관계가 청산되면서 다니엘은 40대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실패한 사랑의 쓰라림을 경험하게 된다.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를 연주하기 전에 먼저 삶을 이해해야 한다는 그 과제는 제자가 아니라 평생 책과 악보를 통해서만 음악을 이해해 온 다니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니엘은 공연에서 악보를 덮고 자신의 느낌에 따라 용감하게 연주할 수 있는 경지로 한발 더 나아간다.

2바이올리니스트인 로버트는 그 동안 꾹꾹 감춰왔던 다니엘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아내가 자신보다 다니엘을 더 존중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일거에 폭발한다. 그리하여 다니엘에게 1바이올린 자리를 요구하면서 분쟁을 일으키고, 아내가 다니엘을 옹호하자 분노가 폭발한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대신 음악의 대가로 우러러보는듯 보이는 젊은 댄서에게 빠져드는 등 막장 상황을 경험한다.

비올라 연주자인 쥴리엣은 세 남자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왔다. 언제나 신뢰할 수 있고 예술적인 유대감을 공유하는 다니엘, 자신에게 헌신적이고 다정한 남편 로버트, 그리고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정신적 지주로 든든히 버티고 선 스승 피터. 그런데 이 기둥 피터가 흔들리면서 줄리엣의 작은 세계가 균열을 일으킨다. 남편은 자신과 다니엘 사이를 의심하고, 다니엘은 엉뚱하게도 자기 딸과 사랑에 빠지며, 자기 딸은 어머니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당돌하게 비난을 퍼붓는다.

결국 공교롭게도 이 '푸가' 4중주단의 네 멤버는 공연을 얼마 앞두고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던 갖가지 고난과 시련에 시달리며, 그동안 감춰왔던 아프고 추한 면들을 드러낼수 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이 모든 시련이 끝난 뒤에 이들은 베토벤의 후기 4중주를 연주한다. 그들 모두 고통스럽지만 견뎌내어야 하는 인생이라는 레슨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느닷없이 엄습한 심지어 막장 드라마 같은 갖가지 시련들은 베토벤의 귀신이 이들에게 베풀어준 소중한 레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알반베르크 현악4중주단을 떠올렸다. 이들은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를 훌륭하게 연주한 4중주단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팀이다.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한 부다페스트4중주단, 다소 가벼운 감은 있지만 따스한 음색을 만들어냈던 아마데우스 사중주단, 풍부한 감성과 폭넓은 표현력을 자랑하는 하겐 사중주단, 그리고 한때 베토벤 후기4중주의 정통처럼 군림했던 라살 사중주단 등 여러 연주를 들어봤지만, 알반베르크 4중주단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는 많지 않았다. 이들의 연주는 무수히 많은 토론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잘 짜여진 소리를 만들었으며, 대담하고 강력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인생을 아는 연주인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푸가'4중주단과 느낌이 비슷하다. 이들이 명성을 얻은 1981년부터 25년간 활동하다가 고령의 카쿠스카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제자인 여성 연주자로 멤버가 교체된 점도 그렇고, 베토벤의 후기4중주 연주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치고 해체된 점도 비슷한 여운을 남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실제 연주를 담당했던 브렌타노 사중주단의 연주도 빠지지 않는 연주다. 단, 브렌타노 사중주단은 베토벤 보다는 슈베르트 4중주가 독보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서는 베토벤의 OP.131 사중주를 슈베르트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자 그가 임종할때 들었던 작품으로 소개한다. 미리 슈베르트스러울 연주에 대해 복선이라도 깔아 두려는 양. 미소가 나오는 설정이다.

잡설이 길었다. 베토벤의 OP. 131 현악4중주의 마지막 두 악장을 알반베르크 4중주단의 연주로 들어보자. 단 35세 이하의 경우는 베토벤 후기4중주가 잘 와 닿지도 않으며, 이 영화도 역시 잘 와 닿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드린다. 

베토벤 4중주 op.131  6악장    7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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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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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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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