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6.

교육에 침투한 극우 세력의 이념갈등 조장을 중단하라


한반도를 절반으로 갈라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남한마저 조각조각 갈라놓고 있는 이념 갈등과 색깔론이라는 산불이 마침내 교육계까지 옮겨 붙었다. 흔히 진보교육감들이 교육을 이념투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고들 비판하는데, 정작 교육계를 이념투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자칭 보수주의자들이다. 진보 교육감은 교총을 몰아내자고 하지 않으나 보수주의자들은 전교조를 해충처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교육감은 특정한 교과서를 고집하지 않으나, 보수주의자들은 특정 교과서 이외에는 모두 좌파 교과서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런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좌파들이 가장 정성껏 침투한 곳이 학계와 교육계이며, 이들이 심어 놓은 대못 때문에 좌파가 근절되지 않으므로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교육계의 좌파를 근절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좌파와 구별되는 자기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들의 주장이 왜 옳은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내용이야 뭐가 되었든지 자기들 주장에 반대하면 모두 좌파이며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마치 “나는 너를 좌파이기 때문에 미워하는데, 네가 좌파인 이유는 내가 미워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맞서는 진보진영의 대응도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진보진영이 이들의 주장에 맞설 때 두드러지는 태도 중 하나는 적대감과 경멸이다. 이런 비이성적 광기에 또 다른 적대감으로 맞서는 것은 올바르지도 않으며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우리나라를 점점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가고 있는, 그리고 이를 교육계에까지 끌고 들어가고 있는 이념갈등은 비이성적인 방향을 향해 치닫고 있다.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는 서로 상대방을 실제 상대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으로 규정해 버린다.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을 ‘종북’과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규정하고 있는 반면 진보진영은 보수진영을 ‘친일’과 ‘독재”를 중심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규정에 따라 보수진영은 좌파 교육자들이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그런 교육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견해는 모조리 종북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 민주시민교육의 기본이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적인 견해조차 이들은 종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교육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보수의 눈에 진보는 종북 빨갱이들이며 진보의 눈에 보수는 친일 독재부역자들이다. 이렇게 서로를 규정하고 있는 한 화해는 커녕 어떤 토론도 있을 수 없다. 종북주의자들이나 친일 독재부역자들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진보와 보수는 서로 상대를 근절되고 추방되어야 하는 존재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문제는 실제 학교 현장에는 저런 수준의 교사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교사들 중에 진보적인 성향의 교사, 보수적인 성향의 교사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학교에는 보수적인 교사들과 진보적인 교사들이 두루두루 존재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종북’과 ‘독재’라는 잣대로는 진보적인 교사와 보수적인 교사의 차이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진보적인 교사들 중 대부분은 북한에 대해 분명하게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보수적 교사들 중 대부분은 4.19에서 5.18, 6.10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편향된 관점을 가진 몇몇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북한에 대한 입장, 일제 강점기에 대한 입장,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입장은 진보적인 교사들과 보수적인 교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다. 종북과 독재는 교육에의 진보와 보수와 무관한 가치들인 것이다.

그러한 증거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일부 종편들이 거의 일베 수준의 5.18 폄하 책동을 시도 하였고, 심지어 여기에 일베 교사들까지 준동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거센 저항에 부딪쳐 사과방송을 하거나 교직을 상실해야 했다. 수업내용을 녹음하여 빨갱이 선생 색출하자는 이들의 선동질도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다. 이들 극우세력의 주장이 교육계를 좌우 대립으로 반분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들만 고립되고 만 사실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의 건강성을 반증하는 사례다. 또 다른 사례는 최근 교육계를 뜨거운 논란과 경악으로 몰아 넣었던 교학사 역사교과서 문제다. 역사교사들의 대다수는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한다. 만약 역사교사들의 대다수가 종북좌파라는 비이성적인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면 보수성향의 역사교사들도 이 교과서를 거부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이제 양 진영은 서로 상대방의 진짜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보는 종북이 아니며, 보수는 독재가 아니다. 종북과 독재는 단지 양 진영의 극단에 위치한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다. 이들 병든 소수가 서로 상대방을 왜곡한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목소리를 높여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동과 마타도어는 있을지언정 제대로 된 논쟁은 불가능하며, 진보나 보수의 보편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양 진영의 비이성적인 극단주의자들의 목소리만 높여 줄 뿐이다.

교육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떤 신념이나 주장을 무비판적이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합리성의 잣대로 충분히 비판적으로 검토하느냐에 있다. 그러니 적어도 교육자들이라면 사회 다른 분야에서 아무리 비이성적인 이념갈등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무작정 상대를 비난하고 나서기 전에 먼저 상대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 상대의 주장인지를 따져보는 굳건한 이성의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또한 교육에 섵부른 이념논란을 끌고 들어와 풍파를 일으키는 극단주의자들을 스스로 가려내어 논파하는 저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100년지 대계이며, 대한민국의 진정한 인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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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2.

오스트랄로 선생님을 떠나 보내는 학생들

오스트랄로 선생님은 최근 우편향 역사교과로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그 교과서의 지은이 중 한 사람이다. 본인의 명예를 위해 그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별명은 그가 초임교사 시절 역사교과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화석과 닮았다고 해서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본인도 그 별명을 싫어하지 않았기에, 그 청년 역사 교사는 학생들에게 오스트랄로 선생님이라고 불리며 인기를 독차지 했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역사는 "태정태세문단세"가 상징하듯 그저 연대표나 왕 이름, 사건이름 외우는 과목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랄로 선생님의 역사시간은 달랐다. 그 시간은 이야기가 살아있고, 캐릭터가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탁월한 연기력을 자랑했던 그는 별명 그대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흉내는 물론, 단신으로 독재에 맞서려고 하던 브루투스도 실감나게 연기했으며, 제국주의가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대목에서는 울분을 터뜨렸고, 동학농민운동, 5.4 운동, 그리고 신해혁명처럼 억압받던 민초들이 들고 일어서는 대목에서는 마치 자신이 혁명가라도 된 양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렇게 격정적인 모습 이면에는 고요한 모습도 있었는데, 틈만 나면 정간보 악보를 보며 대금이나 소금을 연주하며 고요한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정간보를 처음 접해 본 학생들은 오스트랄로가 한문책을 보면서 피리를 연주한다며 신기해 했다.

오스트랄로 선생님 수업시간에 가장 압권이었던 장면은 억눌리고 수탈당하던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 외세와 그 앞잡이들을 처단하는 장면이었는데, 실제로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한편의 액션영화를 연출하곤 했다. 학생들은 그의 수업을 들으면서 역사라는 것이 단지 창백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의의 가르침이며, 불의에 항거하는 용기의 보고임을 배웠다.

오스트랄로 선생님은 결코 학생들 앞에서만 용감했던 교사가 아니었다. 암울하고 숨막히던 5공화국 시절 그 시대의 숨통을 열어젖힌 용기있는 교사들의 이런 저런 소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함께 모여서 우리나라의 모순의 근원을 탐구하고, 독재정권을 정당화 하는 왜곡된 교육을 바로잡을 전망을 고민하였다. 이런 학교 안팎에서 보여주었던 의로운 모습 덕분에 오스트랄로 선생님을 학생들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학생들은 집에 가면 부모 형제 앞에서 역사시간에 배웠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자랑하느라  바빴다. 그 덕분에 좌경의식화 교사라면서 학교에 항의전화도 꽤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적어도 1980년대 내내 그는 자신의 길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역사 수업을 듣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거나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된 학생들도 부지기수였다. 

1989년 전교조가 설립되면서 1500명의 교사들이 대량으로 해직될 때 오스트랄로 선생님 덕분에 의식을 깨우쳤다고 생각하던 학생들은 전교조 해직교사 명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오스트랄로 선생님의 이름은 없었다. 이때 학생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실망했다고 해야 할지 몰라서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때 전교조 투쟁을 했던 교사들이 모두 해직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던 격동의 1989년 가을에 오스트랄로 선생님의 제자 하나가 우연히 서울대학교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 학생은 너무 반가운 마음에 한 달음에 달려가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학생 운동에 투신하여 민주화 운동, 민중 운동에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지를 마치 칭찬을 바라는 중학생 마냥 자랑했다. 그러면서 거짓 뿐인 세상에서 진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역사 수업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 덕분에 의식을 깨우쳤다는 찬사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오스트랄로 선생님의 표정이 미묘했다. 마지못해 '그래.투쟁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라.' 라고 덕담을 던져주긴 했지만 뭔가 민망해 하고 멋적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날 이후 오스트랄로의 학생들은 선생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선생님이 있을 만한 단체, 있을 만한 장소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 보았지만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학생들도 어른이 되고 생활인이 되면서 20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러던 중 학생들은 오스트랄로 선생님의 이름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반가워 할 수 없는 곳에서 그 이름을 찾았다. 교학사 역사교과서에서 그 이름을 찾은 것이다. 

그 교과서가 어떤 교과서인가?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유신 독재를 미화하고 항일투쟁과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는 우편향 교과서다.  아니 그 보다는 한 페이지 넘길때 마다 오류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틀린 교과서다. 그 어느 경우에도 오스트랄로 선생님이 이름을 올릴 교과서가 아니다. 제국주의의 침탈사를 가르치며 울분을 토하고, 민중들의 저항을 가르치며 감격했던 오스트랄로 선생님이다. 정확하고 꼼꼼한 역사지식, 한문으로 된 사료를 한글처럼 읽으며 연구했던 실력파가 오스트랄로 선생님이다. 

학생들은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과서에 소개된 저자약력을 보니 틀림없는 오스트랄로 선생님이다. 학생들은 멘붕에 빠졌다. 오스트랄로 선생님의 역사 수업을 듣고 의식을 깨우쳤다 생각하고 그렇게 마흔이 넘도록 살아왔던 학생들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반민주, 반민중, 반민족, 반지식 교과서에 떡하니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했던 말, 혹은 지금 이 함량 미달의 교과서로 퍼부어 대고 있는 말 둘 중 하나는 거짓이란 뜻이다.

 이 교과서에서 하고 있는 말이 거짓이라면 오스트랄로 선생님은 젊은 시절 간직했던 진실을 배반한 것이다. 젊은 시절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오스트랄로 선생님은 학생들을 상대로 거짓 선동을 했던 것이다. 그 어느 경우라도 귀결은 하나다. 오스트랄로 선생님은 거짓말쟁이다. 학생들은 슬펐지만 그를 떠나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오스트랄로 선생님 왜 거기 계셔요?"라고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교사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인, 제자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는 벌을 가하기로 했다. 그가 그 벌을 아직 아파할 줄 알기를 마지막으로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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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6.

통진당과 그 지지자들은 이석기 구속에 대해 울부짖지 말고 냉정히 대처하라

어제 이석기 의원이 구속되었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기록해 둔다. 

1)울부짖는 모습은 자제했어야 했다.

이석기 의원은 "이 도둑놈들아!"라고 외치면서 마치 6월항쟁때 닭장차 끌려가던 김영삼 처럼 온몸을 비틀며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이후 지지자들과 통진당 역시 격정적이고 격앙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매우 좋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생각하니, 혁명가의 언어로 점잖게 권고하겠다. "잡혀가는 것도 전술이다." 잡혀갈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가 이후 지지자들의 사기를 다지고, 또 여론이나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 지도자 정도가 되려면 적에게 잡혀갈때도 최대한 의연하고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다.
그리고 "세상 모두가 우릴 적으로 삼는다!"라는 식으로 외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적이 아닌 세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끄러움과 온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재판부에 대해 "너희도 한 통속이다!"하고 외치는 것은 아직 재판도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매우 어리석고 감정적인 반응이다. 이런 격정적이고 격앙된 반응은 이들의 초조함만을 보여주며, 이들이 신뢰할만한 집단이 아니라 일종의 컬트집단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만을 높여줄 뿐이다. 

당사자가 내 블로그를 자주 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소 부담스럽지만, 곽노현 교육감이 수감될때 모습, 그리고 정봉주 의원의 모습을 참고로 올려 둔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정치적인 판결로 기록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형법상 공범인 강경선교수, 또 박영선, 김현미 의원 등이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실형이 선고되었다는 점은 이 두사람을 억울한 희생자로 생각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정돈되고 의연한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지지자들은 흐느낄지언정 본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수감을 건수로 삼아 추악한 사진을 확보하려고 하던 조중동에게 어떤 빌미도 내어주지 않았다. 곽교육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머금고 마치 여행이라도 다녀오는듯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어들어갔다. 재판부에 대해서도 "여론과 통념의 압력을 넘지 못했다" 정도로 평했지, 무슨 정권의 압력이니, 정치재판이니 이런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정봉주의원은 차분한 모습으로 흐느끼는 지지자들을 위로하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만약 이들이  "정권의 주구, 재판부는 각성하라!"라고 외치면서 온몸을 비틀며 울부짖는 모습으로 수감되었다면, 저들이 원하는 사진이 무수히 양산되었을 것이다. 그들이라고 마음속에 억하심정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미 그들의 망가짐이 진보진영의 망가짐이 되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음을 받아들이고,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한치의 헛점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곽노현교육감 수감장면

정봉주의원 유죄확정 장면

이들은 자신들을 혁명의 리더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랬다. 그렇다면 혁명의 지도자 정도 되려면 어때야 했을까? 당사자도 지지자들도 자신들이 어떻게 보이고 비추이는지 생각하고 연출하기 바란다. 진정성은 날것 그대로라는 뜻이 아니다.

2) 구속영장에 과민반응 하며 여론전 하지 말고 재판에 조용히, 그러나 철저히 임하라

일단 구속을 곧 처벌로 보는 생각부터 버리자. 이 생각 때문에 자꾸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 구속은 처벌이 아니라 수사와 기소의 방법이다. 영장심리 판사는 피의자의 죄의 유무를 가리지 않는다. 죄의 유무에 대해 나름 판단할수도 있으나 그것이 구속 여부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구속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두가지인데  이 두가지가 모두 해당이 되어야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1) 이 피의자에 대해 검찰이 죄의 유무를 따질만한 상황인가? 
2)수사가 끝날때 까지 이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는가? 이다.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해야 할 이유는 이 피의자를 풀어두면 돌아다니면서 증거를 훼손하거나 인멸할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아예 도주해 버려 재판에 출석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다.

1)의 기준에 해당되면 "범죄가 소명이 된다."라고 판결한다. 이건 유죄란 뜻이 아니라, 현재 밝혀진 사실과 정황으로 보아 이 피의자가 범행을 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2)의 기준에 해당되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 "도주의 우려가 있다."라고 판결한다.

그렇다면 이석기 사건의 경우는? 담당 판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안이 중대하고 범죄행위 소명된다"며 1)의 조건을 인정한다. 이건 이들이 모여서 한 이야기가 '농담'이라 할지라도 워낙 엄중한 사안이기 때문에 실제 이 농담을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좀 캐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내란죄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들이 모여서 한 농담이 "기름값 비싸서 못살겠으니 주유소를 습격하자" 정도였으면 범죄행위가 소명된다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농담이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을 어떻게 도울지 계획을 세워보자." 수준이라면 이게 진짜 하려고 한건지 농담인지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은 절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1)의 기준이 충족되었으니, 이제 2)의 기준을 따져야 한다. 그런데 이석기는 이미 이 기준에서 의심받을 행위를 많이 한 상태다. 만약 의원실 압수수색 들어왔을때 의연하게 그 자리에 임해서 영장을 확인하고 영장에 적시된 것들만 압수수색하는지 차분하게 체크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이석기는 종적을 감추었고, 의원실 직원들은 압수수색 팀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문서 파쇄기는 미친듯이 돌아가고있었다. 자, 생각해 보자. 이게 김하영의 '셀프감금'과 무엇이 다른가? 문을 열어주지 않은 김하영은 열심히 댓글을 지우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지 않은 의원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건 합리적 의심의 대상이 충분히 된다. 게다가 통진당 대변인은 "압수수색을 했음에도 더 이상 증거도 없다!"라고 외치고 있다. 게다가 이상규, 김재연, 김미희가 저마다 다른 말을 하고, 이정희는 입을 열때마다 말이 바뀌고 급기야 "농담"이라고 까지 했다. 이런 사건에서 관련자들의 '증언'은 중요한 증거인데, 영향력 있는 의원이 마음대로 활동할 경우 관련자의 '증언'이 언제든 바뀔수 있다는 개연성을 스스로 보여준 꼴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라고 판결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애초에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이 검찰의 오버일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서 일단 청구된 영장을 기각하기는 대단히 어렵고, 유감스럽지만 영장 기각을 어렵게 만든 조건은 통진당이 스스로 만든 부분이 많다.

그러니 통진당과 그 지지자들은 이제 겨우 구속영장 단계에서 벌써부터 격정을 터뜨리면 분노를 증폭시켜 싸움을 벌려 이 일을 수습할 생각을 하지 말라. 지금 시대는 그렇게 맞짱을 떠서 이기는 시대가 아니다. 치밀한 법리와 사실 외에는 답이 없다. 그들에게는 남조선의 법이 법으로 안보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렇게 여론을 불러 일으켜서 이길 생각이라면 그런 여론이 불러 일으켜지지도 않을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 재판을 "정치재판"으로 만들어서 "정치적 판결"을 내리라는 압력만 가중시킨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심지어 정의당까지 모두 체포동의안을 찬성했다. 이 재판이 법리와 사실이 아니라 여론전으로 흘러 정치적 판결을 할 압력이 가중된다면 판사들이 어느 편을 들게 될지는 벌써 답이 뻔히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통진당과 그 지지자들은 이제 이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가서 법리와 사실로 싸우라. 가능하면 드러나지 않고, 조용하게. 공연히 이 사건을 들고 거리로 나와 촛불에 호소하여 여론을 일으키려 한다면, 여론도 일어나지 않고 촛불에 확실하게 물을 끼얹는 효과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부디 자중하기 바란다.

일베, 국정원 못지 않은 통진당, 특히 경기동부의 엄청난 악플이 예상되지만 내가 언제 그런거 두려워한 사람인가? 그냥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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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5.

교육을 조롱하고 행정을 숭상하는 부장교사 보직을 정상화 하고, 담당계라는 분장을 폐지하라

실제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 상황이다. 어느 중학교에 학생들을 매우 사랑하고 또 학생들도 잘 따르고 존경하는 노교사가 한 분 있다. 경력이 33년이 넘은 그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헌신적으로 챙기며 젊은 교사 못지않게 열정적인 수업을 한다. 그런데 젊은 교사들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 심지어 젊은 교사들끼리 모였을 때는 단골 안주로 전락하기까지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이유를 알아 보니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선생님의 컴퓨터 실력은 OA는 커녕 독수리 타법 겨우 면한 수준이다.

이건 학교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교사는 사무원이 아니라 교육자 아닌가? 그렇다면 수업 잘 하고,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교사가 젊은 교사의 존경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컴퓨터에 어눌하기 때문에 빈축을 사다니? 그러나 교사라면, 특히 경험 많은 교사라면 이 상황의 원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원인은 학교를 왜곡시키고 있는 부장교사 제도다.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관공서, 회사는 물론 시민단체에도 부장이니 실장이니 하는 간부가 있다. 학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지 않을까? 부장교사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물론 원론적으로는 옳다. 교육적 권위와 경험을 인정받는 고경력 교사가 부장교사 등의 호칭과 함께 일정한 권한을 가지는 체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부장교사 제도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부장교사는 고경력 교사의 교육경험과 권위를 존중해서 설치한 간부직이 아니라 단지 행정일을 시키기 위해 설치한 보직에 불과하다. 원래 교사의 법정 업무는 당연히 ‘교육’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저런 교무(校務)를 담당할 충분한 직원을 채용하는 대신 교사들 중 일부에게 교무를 분담시킬 근거를, 즉 일종의 뒷문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부장교사인 것이다. ( 초중등교육법 19조 3항). 그런데 독재 정권 통치하에 우리나라 학교에는 교육보다 행정을 우대하는 풍토가 만연했고, 그 결과 행정업무를 분담하는 부장교사가 교육을 전담하는 교사보다 더 상급자라는 그릇된 인식이 정착하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학교에는 오랜 세월 교육에 전념한 교사를 우대하고 예우하는 제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부장교사 보직을 고경력 교사를 예우하는 자리로 사용하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즉 행정업무 분담 보직인 부장교사를 고경력 교사에 대한 예우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수업시수의 문제다. 행정 업무를 분담하려면 교육에 투입되는 시간, 즉 수업 시수를 줄여야 한다. 그런데 교육 당국은 이를 전혀 감안하지 않고 교사 정원을 책정한다. 따라서 부장교사가 행정업무를 담당하려면 다른 교사들에게 그 만큼의 수업 시수를 전가해야만 한다. 물론 독한 부장교사는 평교사보다 훨씬 적은 수업을 하겠다고 우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장교사 역시 상당시간의 수업을 담당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생겨난 또 다른 악습이 이른바 ‘계원’이다. 부장교사가 수업 다 해 가면서 행정업무를 전적으로 분담하기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에 모든 교사들이 ‘보직’ 없이 행정업무를 분담하게 되었다. 교사들은 이렇게 분담한 행정업무의 이름을 따서 ‘~계원’으로 불리면서 해당 부장교사의 부하직원처럼 배치된다. 이게 수십 년 째 바뀌지 않고 내려온 우리나라 학교의 교사 조직이다. 여기에는 사회교사, 국어교사, 수학교사가 없다. 각종 업무 담당계원과 소관 부장이 있을 뿐이다. 교사는 교육이 아니라 행정업무에 따라 담당계원으로 조직 편성된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큰 문제가 발생했다. 행정전산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주로 고경력자들인 부장교사들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산화와 함께 학교의 각종 행정업무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났다. 그 결과 컴퓨터에 능한 30대 교사들에게 각종 행정업무가 집중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들 30대 교사들은 수업시수 경감, 학급담임 면제라는 부장교사의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수업 할 것 다 하고, 담임까지 맡으면서 행정 업무도 대폭 늘어난 셈이다. 부장교사들이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도 컴퓨터 장벽을 넘지 못하여 큰 도움이 되지 못하며, 때로는 안 도와주는 게 돕는 거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이들 30대 교사들을 부장교사로 보임하여 행정업무를 분담케 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지만, 아직도 학교에서는 부장교사가 행정담당 보직이라는 인식보다는 상급자라는 인식이 남아있어서 젊은 교사들을 부장에 보임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 결과 오랜 경륜과 교육적 성취를 통해 존경을 받아야 할 고경력 교사들조차 젊은 교사들 눈에는 컴퓨터 제대로 못 다루어자기들에게 업무 폭탄 전가하는 마땅치 않은 존재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학교의 교육공동체간의 단절을 가져온다. 젊은 교사들과 고경력 교사들간의 소통과 교류가 거의 단절되어 있는 것이 우리나라 학교의 현실이다. 교육이 아니라 행정업무 때문에 훌륭한 노교사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학교는 그 자체로 비교육적이다.

이런 비교육적인 일은 ‘교사의 업무는 교육’이라는 너무도 간명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보직을 부여하면 행정업무를 분담할 수 있다’라는 작은 뒷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작은 뒷문이 점점 크게 열리면서 이제는 교육공동체 전체를 분열과 불신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뒷문에서 비롯된 문제는 우선 원칙을 공고히 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교사는 교육에 전념해야 한다. 교육 이외의 업무는 교사가 아니라 행정직인 교장, 교감, 그리고 직원이 담당해야 하며 업무가 지나치게 많으면 이들을 증원하여 해결해야 한다. 물론 고경력 교사를 예우할 수 있는 부장교사 등의 직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행정업무 분담을 위한 보직이 아니라 교육적 권위를 가지는 직책이라야 한다. 따라서 학년부장, 각 교과부장을 제외한 모든 부장교사를 폐지하고, 행정업무를 교사가 분담하는 소위 ‘담당계’, 특히 교사인지 행정주사인지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는 소위 ‘기획계’를 폐지하는 조치가 시급하다. 이는 결코 학교혁신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학교정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색이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는 정부에서 학교가 교육의 장소이고, 교사는 교육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 이거 하나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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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