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 창조를 질식시키는 경직된 교장제도를 두고 무슨 창조?

재경부에서 일하다가 부처 이동 케이스로 교육부를 몇 년 경험해 본 어느 고위 관료의 경험담이다. 재경부에서는 국장이나 과장을 찾는 전화가 올 경우 부하직원이 내선 전환으로 연결해 주는 일이 매우 당연했다고 한다. 사실 재경부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분이 교육부로 오자 가장 먼저 느낀 변화는, 하급자들 중 내선 전화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전화나 메신저로 업무 추진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꼭 몇 층을 거슬러 올라와서 직접 대면 보고를 한 뒤 다시 몇 층을 내려가거나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외부에서 전화가 오면 내선으로 전화 돌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십 미터를 직접 걸어와서 전화 돌려 드릴까요?”라고 물어 본 뒤,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돌리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식 시간을 빌려 메신저로 물어보면 바로 메신저로 답하거나 내선 전화로 이야기 하면 되지 왜 시간 낭비해 가면서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야기하고 다시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웃 사람한테 어떻게 전화나 메신저 띡 던지고 그럽니까?" 였다.

사실 재정부라고 해봐야 어차피 관료조직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료조직이 권위적이고 경직된것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며, 재정부가 특별히 혁신적이거나 탈권위적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관료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의 눈에조차 교육관료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권위적이었다. 교육은 미래를 담당하는 창의적인 작업이다. 그러니 다른 분야가 다 관료주의적고 권위주의적이라도 교육계 만큼은 유연하고 창의적이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부처 관료에게 너무 권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훈수를 듣는 교육계가 우리 현실이다.

이 경직된 교육 관료들 중에는 교사 출신인 장학관들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관료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경직되고 권위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장학관들이 결국 몇 년 지나면 교장이 되어서 학교로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학관들은 이른바 웃 선에게 직언하면서 교육적 소신을 지키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어차피 몇 년만 꾹 참으면 꿈에 그리던 교장이 되어 나갈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들은 상급자에 대한 절대 복종을 몸에 익힌다

학교라는 기관은 단일 기관으로서는 상당히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장 위로는 상급자가 전혀 없는 기관이다. 따라서 이런 권위주의와 경직성, 그리고 웃선 바라기를 학습한 관료들이 교장으로  부임할 경우 발생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장 큰 폐단은 이런 관료 출신 교장들의 눈은 교실이 아니라 항상 저 윗 선 어딘가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과정, 즉 수업이 아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학교보다 상급 관청을 지배하는 관료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들의 시책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특별 프로그램에 있다. 교육감이 진로라는 말을 강조하면 진로교육이 바로 교육의 중심이며, 교육부장관이 행복을 말하면 행복교육이 교육의 중심이 된다. 그러면 교장들은 진로나 행복과 관련된 특별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하나라도 더 실시하려고 안달이 난다.

결국 교사들이 이런 특별 프로그램과 행사에 매달리게 되면서 학교교육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교육과정의 수행, 즉 수업의 질은 곤두박질 친다. 그나마 이 프로그램이나 행사가 내실있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고 의전이다. 이런 보여주기 식 프로그램이나 행사에 얼마나 많은 예산이 허비되고 있는지 안다면 국민들은 교육세 납부를 거부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런 교장들이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또 다른 폐단은 독단주의다. 관료시절부터 상급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체질화한 이들은 교사, 학생, 학부모를 하급자로 간주한다. 그래서 전교생, 전교사가 반대하는 일도 교장의 한 마디에 시행하고, 전교생, 전교사가 원하는 일도 교장의 한 마디가 없으면 시행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교사는 학생이 원하는 것을, 교장은 교사가 원하는 것을, 교육청은 학교가 원하는 것에 민감한 것이 정상인데, 현재 우리나라 교육계는 교장은 교육청이 원하는 것에, 교사는 교장이 원하는 것에, 학생은 교사가 원하는 것에 민감해야 살아남는 정글이 되어 있다. 이런 학교에서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턱이 없으며,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소위 창조경제를 담당할 인재가 성장할 턱이 없다.

창조경제는 대통령이 창조를 외친다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조경제는 교실에서부터 시작된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창조적인 경제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며, 창조적인 사람들은 교육 없이는 저절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를 경직되고 권위적인 구태의 온상으로 만들고 있는 교장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야 말로 창조경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교장제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소위 민주정부, 혹은 좌파정부 10년 동안에도 터럭만큼도 바뀐 적이 없다. 이런 학교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며, 그렇다면 이런 나라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번 정부가 큰 업적을 남긴 정부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을 아직 가지고 있다면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감히 하지 못한 일, 수 십 년 간 학교를 좀먹어 온 교장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에 눈을 돌려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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